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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비용(統一費用) 논란을 끝낸다!

풍월 사선암 2011. 1. 7. 12:31

통일비용(統一費用) 논란을 끝낸다!

독일은 高비용 통일로 갈수밖에 없었다.

김성욱 (사)한국자유연합 대표

 

● 북한정권 해체 과정이 동독정권 해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동독정권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20세기 최대의 이벤트로 와해돼 버렸다. 민중(民衆)의 힘으로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동서독 사이에 ‘이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을 뜻했고 독일정부도 이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동독은 하루아침에 서독의 시스템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셈이다. 원했건, 원치 않았건 독일정부는 서독의 사유재산제·화폐제도·복지제도 등을 동독에 적용치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통일비용을 높였다. 독일은 본질적으로 ‘고(高)비용 통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편집자 註>

 

독일(獨逸)통일 과정에서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갔으므로 남북(南北) 통일이 재앙이 될 것이란 주장은 과학이 아니다.

 

獨逸통일 당시 통일비용이 컸던 첫째 이유는 동독 정권 붕괴 후 ‘급속한’ 서독 편입에 있었다. 독일정부는 동서독 간 ‘이동의 자유’를 허용한 뒤 동독 주민이 대거 서독 지역에 몰려올 것으로 염려했다. 동독 주민을 고향에 머물게 하려면 이들의 생활을 단기간(短期間)에 끌어올려야했고 이는 ‘화폐통합’ 등 무리한 정책으로 이어졌다.

 

남북통일 과정에서 남북 간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일종의 관리체제·과도체제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관리체제·과도체제는 북한정권을 붕괴시킨 뒤 대한민국이 북한지역을 관리하는 시기로서 짧게는 3년, 길게는 3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북한해방 후 자유통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같은 개념이다.

 

<화폐통합, 가격경쟁력 상실한 東獨 상품...무더기 도산>

 

처음엔 서독에서도 단계적 화폐통합(貨幣統合) 주장이 우세했다. 그러나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인의 서독으로의 이주(移駐) 러시(rush)가 시작됐고, 1990년 4~5월간 ‘동서독 경제·사회·통화통합조약’이 체결됐다. 이는 동서독 화폐가 임금·예금은 1:1, 기타 채권·채무는 2:1의 비율로 교환된 것이다.

 

동독에 서독 마르크가 전격 도입되면서 이주물결은 급감(急減)했지만 동독 경제는 완충장치 없이 곧장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됐다.

 

특히 동서독 화폐의 실질가치가 4.3:1이었음에도 1:1 비율로 통합되면서 동독産 수출품 가격은 졸지에 330%까지 상승했다. 수출이 GDP의 40%를 차지하던 동독 경제는 치명상을 입었다. 동독 마르크의 과도한 평가절상(平價切上)으로 동독에서 만들어진 상품은 가격경쟁력을 상실해 버렸다. 결국 생산성 낮은 동독 기업이 무더기 도산을 하기에 이른다.

 

<급속한 사유화로 동독 기업파산>

 

사유화(私有化)로 인한 후유증도 많았다. 이것 역시 동독이 서독의 법체계에 ‘즉각(卽刻)’ 흡수되면서 발생한 문제다.

 

신탁청(Treuhandanstalt)이라는 기관은 독자적 회생이 불가한 동독 기업을 신속히 매각해 사유화하는 작업에 나섰다. 1990년 ~ 1994년 사이 1만5,102개의 기업, 2만5,030개의 상점·식당·호텔, 4만6,552건의 부동산 등을 처리했다.

 

그러나 중간 단계 없는 신탁청의 사유화 역시 동독 기업의 무더기 도산을 불렀다. 예컨대 동독 최대 제철공장(EHO社)는 사유화 후 1만2,000명 고용인원 중 9,300명이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로 인해 신탁청은 ‘일자리 박멸청(jobkiller)’이라는 오명을 갖게 됐다.

 

심각한 것은 사유화 이후 발생한 2,044억 마르크에 달하는 방대한 채무(債務)였다. 기업정비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었고 이것은 정부보증공채(公債)로 충당되다 결국 세금으로 메워졌다.

 

동독 지역은 막대한 ‘통일비용’에 힘입어 급속히 사유화됐지만 대부분의 국영기업이 파산해 버렸다. 동구권(東歐圈) 기업이 체제전환 이후에도 살아남은 것과 대비됐다.

 

<높은 실업률, 결국 정부 부담으로>

 

동독 지역 실업률도 높아졌다. 독일 정부는 동독 지역 대량실업을 막기 위해 단축조업·조기퇴직제도·전직훈련제도·일정기간 피고용자 임금의 75%선까지 보조금을 지급하는 고용창출조치(ABM) 등 적극적 고용정책을 폈지만 한계가 있었다.

 

동독 투자청은 통일 이후 2001년까지 100여개의 국제기업을 유치하고 1만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했지만, 2002년 이후 투자자들은 동독을 제치고 체코·헝가리·폴란드·슬로바키아로 가 버렸다. “동유럽 개혁국가들은 동독 땅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훨씬 더 낮은 임금”이라는 것이 투자자들의 푸념이었다.

 

이밖에도 산업기반시설 취약·소유권 분쟁 미(未)해결·복잡한 행정절차 등으로 서방기업의 동독 지역 진출을 기피하면서 ‘고용유지 비용’과 ‘실업급여’ 등이 고스란히 정부부담으로 돌아왔다. 현재 동독 지역 실업률은 11.5%, 서독지역은 6.6% 수준이다.

 

<서독 노조 힘입어 동일노동·동일임금 주장>

 

동독 지역 기업들의 경쟁력이 커지지 못한 데는 좌파(左派)이데올로기 탓도 있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 노동자의 생산성은 서독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지만 서독 노조(勞組)의 지원을 입고 5년 내 서독 노동자와 동일(同一)노동·동일(同一)임금 달성을 요구했다. 이 같은 투쟁은 동독기업이 경쟁력을 잃는 결정적 계기가 돼 버렸다.

 

소유권 분쟁도 혼란을 가중시켰다. 서독에 거주하는 동독 지역 토지의 원(原)소유주 110만 명이 무려 237만 건에 달하는 재산권 심사청구서를 제출하고 소유권 반환을 요구한 것이다. 동독주민들의 주택·토지를 상대로 한 소유권 분쟁이 격화되면서 동독 서민정당 ‘동맹90’ 지구당 위원장 장 달크가 목 매 자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실업 등 사회문제는 복지(福祉)로 해결 시도>

 

독일 통일 과정에서 급속(急速)한 화폐통합·사유화와 이로 인한 실업 등은 복지(福祉)제도로 해결됐다. 세계 최고 수준인 서독의 사회복지 시스템이 동독 지역에 똑같이 적용된 것이다. 동독 주민은 실업률은 높았지만 보험료는 내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사회복지의 전(全)독일 적용은 재정적자를 부르고 이것은 다시 통일비용을 늘렸다.

 

이른바 통일비용은 통독 이후 1조5,000억 유로가 들었고 이는 매년 800~900억 유로, 독일 GDP의 약 3~4%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그러나 통일비용의 80%는 동독주민에 대한 연금(年金)·실업수당(失業手當)과 같은 사회복지비용이었다.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서독의 복지제도를 동독에 적용한 결과가 통일비용의 정체인 셈이다.

 

<연대(連帶)협정(Solidarpakt) 통한 재원조달>

 

통일비용은 어떻게 충당했을까? 독일정부는 최초 부가가치세·사회보험료 인상으로 해결하다가 1991년 ‘통일세’라는 특별세를 도입했다. 1년 한시(限時) 제도로 등장해 1991년 7월~1992년 6월 사이 소득세·법인세의 7.5%가 부과됐지만 1995년 부활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8년 이후에는 소득세·법인세의 5.5%가 부과되고 있다.

 

또 다른 재원조달은 이른바 ‘연대(連帶)협정(Solidarpakt)’이다. 1994년 이후 연방·서독지역 11개 주정부는 국공채 발행, 예산절감 등을 통해 동독 5개주를 지원하는 연대협정을 맺게 됐다. 그러나 국공채 발행은 조세와 사회보험료 인상을 부르고 이것은 다시 물가상승과 임금인상 요인이 되면서 임금투쟁과 실업자 증가를 만드는 악순환을 가져오고 만다.

 

<고비용 독일 통일과 저비용 한국 통일>

 

이른바 통일비용은 동독정권 붕괴 이후 일종의 과도체제·관리체제 없이 동독을 서독에 급속(急速)히 편입한 것이 첫 번째 원인이고 서독의 사회보장제도를 동독에 일괄적용한 것이 또 다른 원인이었다. 한반도 통일은 독일의 선례와 같은 점만큼이나 다른 점도 많다.

 

우선 북한정권 해체 과정이 동독정권 해체와 같지 않을 것이다. 동독정권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20세기 최대의 이벤트로 와해돼 버렸다. 민중(民衆)의 힘으로 무너진 베를린 장벽은 동서독 사이에 ‘이동의 자유’가 허용된 것을 뜻했고 독일정부도 이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동독은 하루아침에 서독의 시스템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셈이다. 원했건, 원치 않았건 독일정부는 서독의 사유재산제·화폐제도·복지제도 등을 동독에 적용치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통일비용을 높였다. 독일은 본질적으로 ‘고(高)비용 통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면 북한정권의 와해는 휴전선 붕괴와 같은 구조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김정일 사후 급변사태(急變事態) 시 대한민국의 개입이나 김정일 정권이 보다 탄력성 있는 정권으로 교체된 후 이 정권이 대한민국에 편입되는 형태로 이뤄질 것이다. 즉 민중(民衆)의 힘으로 정권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 자체 붕괴 후 한국 개입’ 또는 ‘북한 정권 차원의 한국 편입’ 등 한국 정부(政府)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과 같이 북한 민중의 여론에 떠밀려 한국의 복지제도를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적용하지 않는 ‘숨고르기’가 가능한 것이다.

 

<북한정권 붕괴 이후 관리체제·과도체제 도입해야>

 

대한민국이 할 첫째 사업은 북한정권을 빠른 시간 내에 붕괴(崩壞)시키는 것이다. ‘급변사태로 인한 북한 정권 자체 붕괴 후 한국 개입’이건 ‘북한 정권 차원의 한국 편입’이건 일단 북한정권을 붕괴시킨 뒤 한국 정부가 일정 기간 남북 간 ‘이동의 자유’가 제한된 관리(管理)체제·과도(過渡)체제를 도입해야 한다.

 

관리체제·과도체제는 대한민국이 북한지역을 관리하며 재건하는 시기로서 짧게는 3년, 길게는 3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즉 북한해방은 급하게, 자유통일은 차분히 하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의 폭압체제를 하루속히 무너뜨려 자유(自由)·인권(人權)·소유(所有)가 보장된 보편적 질서를 북한에 만드는 것이다. 북한에 보편적 질서가 만들어지면 자유통일은 시간의 문제, 선택의 문제가 된다.

 

북한정권이 붕괴된 후 대한민국이 북한지역을 관리하며 재건하는 시스템은 소위 중국식 개혁·개방이 아니다. 중국식 개혁·개방은 북한정권 존속(存續)이 전제되지만 관리체제·과도체제는 북한정권 붕괴(崩壞)가 전제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관리체제·과도체제 내 남한의 사회보장제도를 북한에 일괄 적용할 필요도 없다. 당분간 북한은 대한민국의 관리 아래서 북한 나름의 자생적 활로를 찾게 된다.

 

<통일이 분단보다 나은 이유>

 

통일비용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역사는 독일의 통일이 분단보다 나았음을 웅변한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2010년 3월 이코노미스트는 “유럽의 엔진”이라는 제목 아래 이런 기사를 실었다.

 

“한때 독일은 유럽의 병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지금은 독일의 기적이라 불린다.” 적자에 허덕이는 남유럽 국가와 달리 재정적자 규모 3.3%. 독일이 유럽을 지키는 큰 손이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실제 EU의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1100억 유로) 당시 가장 많은 28%를 부담한 국가가 독일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은 지금 ‘엘베강의 기적’으로 바뀌고 있다.

 

독일은 평화와 인권의 주도국가로도 발돋음했다. UN 정규예산·각종 평화유지 활동사업에 대한 자발적 재정지원은 미국·일본 이은 3위(8.7%)이다.

 

통일의 가장 큰 정당성은 동독시민의 자유에 있었다. 공산당 1당독재에서 해방된 동독시민들은 현재 자유·인권, 정치·사상·종교·철학의 자유를 만끽함은 물론 경제·사회·문화·교육·예술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을 만끽하고 있다.

 

독일의 통일을 끌어 낸 콜 총리는 비망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1990년 약 1,150억 마르크의 통일비용을 쓰면 1994년까지 통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1996년까지 7,200억 마르크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비용이 발생되는 것을 사전에 알았더라도 그 당시에 통일은 추진되었을 것이다. 통일지연에 따른 비용이 더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독일보다 훨씬 더 많은 분단비용을 치르고 있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사망한 군인과 시민은 측량할 수 없는 비용이다. 우리가 통일비용 운운하며 통일을 회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미국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Goldman Sachs)는 2008년 9월 ‘통일한국(a United Korea) 대북 리스크에 대한 재평가’라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예측했다.

 

“한국이 통일되면 30~40년 내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프랑스·독일 나아가 일본을 추월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비용에 따른 분단과 몰락이 아닌 비용이라는 미신을 극복한 통일과 성취의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