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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 비서의 눈물

풍월 사선암 2010. 10. 16. 09:11

 황장엽 비서의 눈물


 

평양 김형직사범학 노어노문학과 교수를 지내고, 20여 년 동안 김일성 처가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일하다 남한으로 망명한 후, 지금은 미국 예일대학의 초빙교수가 된 김현식 교수가 자서전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을 통해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비서의 인연을 소개했다.

 

그는 “황장엽 비서의 눈물”이라는 부제를 통해 (북에서)“황비서와 같이 엄청난 지위에 있던 사람의 통역을 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운명의 장난처럼 황비서를 서울에서 다시 만났고, 그의 아들 황경모의 운명을 두고 벌어진 북한 공작원들의 막후공작 내용까지 비교적 자상한 내용을 털어놓았다.

 

황장엽 비서의 눈물

 

1985년 봄, 러시아 공산당의 책임일꾼들이 평양을 방문했다. 나는 평양시내를 참관하고 개성의 정전담판 회담장과 묘향산 국제친선 전람관을 방문하는 러시아 대표단의 통역을 맡았다. 그들은 러시아로 귀국하기 전날 황장엽 중앙당 국제비서와 면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황 비서의 통역이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내가 그 통역을 대신했다.

 

황 비서와 같이 지위가 높은 사람의 통역을 하려니 전에 없이 긴장이 되었다. 국제 비서실에 들어서서 엄청나게 높은 천정을 쳐다보자 괜히 주눅이 들었다. 게다가 황 비서의 날카로운 눈매를 보자 가슴이 울렁거리며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황 비서는 러시아말을 썩 잘하는 사람이다. 그런 이의 통역을 하려니 무척 힘들었다. 내가 통역하는 것이 마음에 흡족하지 않으면 황 비서는 헛기침을 해서 넌지시 일러 주었다. 얼마나 긴장이 되는지 통역을 하는 동안 등골이며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내가 힘들어하는 걸 눈치 챈 러시아 사람들이 황 비서에게 말했다.

 

“당신은 모스크바대학에서도 소문난 수재였는데 왜 굳이 통역을 놓고 이야기합니까? 우리끼리 러시아말로 시원스레 이야기합시다.” 그러자 내가 미처 그 말을 통역하기도 전에 황비서가 먼저 말을 받았다. “사실은 내가…….”

 

당황한 나는 얼른 황 비서의 말을 자르며 힘주어 말했다. “황 비서 동지, 저들이 ‘통역 없이 직접’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그랬더니 황 비서도 정신이 번쩍 든 듯 말문을 닫았다.

 

김일성은 통역 없이는 외국인과 면담할 수 없도록 지시를 내렸다. 아무리 황 비서가 러시아말을 잘한다 해도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외국인을 만나는 것도 당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외국인들이 거리를 지나는 학생에게 말을 걸면 모두 달아 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려운 통역하느라 수고하셨소.” 면담을 끝내고 방을 나올 때 황 비서는 면담상 위에 놓여 있던 샤프 펜을 내 윗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당시 샤프 펜은 고위 간부들이나 쓸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나는 황비서가 준 샤프 펜을 10년이 넘도록 정히 썼다.

 

그로부터 25년 후, 나는 서울에서 황 비서를 다시 만났다. 그는 1997년 필리핀을 거쳐 서울로 망명했다.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의장(국회의장)을 세 차례에 걸쳐 11년이나 지낸 핵심 권력자였던 황장엽 비서는 망명 직후부터 통일정책연구소 일을 맡아 했다.

 

나도 서울로 온 후 황장엽 비서의 통일정책연구소에서 같이 일했다. 예전에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 만큼 높은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그도 나도 똑같은 탈북자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지난 이야기를 하며 서로를 위로했다. 가족을 잃고 홀로 남한 땅에서 살아가는 처지라 우리는 서로를 가슴 아프게 여기며 가까이 지냈다.

 

“여기 앉아 보시오, 세상에 별일이 다 있구먼.” 어느 날 출근을 하자마자 황비서가 다급한 얼굴로 나를 불러 앉혔다. “오늘 새벽에 아들애의 목소리를 들었소.”

 

“꿈이라도 꾸셨습니까?”

“아니요, 진짜 아들의 목소리였소.”

 

황장엽 비서는 몹시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철학자로서 늘 냉정하고 차분한 모습만 보여 온 그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아버지, 나 경모입니다, 내가 지금 아픕니다, 하는 거였소. 아이의 말이 거기서 끊기더니 다른 목소리가 ‘황장엽 비서 동지, 아들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비서 동지께서 마음 바로잡으시고 이쪽으로 넘어오시면 아들도 살고 모든 일이 잘 풀리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답하십시오, 얼른 말씀하셔야 합니다’ 라고 하는 거였소.”

 

“전화로 말입니까?”

“그래 전화로 말이요.”

 

황장엽 비서는 기진한 듯 눈을 감았다. 주름진 눈가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는 그가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래 뭐라 하셨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소……그냥 수화기를 내려놓았소.”

 

황비서의 처지가 안타까워 나도 가슴이 미어졌다. “이런 걸 각오하지 않고 넘어온 것은 아니지만, 정말 너무 잔인하구먼.” “뭐 하러 오셨습니까? 그쪽에 그냥 계시지…….”

 

“김정일 이 전쟁을 일으키는 걸 어찌 보고만 있겠소? 전쟁이 나면 남도 북도 모두 망하고 마는 것을.” “그렇지만 남한에서는 황 선생님을 그렇게만 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솔직히 남한이 이럴 줄은 나도 몰랐소. 중앙당 비서였던 내 말을 믿지 않다니. 전쟁만 막으면 몇 년 안에 통일이 될 줄 알았지……정주영 영감이 김정일 에게 돈만 주지 않았다면 벌써 둑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었을 것이오.”

… …

 

그는 눈을 감아 버렸다. 눈꺼풀이 경련이 일 듯 떨리고 있었다.나는 그를 껴안고 위로할 수 없었다. 그가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만큼 나도 두렵고 힘들었기 때문이다. 북에 남아 고초를 당했을 가족에 대한 염려가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익히 아는 나로서는 황장엽 비서에게 이러쿵저러쿵 입에 발린 위로를 할 수 없었다. 그의 고통은 온전히 혼자서 치러내야 하는 형벌이었다.우리는 각자 말없이 앉아 숨이 멎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누가 쏘았는지, 이미 두 개의 총알이 우리 가슴에 깊이 박혀 있었다.

 


김현식 교수가 전하는 황장엽 이야기( 2 )


 

김현식 교수의 자서전 <나는 21세기 이념의 유목민>을 통해 전해지는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이야기가 일간지들과 인터넷 언론들에 회자되면서 잔잔한 파문을 몰아오고 있다. 사실 여부가 논의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가 픽션이 아니다고 거듭 주장하는 70대 노 교수의 황장엽 이야기 2탄을 아래에 소개한다.

 

하늘의 별을 땄지만

 

황장엽 비서가 북한에서 얼마나 높은 사람이었던가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중앙당 국제비서란 언제나 김일성과 김정일의 바로 곁에서 일하는 최고위급 인물이다. 황장엽 비서는 김일성 과 김정일 의 국제문제에 관한 고문이었다.

 

황 비서에게는 아들 하나와 두 딸이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그 애들을 가리켜 ‘하늘의 별을 땄다’며 부러워했다. 특히나 그의 아내는 ‘박승옥 보다 더 좋은 팔자는 없다’고 할 정도로 평양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황장엽 비서가 모스크바국립대 철학과에 유학할 때 박승옥은 모스크바의대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지만 드러내놓고 사귈 수는 없었다. 북한에서는 대학에서 연애를 하면 학교에서 쫓겨나기 때문이다.

 

결국 박승옥 은 황 비서보다 먼저 평양으로 돌아와 내가 가르치던 평양사범대학 로어 로문학과에서 통신으로 공부했다. 박승옥은 대학을 마치고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로어를 가르치다가 경찰(안전성정치)대학 교수가 되어 중좌 계급장을 달고 학생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김정일 의 여동생인 김경희가 러시아에 유학할 동안 모스크바에 함께 머물며 김경희 의 공부를 도와주면서 고위층과 인연을 맺었다.

 

박승옥의 팔자가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은 김정일의 딸 김설송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부터다. 김설송은 마땅히 부상급(차관급) 고위간부의 자녀들만 다니는 남산학교에서 공부해야 했으나 김설송은 남산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 설송이 남산학교에 입학하던 같은 해에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남동생의 아들도 입학하게 되어 있어 김정일이 자기 딸을 보내지 않은 것이다. 원가지네 아이가 곁가지네 아이와 같이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된 설송의 학과공부가 황장엽 비서의 부인 박승옥 에게 차려졌다. 덕분에 박승옥은 외국문도서 출판사 원고심사원이란 직책을 새로 받고 사장보다 더 좋은 방에서 일하게 됐다. 박승옥의 방에는 전화까지 놓여 있었다. 북한에서 전화란 아무 집에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대학 6백여 명의 교수 중에도 총장의 집에만 전화가 있을 정도여서 나는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전화를 쓸 줄 몰라 쩔쩔매곤 했다. 뿐인가, 박승옥은 아무 시간에나 출근하고 퇴근해도 아무도 통제하지 않았다.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그녀는 늘 새까만 벤츠만 타고 다녔다.

 

당시는 나도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의 남동생의 아이들을 개별 지도할 때여서 우리는 자주 만나 초등학생의 학습지도에 대해 허물없이 의논하곤 했다. 박승옥은 설송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는 혼자 담당하다가 중학교 과정에 들어가자 유능한 대학교수들과 함께 특별한 장소에 가서 가르쳤다. 이런 사실은 물론 절대 비밀에 부쳐졌다.

 

박승옥이 설송이의 학습지도도 잘하고 어린이용 영어와 프랑스어 교재까지 출판하자 김정일은 박승옥 에게 ‘인민기자’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기자 중에는 일반기자와 특출한 공로가 있는 공훈기자, 인민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인민기자가 있는데 박승옥 그녀는 최고의 칭호를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박승옥의 위세도 남편이 서울로 넘어오면서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이 세상에 박승옥 만 한 팔자가 없다’던 그녀는 남편의 망명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유달리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가 남편의 망명 이후 받아야 했을 모욕감을 이겨내기 어려웠으리라. 박승옥의 자살 소식을 전해 주며 황비서는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황 비서와 박승옥 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부모를 닮아 모두들 영특했다. 김일성대학 문학부를 졸업한 맏딸 황선이는 나와 같은 대학에서 외국문학을 가르치다가 똘스또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원으로 뽑혀 갔다. 그녀가 석사 논문을 쓸 때 나는 힘껏 도와주었다. 황선이의 남편은 황장엽 비서의 주체사상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찍이 황 비서가 유망한 학자로 점찍어 놓았을 만큼 똑똑한 사람이다.

 

황 비서가 서울로 망명한 후 김정일은 황선이의 남편에게 ‘처가 반역자 황장엽의 딸이므로 갈라선다’고 세상에 대고 공표하라고 몰아쳤다. 그러나 그는 끝내 지조를 지켜 이혼하지 않고 아내와 함께 수용소로 갔다.

 

황 비서의 둘째딸은 평양의대를 나온 의학자였다. 내가 평양의대 병원에서 일하는 둘째 딸을 보러가는 길에 보았던 그녀는 얼굴 가득 총기가 반짝거렸다. 그녀 역시 아버지의 망명으로 반역자의 딸이 되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녀의 남편은 김정일이 지시하는 대로 아내와 이혼했다.

 

황장엽의 외며느리 혜영은 김일성대학 영문학부를 마친 어여쁘고 품성 바른 여성이다. 우연히도 나는 그녀와 함께 일했던 적이 있다. 1970년대 중반쯤 김일성 이 초등학교 4학년부터 영어와 로어를 가르치라는 지시를 내렸다. 외국어는 일찍 가르칠수록 좋다지만 갑자기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외국어를 가르치려니 교원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가장 발음이 좋은 사람을 뽑아 그 발음을 녹음해서 교원들에게 강습을 시켰다. 당시에 나는 로어 발음을 녹음했고 그녀는 영어 발음을 녹음하면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혜영은 시아버지의 망명으로 강제이혼 당한 뒤 아이들도 빼앗긴 채로 추방당했다.

 

나는 황장엽 비서가 망명했다는 소식을 1997년 여름, 내출혈로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들었다. 그 전해인 1996년 일 년 동안 국정원은 한 달 건너로 황장엽 비서에 대한 나의 견해를 글로 적어 받아 갔다. 그 글을 쓰면서 나는 혹 황장엽 비서를 서울로 데려 오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내 짐작대로였다.

 

나는 황장엽 비서가 그런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을 제외하고 서방의 자본주의 나라를 다 다녀보았다. 역사의 흐름,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누구보다도 정확히 분석,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런 선택을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황 비서의 좌우명은 '개인의 생명보다 더 귀중한 가족의 생명, 그보다 더 귀중한 민족의 생명'이다. 이런 좌우명을 가진 그였기에 북한에서 누렸던 높은 지위, 북한 최고의 고급 아파트, 단란했던 가정을 다 버리고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

 

교수 김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