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월남학생은 울었다

풍월 사선암 2011. 1. 15. 10:59

전 토론토 강신봉 한인 회장의 수필중에서

 

<월남학생은 울었다>

 

캐나다 이민 초창기 1975년의 일이다. 월남이 패망하게 되자 공산권의 세계를 탈출하려는 아비규환 보트피플이 대거 탈출을 시도하다가 월남 앞 바다에서 배가 침몰하여 전멸하는 비극이 계속되던 때였다. 그 때에 나는 캐나다 토론토 근교에서 채소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배추와 무를 심어서 우리 한국 사람의 식품점에는 물론 중국 일본 월남인들의 가게에도 공급하고 있었다.

 

기다란 왜무 주문이 갑자기 쇄도하고 있었다. 주말이라서 별안간 일 할 사람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나 혼자서 그 왜무를 뽑고 있는데 농장으로 작은 차 두 대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독일제 복스와겐에서 남녀 젊은이들이 꾸역꾸역 나오더니 아홉 명이 나에게로 닥아 오는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녜, 어서 오십시요. 헌데 젊은이들은 누구십니까?”

“저희들은 월남에서 유학을 온 토론토대학의 학생입니다. 선생님의 농장에서 공급해 주시는 무를 사 먹는 사람들인데 오늘은 이렇게 농장으로 찾아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학생들에게 무엇을 도와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실은 저희들이 이 농장에 일거리가 있을 가 해서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십니까?. 일거리야 많지요. 학생들이시니 주말에나 일을 할 수가 있겠군요.”

“녜, 그렇습니다.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때까지 일거리가 있다면 고맙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도 일을 하시겠습니까?”

“녜,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작업복을 입고 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그 때에 일꾼이 없어서 고민하던 판에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찾아 왔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일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학생들에게 즉석에서 무밭에 들어 오라하여 한 골씩을 배정하여 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뽑아서 상자에 넣어 상품화 하는 요령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여름철 한 낮에 뜨거운 땡볓 아래에서 농장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지루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본국이 패망하여 학자금 조달이 어려워 진 이 학생들이기에 용기를 내어 무엇이건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처지였든 것이다.

 

그 당시에 캐나다 정부는 유학생들에게는 노동허가서를 내 주지 않아 이들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비록 불법이지만 적당히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이러한 한적한 농장이 아니면 일거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농장을 물어물어 찾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힘 드는 농장 일을 해 보지도 않은 이들에게 그 지루한 시간을 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나름대로 별 다른 의미 없이 그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루한 시간을 때워 나가며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에 공군으로 복무를 하였는데 두어 차례 사이공에 있는 탄손누트 공항을 잠간씩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나는 늘 월남의 전쟁에 관심이 많았죠. 생각해 보면 여러분의 나라 월남이나 우리나라 따이한은 역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아주 비슷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남과 북이 갈리었고, 북쪽은 공산주의, 남쪽은 자유민주주의 나라가 생겼는데 강대국 미국이나 중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하여야 하는 큰 비극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지요. 실로 월남이나 한국의 국민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지요. 강대국들의 세계 이념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여 그저 피를 흘리고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학생들께서도 요즈음은 많이 어려우시지요?”

 

 

“우리나라는 참으로 어렵게 되였습니다. 너무도 많은 피란민들이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저희 부모님들의 연락도 잘 않되고 있어요. 저희들은 본국으로 부터 학자금 조달이 끊어져서 학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사장님께서 저희들에게 이렇게 얼마라도 돈벌이를 할 수 있게 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나는 여러분들의 입장을 백번 이해하고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만 뭐 이렇게 힘이 드는 농장일이니, 저 여학생 분들에게는 쉽지가 않겠지요. 아, 참! 며칠 전에 내가 토론토스타지의 뉴스에서 읽었는데 토론토의 월남총영사님께서 청소부 일을 하시는 기사였습니다. 자신의 나라가 패망해서 없어지니 그 분의 그 아픔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삶의 용기를 잃지 아니하고 가족들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가장으로서의 사명감에서 청소부 일을 맡아 성실하게 일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에 나의 가슴이 미여지는 듯이 아팠습니다. 나는, 그렇게 자기 자신의 현실과 위치를 인식하고 성실하게 처세하시는 그 분을 존경합니다. 남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과 같이 느껴 지드군요. 우리나라도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는 처지이기에 한없는 동지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러셨습니까? 사장님, 참 감사합니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슬픔을 그렇게 함께하여 주시니 사장님은 저의 부모님 같이 인자하게 느껴집니다.”

 

바로 이때에 저 쪽에서 무를 뽑으며 나와 그 학생간의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한 여학생이 갑자기 땅 바닥에 털석 주저 안더니 소리 소리를 지르며 큰 소리를 내어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없어진 우리 조국을 이야기 하지 말아요. 매일 매일 아무도 모르게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우리 동포의 이 비극을 누가 알아요. 그 청소부 그 총영사가 우리 아버지예요. 찢어지는 우리의 이 아픈 가슴을 누가 알아요? 엉엉 어엉 …. 엉엉 어엉 …. !”

 

그 총영사의 딸이라는 학생이 일손을 놓고 땅을 치며 통곡을 하니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아홉명의 학생들이 모두 땅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농장의 들판이 울음바다가 되였다. 마치 비극의 영화 한 장면같이 별안간 일어 난 일이기에 나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저 나도 그들을 따라 한 참 동안 같이 울고 있었다. 흙이 묻은 더러운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으니 지저분해 진 얼굴도 가관이었다. 나는 나의 차에 가서 휴지를 가지고 와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 참을 울고 난 그들은 부숭부숭 해진 얼굴을 서로 쳐다보면서 한 숨만 짓고 있었다. 얼마 후에 한 학생이 나에게 이야기 하였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조국이라는 것은요. 이렇게 없어지면 눈물과 한 숨만 남는 것인가 봅니다. 따이한의 젊은이들에게 이야기 하세요. 조국을 잘 지키라고요. 우리 월남 같이 되지 말고 미리미리 잘 지키라고요. 공산주의 하고는 약속이 필요 없어요. 그들은 약속을 지킨 적이 없습니다. 저희들은 조국을 잘 지키지 못하여 이렇게 국제 고아가 되였습니다.”

 

이후 이 학생들은 종종 우리 농장에 와서 일을 하였다. 나는 일거리가 별로 없어도 이 학생들을 거절하지 아니 하고 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몇년 후에 이 학생들은 계리사가 되고 의사가 되어 토론토에서 월남인 사회를 이끄는 명사들이 되였다. 후에 내가 토론토지구 한인회장이 되고, 처음으로 토론토한인회관을 마련하였을 때에도 이들은 몰려 와서 나를 축하해 주었다. 그들은 지금도 새 해의 아침이 되면 나에게 전화를 걸어 ‘happy New Year!’ 인사를 하곤 한다.

 

월남학생들의 통곡은 나에게 조국이 무엇인가를 가슴 깊이 일깨워 주었다.

 

강신봉 Kang Sinbong 姜信鳳 / 150 Harvest Hills Blvd. East Gwillimbury ontario Canada L9N 0C1

Tel. 905-235-1443 (home), 905-716-7128 (cell) / E-mail : samkang39@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