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녹음기 시대 - 이득렬

풍월 사선암 2011. 11. 11. 10:36

우리들의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게 하는 책 '잃어버린 서울 그리운 내고향'이득렬 사장의 에세이 입니다. 그 중에 하나를 실어 봅니다. 함께 읽고 싶은 것 많은데 독수리 타법으로 옮겨 실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 bellee -

 

녹음기 시대

-이득렬-

 

6.25 때 이승만 박사가 서울은 사수할 테니까 염려 말라고 서울시민에게 방송을 했다. 해묵은 얘기지만 이 박사의 목소리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피난 시기를 놓쳐서 공산당에게 목숨을 빼앗기거나 서울에 남아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는 녹음된 것이었다.

   

필름처럼 릴에 감긴 녹음테이프의 녹음기가 우리들 일반 사람들 앞에 나타난 것은 전쟁 직후였다. <기쁜 소리사>가 있었던 서울 충무로 전파상회와 청계천 라디오 가게 그리고 종로 3가 일대 라디오 가게에 미제 녹음기가 등장했다.

 

전쟁직후에는 전부 미국제였지 일본제 녹음기는 없었다. 필름처럼 생긴 밤색의 테이프가 돌아가면 조그만 전구에서 음의 고저에 따라 붉은 불빛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노래가 나왔다. 신기하기 짝이 없는 것이 마이크에다 대고 한마디하고 되감았다가 틀면 금방 내 목소리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너무 신기해서 깔깔대고 웃는다.

 

" , 이게 니 목소리냐? 목소리 좋은데......"

사람들은 녹음된 목소리가 재생될 때마다 까르르 웃었다.

 

나는 중학교 때 웬만한 사람은 비싸서 사지 못하는 녹음기를 살 수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방송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을 아버지가 아셨기 때문에 비싼 녹음기를 가질 수가 있었다. 큰돈을 주신 것이다. 종로 3가에 있는 전파상회에서 녹음기를 구입했는데 미국제 윌콕스 녹음기였다. 30, 한 시간 돌아가는 녹음기였다. 라디오 가게 주인은 처음에 나를 본체만체했다. 중학생이 녹음기를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장이 나면 반드시 고쳐 준다는 다짐을 받고 샀다.

 

저녁때 집에서 녹음기를 틀었는데 동네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나는 자랑스럽게 윌콕스 녹음기 옆에 앉아 녹음기를 조작했다. 마이크는 상당히 커서 어른 주먹만 했다.

 

"누가 노래를 하지!"

주인인 나는 가만히 있는데 노래자랑 사회자가 나타났다.

 

"저 옥순 어마이가 먼저 하지." 

동네에서 남의 일에 참견하기로 유명한 황해도 출신 노인 한분이 어느새 나타나서 지명을 했다. 사람들이 또 한 번 까르르 웃었다. 왜들 그때는 별것 아닌 일에도 그렇게들 웃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노래 지명을 받으면 쉽게 안 하는 것은 유명한 일. '이미자''나훈아'실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노래만 시키면 일단 도망간다. 억지로 노래를 시켜 놓고 딴전을 피우는 것도 우리들이다.

 

옥순이 아버지께 마이크를 드렸고 노래가 시작 됐는데, 또 성미가 급한 것도 우리네라, 한 곡을 다 듣지도 않고 사람들은 그만그만하면서 녹음된 것을 들어보자고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되돌렸다. 잘못하면 스톱을 누를 때 테이프가 끊어진다. 과연 옥순 아버지의 노래가 나왔다. 틀림없는 옥순아버지가 기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까르르 웃었다. 노래하는 도중에 그만 그만 소리가 나왔다. 이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또 웃었다.

 

나는 녹음기를 가지고 KBS연속극을 녹음 했고 라디오 가요 곡'도 녹음해 두었다. 라디오의 연속극이야 한 번쯤 들으면 그만인데 그것을 다시 녹음해서 듣고 좋아한 것이다.

 

도둑들이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면서 빨래도 걷어 각도, 신발도 훔쳐가고, 방안에 걸어 놓은 양복도 장대를 들이 밀어서 훔쳐 가던 때라 '녹음기 있는 집'이 목표가 됐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책상위에 있던 윌콕스 녹음기가 간 곳 없었다. 도둑의 짓이었다.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님께 감사를 드린다.

 

슬퍼하는 나를 위해서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녹음기 한대를 또 사 주신 것이다. 이번에 산 녹음기 역시 미국제품으로 '벨 앤드 하우엘'사 것이었다. 이 녹음기를 사면서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는데, 전파상 주인들이 상표를 마음대로 발음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벨 앤드 하우엘 (Bell & Howell)은 벨 앤드 하우엘이라고 하지 않고 벨이나 하우엘로 불렀다는 것이다.

 

라디오 가운데 '헬리크라프트'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이것은 간단히 '헬리콥터'라고 불렀다. 두 번째 산 녹음기는 오랫동안 소중하게 썼다. 가끔 장기범 아나운서 (KBS)가 축구 중계하는 것을 흉내 내 봤는데 사람들이 듣고 그럴듯하다고 해 주었다. 지금도 방송국에서는 음질 때문에 릴 녹음기를 쓰는데 가정용은 '60년대 후반부터 지금의 카세트 녹음기로 바뀌었다.

 

'66년에 인사동에 있는 문화방송에 입사했을 때도 아이스케이크 통만 한 녹음기를 메고 다니면서 사용했다. 소니제품이었는데 상품 이름이 EM2였다. 처음에 EM2는 건전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태엽을 감아서 쓰는 것이었다. 녹음하면서 방송기자는 태엽을 감았다. 조금 후에 건전지로 돌아가는 녹음기가 도입 됐는데 우리 같은 졸병기자는 손으로 돌리는 녹음기밖에 차례가 안 왔고, 건전지는 고참 들이 메고 다녔다. 카세트 녹음기는 회사가 사들이기 전에 외국에 나갔던 기자가 먼저 들여왔다.

 

외국에 나갔던 김현철 기자가 네덜란드에서 개발한 도시락만한 필립스 카세트 녹음기를 개인적으로 사왔다. 성능이 좋지 않아서 실제로 방송에는 쓰질 못했는데, 나는 후에 이 카세트 녹음기를 특종을 하는데 유용하게 썼다.

 

구봉광산에서 여러 날 만에 구출된 광부 양찬선씨가 메디컬센터에 입원 했을 때, 나는 의사로 가장하여 독점취재를 했다. 그 때 새로 나온 카세트 녹음기를 가운 옆구리 속에 감추고 녹음을 했다. 모 신문이 잘생긴(?) 의사가 양찬선씨를 치료 하는 줄 알고 사진을 찍어 사회면에 크게 냈다가 의사가 아니라 mbc기자라는 것을 알고 2판에서 사진을 바꿔 끼웠다.

 

60년대에 방송기자를 얕보던 신문기자들은 우리가 커다란 녹음기를 메고 나타나면 '아이스케이크 통'이냐고 농담을 했다.

 

다시 얘기는 전쟁 직후로 돌아간다. 전쟁 직후에는 우리나라 녹음기는 물론이고 라디오도 생산을 못해서 미국제가 판을 쳤다.지금도 나는 그때 것을 보관하고 있는데 라디오 왕자는 단연 제니스였다. 강력한 단파 라디오로 이 라디오는 당시 부의 상징이었다. 영화를 찍을 때 큰 부잣집이나 권력가의 응접실에는 반드시 제니스가 등장 했다.

 

3대 라디오가 있었다. 제니스가 일등이었고, 다음에 RCA라디오, 그리고 영국제품인 필코가 있었다. 전파상들은 이 세 종류의 라디오를 비싸게 팔았으며, 그 밖의 헬리크라프터 윌콕스 등등은 '잡표'라고 불렀다. 제니스는 원래 좋은 라디오였고 비쌌기 때문에 미군들이 쓰다가 케이스가 완전히 깨진 것도 거래 됐고, 어떤 것은 케이스는 깨져서 간곳없고 기계만 달랑 있는 것도 적잖은 값으로 팔렸다. 제니스는 전기와 건전지 겸용이었다.

 

나는 지금도 이 제니스에 얽힌'신용'을 잊지 않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충무로 입구에' 기쁜 소리사'라는 전파상이 있었는데 여기서 제니스 건전지를 팔았다. 물론 건전지가 생산되지 않을 때라 '기쁜 소리사'는 미군용 전지를 조립해서 붉은 색의 상자로 싸서 제니스 건전지로 팔았다. 신기한 것은 같은 값이지만 다른 전파사의 건전지는 20일 정도 쓰면 소리가 죽었는데 '기쁜 소리사'의 건전지는 40일 이상 썼다.

 

어느 날 제니스 건전지를 아버지가 사들고 들어오시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나에겐 커다란 선물이었다. '기쁜 소리사' 주인이 누군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꽤나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같다. 5.16 후까지 정부의 무슨 행사가 있으면 반드시 연단의 마이크 가운데는 '기쁜 소리사'마이크가 끼어 있었다는 것을 4,50대 이상의 독자들은 기억하시리라.

 

지금도 우리 집에는 제니스가 있다. 나는 이 제니스를 볼 때마다 지금 보면 아무것도 아닌 저 라디오 한대가 한 때는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동시에 저 속에서 나오는 간단한 노래나 연속극에 사람들이 울고 웃던 소박한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그때 '청실홍실', '현해탄은 알고 있다.', '동심초' 같은 라디오 연속극에 눈시울을 적셨고, '뚱뚱이와 홀쭉이가 또 만났구나' 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고단한 삶을 말끔히 잊고 박장대소 하면 즐거워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