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월의 쉼터/MBC사우회

묵객..만화로 만난 언론계 사람들

풍월 사선암 2010. 10. 29. 10:06

묵객..

[만화로 만난 언론계 사람들] 서른번째- MBC 영상미술국 미술부 정은숙 부장

 

감천... 굽어 흐르는 맑고 푸른 물줄기를 뜻하는 말이다.

바로 정은숙 부장의 아호다. 그녀의 붓이 지나간 자리가 마치 우리네 시골 시냇물과 흡사하다는 느낌도 그런 연유에서일까?

 

MBC 사내 서예동호회 '문묵회(文墨會)'에서 24년간 절차탁마를 하고 있는 정은숙 부장. 1982년 입사한 그녀. 당시 미술국 초대국장의 권유 반 지시 반으로 시작한 게 '묵객'으로서의 시작이다. 미술을 전공했고, 자막디자인을 담당했던 당시, 붓글씨는 취미였고, 업무의 연장선이었다고. 서체의 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그녀. 시간이 지날수록 끝이 없는 '글씨'의 세계에 점점 빠져들었다.

 

"매우 단순한 취미죠. 이렇게 단순한 작업도 없지만, 그 매력에 빠진 거죠. 아무 말과 어떠한 행동의 군더더기도 없는 절제된 순간, 그 집중력은 놀랍습니다. 스트레스는 말끔히 사라지죠."

 

'경묵서회(耕墨書會)'라는 모임이 있다. 24년간 문묵회를 지도하고 있는 함산 정제도(咸山 鄭濟道)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의 모임이다. 매년 열리는 '경묵서회' 전시회를 통해 갈고 닦은 묵객들의 내공을 볼 수 있다. 그녀 역시, 수많은 묵객 중 만만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로 정평이 나 있다. 물론 수상의 횟수로만 작가의 경지를 논할 순 없을 테지만, 그녀의 수상 경력은 화려하다. 전국 규모인 대한민국 서예전람회와 충북서예대전에 매년 출품하여 쟁쟁한 내공을 뽐내고 있다.

 

"잘 쓴 글씨와 못 쓴 글씨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는지요?"

"정해진 기준은 없어요. 서예 역시 예술이기 때문이죠. 굳이 '평가의 기준'을 말하자면 서예를 많이 접했던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거죠. 붓으로 훈련된 흔적이랄까?"

 

수상과 동시에 점수가 부여된다. 그 점수가 쌓이면 작가 또는 심사위원의 자격이 인정된다고 한다. 지금까지 몇 점 정도 되는지 묻자 점수엔 무관심하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저 먹을 갈고, 붓을 잡는 것만으로 만족하다고.

 

글씨의 소재엔 제약을 두지 않는다고. 붓이 가고 마음이 가는 옛시조의 문구를 인용하는 편이지만, '푸른 물줄기'란 의미를 담고 있는 아호 때문인지, 자연을 노래한 한시에 관심이 많단다. 예서, 전서, 행서, 초서, 해서의 오체(五體) 중 행·초서에 조예가 깊은 그녀. 24년이란 오랜 수련기간에도 스승의 글씨에 대한 예의는 깍듯하다. "오체에 모두 능하신 분이세요. 선생님의 글씨엔 기가 느껴지거든요. 많은 영향을 주신 분이죠. 글씨 뿐 아니라 글씨는 대하는 자세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문묵회 모임이 있다고. 취재 당일이 월요일이었기에 문묵회의 묵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잠시 준비물을 챙긴다는 그녀, '절차탁마'의 흔적이 담긴 화선지 수십장이 커다란 종이가방에 가득하다.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출품을 위해 쓴 글씨다.

 

한번 출품을 위해선 반년이상의 기간동안 수백 장의 화선지가 쌓일 정도라니 대단하다. 매주 월요일이 '선생님께 숙제검사 받는 날'이란다. 모임장소인 경영센터 16층으로 가는 길, 그녀의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16층 소회의실에 들어섰다. 젊은 회원부터 중년의 회원까지 스승 앞에선 다 똑같은 제자였다. 스승의 글씨시범에 다들 모여든다. 스승의 붓끝을 주시하는 제자들의 눈빛이 진지하기만 하다. 적막 그 자체, 숨소리마저 붓끝에 방해가 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소회의실은 묵향으로 가득 찼다.

 

그녀가 종이가방에서 습작한 화선지를 바닥에 깐다.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힌다. '면앙정가'로 유명한 조선시대 송순(宋純, 1493-1583)의 시다. 가로 60cm, 세로 2m는 족히 넘는 긴 화선지에 24년 묵객의 내공이 그대로 드러났다.

 

함산 선생이 지긋한 눈빛으로 화선지를 내려보더니 "무슨 먹을 쓴거야?" 한다. 그러니 그녀가 움찔한다.

"그렇게 긴장되세요?"

"그럼요. 말도 마세요"

화선지를 만지작거리던 함산 선생이 화선지 끝 모서리를 살짝 찢는다. 무릎 위에 찢은 화선지를 살짝 터니 하얀 가루가 묻는다. "잘 보라구. 이게 돌가루야! 돌가루가 많이 나오는 종이는 안 좋아. 그래서 먹이 상한 것처럼 보이는 거라구."

 

매주 월요일 저녁, 정 부장은 이렇게 붓을 통해 심신을 닦는 수련을 하고 있다. 수백 장을 써 내려가도 글씨의 완성에 다다르기가 어렵기만 하다고.

 

'묵객' 정은숙. 그녀만큼은 그 완성에 도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7월에 발표될 대한민국 서예전람회 수상자 명단이 기다려진다. <미디언 이용호의 만만사 : 2006,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