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고향사선암

철목마을 효자 "이만경" / 빙어약소와 설치자투소

풍월 사선암 2011. 8. 21. 00:05

 

빙어약소(氷魚躍所)와 설치자투소(雪雉自投所)

 

지금의 설천면 소천리와 두길리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 옆 냇가에는 빙어약소(氷魚躍所)라고 쓰여진 바위가 있다. 또 그곳에서 구천동을 향해 십리 가량 올라가면 두길리 구산마을 행길가에도 설치자투소(雪雉自投所)라는 글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두 곳에는 이만경(李晩景)이라는 사람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영조때의 일이다. 무풍면 철목리에 이만경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성품이 바르고 학문이 뛰어나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고 또한 힘도 세어 장수를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효성이 지극한 효자였다.

 

이만경의 성품이 워낙 청렴하고 곧아 사사로운 물욕이 없어 집안은 늘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보다 못한 제자들이 스승 몰래 쌀이라도 들여놓는 날에는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훨씬 많거늘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자네들이 꼭히 베풀고 싶거든 재너머 박초시댁에 가져다 드리게 벌써 그 어른께서 병석에 계신지 오래이니 그 댁 살림이 어려울걸세.... 자신보다는 이웃에, 이웃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며 사는 큰 그릇의 인물이었다.

 

어느 엄동설한이었다. 만경의 늙으신 아버지가 갑자기 병이 들어 자리에 누우셨다. 효성이 지극한 만경은 정성을 다해 아버지의 병간을 하였다. 며칠을 몹시 앓던 아버지는 느닷없이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의 말씀에 만경은 당장 꿩을 구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자신의 형편으로는 장에 나가 꿩을 사올 처지가 못 되는 만경은 꿩을 잡으러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만경의 힘이 어느 장사 못지않았지만 허리까지 빠지는 눈밭에서 살아서 날아다니는 꿩을 잡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독약이나 활을 쏘아 산 짐승을 해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경은 평소에 살생을 무척이나 꺼려하는 성미였기에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꿩을 찾아 며칠을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지금의 두길리 구산마을에 들어섰을 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푸드득 하는 소리가 나더니 만경의 발밑에 꿩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만경은 놀랐지만 하늘이 내려준 은혜로 감사히 받아 와서 아버지에게 정성껏 봉양했다. 만경은 이러한 행운은 부모님께 더욱 정성을 다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더욱 효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 만경을 불러 놓고, 얘야, 잉어가 먹고 싶구나. 싱싱한 잉어를 푹 고아 먹고 나면 내 병이 씻은 듯 나올 것 같다만....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모른채 할 만경이 아니기에 또 다시 밖으로 달려 나왔지만 때는 천지가 얼어붙는 엄동설한인지라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찌나 추운 날씨인지 사방 천지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고요하기만 했다. 만경은 잉어를 잡으러 설천까지 내려가 냇가에서 며칠 동안을 뜬 눈으로 밤을 지세웠다. 그러다가 눈보라 치던 어느 추운 날 라제통문 원당천 냇가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었다. 만경이 쓰러진 곳에 따사로운 온기가 스며들면서 김이 오르더니 냇가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미하게 정신이 든 만경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두꺼운 얼음이 녹아 갈라진 틈새로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오르더니 펄떡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지극한 효심에 하늘도 무심치 않았던 것이다. 만경은 잉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만경은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몇 번이고 하늘에 감사를 드렸다. 이 같은 일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사람들은 만경을 하늘이 내린 효자라며 칭찬이 자자했다.

 

 

훗날, 그의 제자들이 그의 효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꿩이 스스로 떨어져 죽었다는 두길리 구산마을 길가의 바위에다 설치자투소(雪雉自投所)라는 글을 새기었고 얼음을 깨고 잉어가 튀어 나왔다는 라제통문 개울가의 바위에는 빙어약소(氷魚躍所)라는 글을 새기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이만경은 효성이 지극했을 뿐 아니라 구국충절이 깊어 나라에도 큰 몫을 하였다. 영조 4(1728), 영조 즉위 후에 세도에서 밀려 난 소론(小論)의 정희량, 이인좌 등이 실권에 불만을 품고 밀풍군 탄()을 추대하여 모반의 난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이들 반란군들이 전라도를 거쳐 한양으로 진군하려 할 때, 만경은 형인 이만번(李晩蕃)과 함께 관군과 합세하여 이들의 진군을 저지하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도 이만경, 이만번 형제에 대한 충효의 행적이 무풍면 철목리 정문걸에 소상히 남아 있다.

 

 

이만경(李晚景)에 대하여

 

1691(숙종 17)1776(영조 52). 조선 후기 효자·의병. 호는 두촌(斗村)이다. 본관은 흥양(興陽)이고,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무풍면(茂豊面) 철목리(哲木里) 출신이다. 아버지가 중풍이 걸렸을 때, 수년간 불평 없이 시중을 들었다. 한겨울에 꿩과 잉어를 잡아다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신병으로 걸을 수 없자 가마를 타고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를 다닐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1728(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형을 도와 반란군을 막는 데 공을 세웠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 1888(고종 25)에 정려를 받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예조판서 겸 중추부지사(禮曹判書兼中樞府知事)에 증직되었다. 그의 저서 두촌선생실기(斗村先生實記)가 현재 경기대학교 도서관과 원광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첨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