풍월의 쉼터/MBC사우회

국숫집에서 배우다

풍월 사선암 2011. 11. 22. 11:28

 

국숫집에서 배우다

 

강재형 - MBC 아나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세 가지가 있다.

입을 것()과 먹을 것() 그리고 살 곳()이다.

 

이 가운데 내게 즐거움을 주는 으뜸은 먹을 것이다.

"(맛있는 걸) 먹기 위해 산다"라는 말이 그래서 낯설지 않다.

그렇다고 미식가는 아니다.

그저, 가리지 않고 잘 먹을 뿐이다.

이른바 '육해공(陸海空)'을 두루 좋아한다.

 

밥상을 물릴 때 남는 것은 빈 그릇뿐일 때가 많으니 먹성도 좋은 편이다. 언제부터는 들판에 피어난 꽃송이도 툭툭 뜯어 먹는다. 여행프로그램 촬영 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꽃과 풀이 뭔지 배운 덕분이다.

 

물에서 나는 고기와 바다가 안겨주는 온갖 해산물, 식탁을 풍성하게 채우는 채소류는 내게 '생존' 보다 '만끽'의 수단이기도 하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지만, 밀로 만든 음식은 썩 내켜 하지 않는다.

수입 밀로 만든 밀가루 음식이어서? 그냥, 쌀밥이 더 좋기 때문이다.

소싯적에 어쩌다 한번 가곤 했던 경양식 집에서 웨이터가 '라이스()''' 중에

고르라면 답은 한결같았다. 돈가스에 칼질하면서도 '라이스'챙겼으니까.

중국집에 가도 볶음밥을 먹고, 짜장면이나 짬뽕이 당기면 짜장(짬뽕)밥을 주문했다. 이런 내가 얼마 전부터 국수에 푹 빠졌다.

 

나를 그곳으로 이끈 이는 면발을 좋아했다.

마지못해 따라간 그 집에서 '차가운 멸치 국수'를 맛본 뒤 국수를 다시 봤다.

대멸(큰 멸치)과 디포리(밴댕이의 방언)로 맛을 낸 육수도 기가 막혔다.

뒤늦게 안 국수의 깊은 맛이란.... . 그런데, 아쉬운 게 있었다.

 

"태백에서 자란 고냉지 배추"라 쓴 원산지 표시안내 문이었다.

그냥 값 치르고 나오면 될 것을

주인에게 "고냉지는 '고랭지'라 하는 게 맞다"라는 한 마디를 건넸다.

'첫 음이 아니니 찰 랭()을 두음 법칙과 무관하다'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얼마 뒤 다시 찾은 그 국숫집 안내문은 '고랭지'로 바뀌었다.

환하게 웃으며 "바꾼 거 보셨지요?" 하는

주인의 말이 시원한 국수 국물보다 고맙고 반가웠다.

 

이런 느낌은 천 원짜리를 꼬깃대던 어르신들이 사람 수보다 적게 만두를 주문하자 주인이 서비스라며 상 가득 만두를 내놓는 걸 보고 더 강해졌다. 괜한 지적한 게 아닌가 싶어 찜찜했던 내 마음을 풀어 준 것은 이렇듯 넉넉한 주인의 인심이었다.

 

# 심장에서 나온 것은 손에서 나온 것보다 위대하다. / 베두인 족 속담

 

- MBC사우회 카페에서 - 

첨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