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가을이 가르치는 노래

풍월 사선암 2011. 10. 6. 12:22

 

<문화프리즘-한수산>가을이 가르치는 노래

 

한수산/작가, 세종대 인문과학대 교수·국문학

 

어느 젊은 사제의 이야기입니다. 독실한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의 기대 속에 신학교로 진학하여, 마침내 서품을 받고 시골 조그마한 본당의 신부로 발령을 받습니다. 첫 부임지로 떠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작은 보퉁이 하나를 건네며 말했습니다.

 

"신부님. 이 어미의 선물입니다. 그곳에 가시거든 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낯선 부임지에 도착한 신부는 첫날을 설레며 보냈습니다. 앞으로 닥칠 신자들과의 나날을 생각하며 성당을 둘러보는 마음은 무거운 책임감으로 벅차올랐고, 자신의 사목 방향에 대한 결의를 성찰하는 시간들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저녁 늦은 시간, 혼자 남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신부는 어머니가 준 선물을 떠올렸습니다. 무슨 선물일까 궁금해 하며 작은 보따리를 풀고 났을 때 신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아기의 배내옷 하나가 하얗게 들어 있었습니다. 배내옷과 함께 넣어준 어머니의 짧은 편지를 신부는 저려 오는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신부님. 이것은 신부님이 태어나서 처음 입었던 배내옷입니다. 신부님도 이렇게 작은 아기였습니다. 이제 큰 소임을 맡고 많고 신자들의 목자로 살아야 할 신부님이십니다만, 신부님도 이렇게 작고 약했습니다. 신부님 자신도 이렇게 작았다는 걸 늘 잊지 마시라는 어미의 마음을 담아 이 배내옷을 신부님께 드립니다.'

 

첫 사목지로 떠나는 영광스러운 아들 신부에게 준, 가없이 넓고 깊은 어머니의 가르침은 작은 배내옷 하나였습니다. 아들아. 너도 이렇게 작았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거라 하는.

 

이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준 수녀님은 지난 가을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해 전, 수녀님의 어머니는 병석에서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져듭니다.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간 딸을 어머니는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 옆을 지키며 일주일을 보낸 딸은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날 노래 테이프 하나를 마련합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노래가 어머니에게서 배운,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들이었습니다. 처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성당을 오가며 배웠던 노래들로 시작해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수녀는 녹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주도 없이 부르는, 때로는 흐느낌 속에 목이 메는, 눈물·콧물이 뒤엉킨 노래가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다음 날 여전히 의식이 없는 어머니 머리맡에 그 노래 테이프와 녹음기를 놓고 떠나면서 수녀는 부탁했습니다.

 

"어머니가 듣지 못하시겠지만 소리를 작게 해서라도 계속 틀어놓아 주세요.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제 마음입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일주일 후였습니다. 어머니를 간병하고 있던 가족들로부터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는 상태였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데도, 어머니가 입술을 움직이며 딸의 목소리를 따라 노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또 일주일눈을 뜬 어머니가 의식을 되찾으며, 딸의 목소리를 따라 소리 내어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의식을 회복한 어머니는 1년을 더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1년 동안 가족들은 돌아가셨던 어머니가 살아온 듯 못다 한 사랑을 나눴고, 지난날 서로에게 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들을 가졌다고 합니다.

 

어제의 찌는듯하게 따가웠던 햇살이 시들며 가을이 성큼 다가와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저녁을 수놓는 오늘, 살아간다는 일의 외경을 생각합니다.

 

봄날의 소생과 여름의 성숙은 없지만 가을의 쇠락에도 아름다움은 넘칩니다. 그리고 쇠락을 앞둔 가을은 성숙한 삶이 갖추어야 할 완결의 미덕을 일깨우고, 풍요가 잊지 말아야 할 겸손을 가르칩니다. 어느새 이마를 스치는 찬바람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외경과 금도를 전하는 가을이 와 있습니다.

 

문화일보 | 입력 2011.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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