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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조선의 김정은 세자 책봉

풍월 사선암 2010. 10. 26. 12:32

김일성 조선의 김정은 세자 책봉 [2010.10.08 제830호]

[표지이야기] 할아버지 이미지를 흉내 내고 아버지 세습신화 반복하는 김정은의 권력승계…

지구상 마지막 남은 이상한 왕조의 기이한 세습은 성공할까

▣ 최성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 참가자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아랫줄 오른쪽이 김위원장, 그의 왼쪽 두 번째가 김정은이다.AP

 

북한의 김정은 후계 체제를 이해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장면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1. 9월30일 처음으로 공개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아들 김정은의 모습. 김일성 주석의 청년기 사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반응이 거의 비슷했다. “똑같다!”

 

2. 9월30일 판문점 남쪽 지역 ‘평화의 집’을 찾은 북한 기자들의 이야기. 이들은 김정은을 가리켜 “지도자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분”이라고 칭송했다.

 

3. 9월28일 개정된 조선노동당 당규. 북한은 개정 당규에서 원래 “김일성 동지에 의해 창건된 주체형의 혁명적 맑스-레닌주의당”이라는 ‘당 성격’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당, 김일성 조선”으로 바꿨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전문을 공개한 ‘김정은 대장 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도 김정은을 가리켜 “위세 좋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등 우리 수령님(김일성 주석)과 우리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꼭 빼닮은” 외모라고 소개했다.

 

엘리트 사회 중심으로 먼저 우상화

 

첫 번째 장면은 북한의 후계 승계가 얼마나 과학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북한 <조선중앙TV>를 통해 공개된 김정은의 모습은 젊은 시절 김일성 주석의 모습 그대로였다. 건장한 체격과 강인한 외모가 닮기도 했지만, 양쪽을 짧게 자른 머리 모양이나 사진 속 다른 참석자와 달리 유독 혼자 인민복을 입은 사실 등으로 미루어볼 때 ‘김일성 이미지’를 차용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인민복은 김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즐겨 입던 중국식 간편복이다. 이 모습은 북한이 대외적으로 공개한 첫 번째 김정은이었다. 김정은이 김일성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각인시키려는, 일종의 이미지 정치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2009년 10월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전문을 공개한 ‘김정은 대장 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도 김정은을 가리켜 “위세 좋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등 우리 수령님(김일성 주석)과 우리 장군님(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꼭 빼닮은” 외모라고 소개하며 “유일무이한 후계자”로 내세웠다.

 

외부 세계와 접촉이 가능한 북한 기자가 이미 상식을 뛰어넘은 ‘김정은 칭송’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 기자는 이날 ‘평화의 집’에서 김정은에 대해 묻는 남쪽 기자에게 “(김정은은) 컴퓨터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것에 정통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많아야 올해 28살에 불과한 김정은을 가리켜 “지도자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분” “모든 것에 정통하신 분”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북한 엘리트 사회를 중심으로 ‘김정은 우상화’가 이미 상당 부분 진행됐다는 사실을 뜻한다.

 

압권은 개정된 당 규약에 ‘김일성 조선’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2009년 4월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 ‘김일성 민족’이라는 말을 처음 썼다. 이번에 헌법의 상위 규범인 당 규약에 ‘김일성 조선’을 넣은 것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풀이된다. 김일성 신화화의 극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게다가 당 규정과 사상 및 노선에 처음으로 ‘김정일 동지’와 그의 노선을 뜻하는 ‘선군정치’가 포함됐다. 개정된 당 규정은 “김정일 동지를 중심으로,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히 결합된 노동계급과 근로인민대중의 핵심 부대이자 전위부대”라고 당을 설명하고 있다. 당의 노선에서도 선군정치를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주체사상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기관 관계자는 “당 규정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름과 그의 선군정치 노선이 들어갔다는 사실은 선군정치를 주체사상과 함께 유일사상의 계보에 넣겠다는 의도”라며 “이번 당 규약 개정을 통해 김 위원장이 김일성의 뒤를 잇는 역사적 인물로 한 단계 승격된 셈”이라고 말했다.

 

 북한 권력세습 가계도

 

영생불멸하는 수령의 시작

 

결과적으로 북한은 지난해 헌법 개정과 이번 당 규약 개정을 통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김일성’이라는 열쇳말로 풀었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까지 덩달아 역사적 인물로 승격시킴으로써 자연스레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의 정당화를 꾀하고 있다. 9월28일 노동당 제3차 대표자회는 북한이 쓰고 있는 거대한 신화의 또 다른 속편을 알리는 행사였다. 물론 신화의 주인공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에서 김정은으로 바뀌었다. 신화학자인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는 “정당성이 부족한 정권일수록 체제 유지를 위해 신화화를 필요로 한다”며 “외부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김일성-김정일 신화를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조선왕조와 일제시대를 거쳐 시민사회의 경험이 없이 곧바로 김일성 유일지배 체제로 넘어온 북한에서는 신화적 수사학과 상징 조작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일성을 이미 역사적 인물에서 신화적 위치까지 오른 인물로 본다면 이제는 그 신화를 김정은에게 입히는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북한 방송은 “이곳 군인들이 물이 없어 고생하고 있을 때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 쇠파이프를 박고 지하수를 파내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정은 대장이었다” 하는 식의 선전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체제 신화의 탄생은 김일성 주석의 ‘항일유격투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의 역사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전개된 공산주의자의 항일유격투쟁을 김 주석이 유일하게 지도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조선로동당력사>는 1934년 3월 중국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지시로 동만(지금의 옌볜)에서 건립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마치 김일성의 ‘조치’로 창설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때 김일성 주석은 이 부대의 중간 간부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인과 중국인 혼성으로 편재된 동북혁명군의 이름도 북한은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부른다. 김 주석의 권한 강화를 위해 그의 항일투쟁을 부풀리고 왜곡한 것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김일성 신화화가 그의 카리스마를 지탱해준다고 분석했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주의 전체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한 유일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이론가들은 지금까지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그의 유일적 지도 아래 이루어진 역사로 분식하고 그의 투쟁 활동을 사실의 범위를 넘어서서 과장과 왜곡을 거쳐서 신화화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그의 신화적 이미지도 붕괴되었지만 북한에서는 현재도 여전히 신화화된 그의 항일무장투쟁이 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2000년 3월)

 

 북한 권력 변천사

 

신화를 바탕으로 한 김일성 주석의 카리스마는 북한 특유의 교양학습 체계를 통해 개인숭배로 이어졌다. 김 주석을 가리키는 특유의 호칭인 ‘어버이 수령’도 등장했다. 이종석 전 장관은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에서 “북한 사람들은 사람의 생명을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으로 이분화시키고 이중에서 사회정치적 생명을 ‘영생불멸’하는 것으로서 육체적 생명에 비해서 ‘비할 바 없이’ 귀중하다고 보며 바로 이 사회정치적 생명을 수령이 준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수령이란 호칭 앞에 ‘어버이’가 붙고 국가가 확대된 가족의 이미지로 강조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일성 주석에 대한 개인숭배는 1950년대 후반의 ‘반종파투쟁’ 과정에서 반대파의 몰락과 함께 더욱 심해졌다.

 

북한 사회를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통치해온 김일성 주석은 1967년 후반부터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 차원을 넘어 가계의 절대화를 시도했다. 후계 문제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김일성 체제가 끊임없이 강조한 ‘혁명 가문’의 전통은 결국 세습으로 이어졌다. 1974년 2월 김정일 위원장이 32살의 나이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선출되며 후계자로 등장했다. 후계자로 오르기까지의 과정이나 이후 권력을 탄탄히 다지는 과정은 민주적·절차적 정통성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 앞서 정재서 교수가 말한 것처럼 “체제 유지를 위한 신화화”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백두산 밀영 신화’다. 

 

‘김정은 대장’의 신화 만들기

 

항일의 구심점으로서 백두산이 갖는 상징성을 김정일 위원장의 탄생과 연관짓기 위해 그의 출생지를 백두산 밀영으로 조작한 것이다. 김 위원장의 실제 출생지는 소련 영내였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저서 <북조선>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필자는 김일성이 생전에 탈신화화, 곧 ‘인간선언’을 함으로써 계승자인 아들을 자유롭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들은 주저 속에서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는 1992년 2월16일 <노동신문> 1면을 본 뒤 자신의 기대가 물거품이 됐다고 소개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50살 생일을 맞아 김일성이 보낸 축시가 실려 있었다. “백두산 마루에 정일봉 솟아 있고/ 소백수 푸른 물은 굽이쳐 흐르누나./ 광명성 탄생하여 어느덧 쉰 돌인가/ 문무충효 겸비하니 모두가 우러르네./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 땅을 뒤흔든다.” 조작된 ‘백두산 밀영 신화’는 북한 사회에서 곧 체제 신화로 자리잡았다.

 

북한은 백두산 밀영 신화를 선전해 혁명 가문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김정일 위원장이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부터 그가 북한 사회에서 쌓은 업적을 내세우며 민심을 얻으려 했다.

 

이런 방식의 권력 이양은 김일성 가문의 3대 세습 과정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를테면 2009년 중반부터 평양의 유선 라디오방송을 통해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김정은 관련 ‘혁명 일화’가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인민군 ‘대덕산 초소’ 일화는 대북 소식통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휴전선 서북지역에 있는 대덕산 초소는 김일성 부자가 수차례 찾았으며 북한에서는 ‘일당백’ 구호가 유래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방송은 이 지역을 소개하며 “이곳 군인들이 물이 없어 고생하고 있을 때 어떤 젊은이가 나타나 쇠파이프를 박고 지하수를 파내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정은 대장이었다” 하는 식의 선전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북한의 권력기구도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김 주석이 김 위원장을 후계자로 공인하기 전인 1971년 9월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후계자 린뱌오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김 주석이 핏줄인 김 위원장을 후계자로 확정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한 북한의 노력은 2009년 1월 그가 후계자로 사실상 내정된 이후 줄기차게 진행돼왔다. 이를테면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진출한 축구 대표팀의 성과를 김정은의 업적으로 연결하려 했다는 일화나, 평양시 주택 10만 가구 건설을 김정은이 지휘한다고 선전한 것 등이 꼽힌다. 하지만 월드컵에서 북한이 포르투갈전에서 0-7로 대패하고, 경기 침체로 평양시 주택 건설도 여의치 않아 별다른 효과를 얻지는 못했다. 북한 정권이 주민에게 김정은의 업적으로 내세울 만한 건 결국 몇몇 공장에서 컴퓨터수치제어(CNC)화에 성공했다는 것 정도에 불과하다.

 

2009년 10월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공개한 김정은의 ‘위대성 교양자료’도 눈여겨볼 만한 자료다. ‘교양자료’는 김정은을 가리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천재적 영지와 지략을 지닌 군사의 영재”라거나 “현대 군사과학과 기술에 정통한 천재”라는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이 자료에는 한때 세습에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 위원장이 3대 세습을 강행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돼 있다. “제2국제당(제2인터내셔널)에 공헌한 베른슈타인, 카우츠키와 같은 기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해 수정주의의 길로 전락했으며, 스탈린 사후 권좌에 오른 흐루시초프에 의한 수정주의가 대두해 이후 배신자인 고르바초프에 의해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참상이 일어났다.” 결국 ‘배반과 배신’, 그리고 ‘체제 붕괴’에 대한 김 위원장의 두려움이 “한없는 충실성”을 지니고 있는 김정은을 선택한 배경이라는 뜻이다.

 

북한은 개정된 노동당 규약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선군정치’를 주체사상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다. ‘김정일 신화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린뱌오 반란이 반면 교사?

 

이는 자신이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선택된 역사를 그대로 반복한 것이었다. 김 주석이 김 위원장을 후계자로 공인하기 전인 1971년 9월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의 후계자 린뱌오가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권력 승계 당시 중국공산당 서열 2위이자 마오쩌둥 숭배운동을 주도한 린뱌오가 반란을 도모한 사실은 김 주석이 핏줄인 김 위원장을 후계자로 확정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김 위원장이 권력을 물려받을 때도, 다시 그 권력이 김정은에게 이어지는 과정에도 북한 정권은 봉건적 규범인 ‘충실성’을 제1덕목으로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족한 민주적 정통성과 이에 따른 체제 불안을 신화와 충성 등 낯선 단어로 채워야 하는 것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기이한 왕조’ 북한의 현실이다. ‘왕조’라는 표현이 과격하다는 지적이 있지만, 3대 세습을 기어이 강행하는 북한 체제의 특성을 살필 때 오늘의 북한과 ‘왕조’ 사이에 샛강이 흐른다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북한 사이에는 한강이 흐른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