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라디오·흑백TV 시절 ‘슈퍼스타’ 원로아나운서 임택근

풍월 사선암 2011. 11. 5. 08:56

“1958년 민항기 납북 긴급방송중 자형 이름 들어있어 기절할 뻔

 

라디오·흑백TV 시절 슈퍼스타원로아나운서 임택근

 

3년 반째 휠체어 신세인 임택근씨가 서울 송파구 장지동 자택에서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하는 방송인생 40년을 회고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 데는 타고난 쩌렁쩌렁한 미성의 목소리 외에 열정과 노력이 보태졌기에 가능했다.

 

요즘 2030대 젊은층에게는 나는 가수다의 스타 임재범의 아버지라는 수식어가 앞에 따라붙지만 중년층 이상 세대에겐 라디오와 흑백TV 시절 최고의 슈퍼스타로 기억되는 인물. 원로아나운서 임택근(79)씨를 만나러 서울 송파구 장지동 자택을 찾아간 것은 지난 1027일이었다.

 

휠체어 신세라, 몰골이 말이 아니다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던 그를 설득해 통원치료를 하는 평일을 피해 휴일에 찾아간 것이다. 무척 수척해져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팔순의 나이를 잘못 알았던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한 10년쯤은 젊어 보였다. 그는 기분은 아직 60대 같다고 했다.

 

거실 정면 중앙에 걸린 예수 그리스도 사진이 눈에 띄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함께 견진성사를 받은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다.

 

36개월 전 경남 진해 군항제(진항제)’에 간 그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0.1초 차로 발을 헛디딘게 화근이 돼 경추 6, 7번이 눌리는 사고로 이어졌다.

 

곁에 있던 부인이 연세대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자기공명영상(MRI) 찍으러 갈 때는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하반신 마비가 돼 수술을 받았다며 연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임씨는 연세대 총동창회 사무총장을 10년 넘게 지내고, 동창회관도 지은 내가 어떻게 연대 병원을 상대로 의료사고 운운하겠느냐. 그냥 운명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술 받고 3년 반 동안 누워 있는데 참 괴롭더라고요. 제가 가톨릭 영세 받은 지 25년 되는데, 그 전에야 1주일에 한 번 정도 미사 가고 반성도 안 하고 살았는데 쓰러지고 나니까 하느님께 매달리게 되더군요.” 그는 거실의 고정식 자전거 등 재활치료기구를 가리키며 치료기구에 성모마리아 사진과 십자가를 붙여놓고 재활운동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올리는 등 늦게 철이 나서 이제사 하느님께 매달린다믿음이 깊었다면 이런 불행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사고 직전 마칭밴드협회 상임고문을 맡아 브라질까지 가서 마칭밴드 세계대회를 제주에 유치해 사회를 맡았고, 쓰러지기 1주일 전까지 골프를 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던 그였기에 초기 사고의 충격은 컸다.

 

방송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란 별칭이 붙는 그에게 아나운서의 길을 걷게 된 계기부터 물었다.

 

“6·25전쟁 때 임시수도 부산에서 피란민수용소와 다름없는 판잣집 임시교사 천막이 있던 대학,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요. 입학 45개월 뒤인 1951년 여름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광고방송을 들었어요. 4년제 대학 졸업자에게만 응시자격이 있다며 원서접수조차 거절당했어요. 고민 끝에 당시 KBS 국장 노창성씨 방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노 국장은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연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여사의 아버지다. 그는 노 국장에게 평생 꿈이 아나운서인데 제 꿈을 이렇게 쉽게 좌절케 하지 말아 달라낭독엔 자신 있으니 한번 제 목소리를 들어봐 달라고 간청했다. 이틀간 아침 출근길마다 노 국장 방문을 가로막고 졸라대는 그의 집념과 끈기에 질린 노 국장이 결국 응시를 허락했다. 6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그는 방송사상 첫 대학 1학년 아나운서가 됐다.

 

미성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인 그는 아나운서가 될 팔자인지, 고교시절부터 특출난 제 목소리는 타고난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은 목소리가 가라앉았지만 옛날에는 제 목소리가 쩌렁쩌렁했어요. 휘문고 시절 유머 작가인 고 조흔파 선생님이 국어 담당이었는데 수업 시작 전에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떠들면 곧잘 제게 독본 낭독을 시켰지요. 아마 그때부터 아나운서로서 자질을 보였던지, 제가 소리내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시끌벅적하던 교실이 삽시간에 교회 기도 시간처럼 조용해지곤 했지요. 학도호국단 시절 3·1절이나 8·15 광복절이면 휘문고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벌이곤 했는데 그때마다 제가 무개차나 스리쿼터에 올라타 마이크를 잡고 연설하며 그 행렬을 선도해 나갔습니다. 고교시절 매혹적인 마이크와 첫 만남으로 그때부터 아나운서의 꿈이 제 가슴속 깊이 싹튼 것 같아요.”

 

그가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594월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여자농구대회 숙적 일본과의 결승전 중계가 그것이다.

 

한국은행 여자 농구단이 7전 전승 끝에 결승에 오른 날 그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지경이 됐다.

 

마이크를 잡고 쓰러지더라도 중계방송은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을 씻으며 어지럼증을 참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언제 아팠느냐는 듯 멘트가 술술 터져 나왔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경기는 극적으로 한 골 앞서 종료됐고 그는 감격적인 승전보를 고국에 전했다. “당시 감정이 안 좋던 숙적 일본과는 사생결단하고 붙던 시절이었죠.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제가 전한 우승소식에 전국 방방곡곡 온 국민이 만세를 부르고 감격했었지요. 시골 동장 이장집 라디오, 종로통에는 스피커를 통해 길거리에서 수백명이 중계방송을 듣던 그런 목가적 시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중계방송을 마치고 나자 비 오듯 흐르던 땀이 자취를 감추고 펄펄 끓던 열도 내렸다. 신기하게도 방송을 하던 중에 감기가 말끔히 나은 것이다. “그때부터 죽어도 마이크를 잡고 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금의환향 후 선수단과 함께 경무대로 초청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다. 이 대통령은 한쪽 구석에 있던 그를 보자 대뜸 임 변사 앞으로 나와! 자네 수고가 참 많았네. 어떻게 그렇게 말을 빨리 하고,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이 생생하게 중계를 하나? 용하구먼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악수를 했더니 대통령의 손은 제 손의 두 배 크기에 팔순이 다 된 나이에도 장작을 직접 쪼갠다는 소문대로 손가락 마디마디에 못이 박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 역사의 거인은 거인이더군요. 그때 만나본 첫인상은 그랬어요.”

 

최근 방송에서 전국노래자랑터줏대감 송해씨에 앞서 본인이 노래자랑의 원조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오빠부대의 원조 맞습니다. 19541956노래자랑스무고개사회를 맡았는데 반향이 엄청났지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뮤직홀에서 공개방송을 했는데 그날만 되면 방송개시 수시간 전부터 동화백화점 앞은 방청하러 온 인파가 백화점 둘레를 몇바퀴 에워쌀 정도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

 

20대 중반에 그는 대중의 스타가 됐다.“ 방송하러 현장에 나가면, 수십명의 팬들이 에워싸고는 악수를 청하고 사인 공세를 펴며 몰려들었지요. 어떤 때는 아줌마들이 혼잡을 틈타 양복이나 와이셔츠 단추를 기념으로 뜯어가는 등 낭패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들이 예쁘게 생겼다며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팬레터 중에는 자기가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청혼해 오는 여인도 있었지요. 뻘건 루즈로 키스 마크를 새겨서 고독을 호소하는 편지도 있었습니다.”

 

임씨는 개인적인 일로 가장 충격을 느낀 사건으로 KNA(대한민국항공) 민간항공기 납북사건을 떠올렸다.

 

1958216일 스튜디오에서 뉴스를 보내고 있던 그에게 속보라면서 다급히 쪽지가 전달된다. 민간 항공기 KNA가 처음으로 납북됐다는 비보였다. 승객 명단을 읽어 내려가던 도중 공군대령 김기완이라는 이름을 보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앞이 아찔하며 캄캄해지면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부산으로 출장 간 그의 자형이었다.

 

임신 중이던 누님 임현자(81)씨는 혼절해 일어날 줄 몰랐다. 민간 여객기가 끌려간 곳이 평양 근처 순안 비행장으로 밝혀지자 분노는 극에 달했다. 연일 시청앞 광장에선 납북자들을 무사히 보내달라는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납치인사 가족 대표로 누님이 궐기 인파 앞에 나와 세계적십자사에 보내는 호소문을 낭독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아픔을 같이 나눴다. 누이가 목이 메어 호소문을 낭독할 때 그의 억장은 무너졌다.

 

자형은 당시 현역 공군 대령으로 대북 심리전 책임자인 공군 정훈감으로 유니폼을 입은 채 납북된 데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험악한 남북관계를 볼 때 도저히 살아올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납북 2주일 만에 송환 절차를 위한 남북적십자 실무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는데 그가 판문점 현지 중계방송을 맡았다. 천신만고 끝에 납북인사들을 태운 승용차와 버스가 등장, 맨앞 승용차에는 유봉순 국회의원, 두번째 차에 그의 자형이 타고 있었다.

 

며칠간 중계방송으로 연일 긴장하고 추위에 떨었던 터라 서울로 오자 심한 몸살을 앓았지요. 꼬박 1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한 채 평생 처음 앓는 지독한 감기몸살과 싸웠고 식은땀을 내며 헛소리를 했습니다. ”

 

오는 10일 주한미대사로 부임하는 성 김(김성용)씨가 예편 후 주일공사를 지낸 고 김기완씨의 아들로 그의 조카다. 그는 조카는 어려서부터 소문난 효자였다자형이 1993년 폐암 판정을 받고 1994년 사망하기까지 1년간 국무부를 휴직하고 간병을 도맡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민초기 제가 미국 여행 가면 국민학교 때 농구도 같이하곤 했어요. 명문대 로스쿨을 나와 검사시보(사법연수생)가 됐는데, 스패닉계의 어두운 사건을 다루기 싫다며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외무부로 들어갔지요. 사법고시와 외무고시에 모두 합격한 셈이지요. 주한미대사관에서도 군사정치담당 1등 서기관을 3년 정도 지냈지요.”

 

그는 이민 가면 몇년 안 돼 한국말 잊어버리고, 버터 냄새 풍기는 이상한 발음하는 게 대부분인데, 누님은 자녀들이 한국말 교육을 계속하도록 해 지금도 5남매가 연하장을 한국말로 제게 써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조카가 한·미수교 130년 만에 한국계 미국대사라는 영광스러운 첫 기록을 세웠다자랑스러운 조카라고 했다. “바라건대 조카가 한국 국민과 미국 국민에게 모두 사랑받는 주한미대사로서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좋은 성과를 내게 해주십사고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 = 정충신 문화부장 csjung@munhwa.com

 


 

임택근 원로아나 아들 임재범·손지창 자랑스러워

 

자신을 임 변사라 부르며 격의없이 대해주던 이승만(왼쪽)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임택근(오른쪽) 아나운서.

 

해외스포츠 중계때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의 주인공

 

믿기 힘든 얘기지만 임택근씨는 두 돌이 지나도록 엄마라는 말조차 모를 정도로 늦게까지 말문을 열지 못했다.

 

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입이 열리도록 냉수를 떠놓고 빈 덕분인지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다듬잇돌 위에 올라서서 말문을 열고 중얼중얼 연설하는 흉내를 내 부모를 기쁘게 했다.

 

혹시 말 못하는 벙어리가 아닌가 걱정을 끼쳤던 아이가 20대 중반에 입에 따발총이라도 단듯 빠르고 정확하게 말하는 최고의 아나운서가 됐으니 부모님의 기쁨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1951년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활동하다가 1964MBC로 자리를 옮겨 자신의 이름을 딴 MBC ‘임택근의 모닝쇼를 진행했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TV 프로그램의 효시였다.

 

팬들에게는 임택근하면 라디오 축구중계 등 해외 중계 때 단골메뉴인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멘트로 기억된다.

 

그는 우리 아나운서가 외국에 나가 처음 중계방송을 한 건 1948730일 런던올림픽 때 민재호 아나운서였으며, 두번째는 1952년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 때 서명석 아나운서였다세번째로 제가 그 멘트를 쓰게 됐는데, 1년에 두세 번씩 해외 스포츠 중계를 자주 하며 그 말을 제일 많이 한 덕분에 그 멘트가 제 전용으로 굳어지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첫 부인이 임신이 불가능해 어머니의 권유로 이혼을 하게 된 아픈 과거를 갖고 있는 그는 혼외 관계를 통해 두 아들을 얻었다. 큰 아들이 그룹 시나위의 리드싱어인 임재범이고 둘째아들이 탤런트 손지창이다.

 

그는 두 아들이 다 자기 분야에서 이름을 얻은 것이 자랑스럽다.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두 자부를 둔 것이나 귀여운 손자 손녀를 3명이나 얻은 것을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두 아들이 어릴 적부터 안고 살았을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느낀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는 회한에 사로잡힐 때면 아내와 두 아들 내외를 위해 손을 모은다.

 

정충신 문화부장 csju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