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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정말 영웅인가?” 미국선 54년전 끝난 논란

풍월 사선암 2010. 8. 17. 12:05

“맥아더는 정말 영웅인가?” 미국선 54년전 끝난 논란

 

[한겨레] 현장 속 현장

1951년 4월11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본국의 훈령을 무시하고 한국전쟁의 확전을 주장하던 더글러스 맥아더 미 극동군 겸 유엔군 총사령관을 전격 해임했다. 그러나 해임된 맥아더는 본국에 '개선장군 시저(케사르)'로 귀환했다. 연도에서 그를 환영했던 인파는 700만명이 넘었다. 의회는 공화당 주도로 그의 해임을 따지는 청문회를 열고, 그에게 군 전역을 기념하는 이례적인 고별연설 기회까지 부여했다. 국제사회에서 공산주의가 팽창하고 미국에서는 매카시즘 선풍이 불던 당시 맥아더는 공산주의와 결연히 맞서 싸우다 희생된 영웅으로 떠오르며 미국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54년 전 미국을 들끓게 했던 맥아더 논쟁이 최근 한국에서 재연되고 있다. 인천에 세워진 그의 동상을 놓고, 재야운동단체 등은 '맥아더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하려 했던 점령군의 사령관'일뿐이라며 철거를 주장하고 있다. 반면 보수단체들은 '공산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해준 은인'이라며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군과 정치의 경계 넘나들다

 

맥아더는 최근까지 한국인들에게 '현대의 군신'으로까지 평가받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금세기 최고 전략전술가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터무니없는 전략적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도 만만치않다.

 

용기·희생·애국심·정직으로 일생을 살아온 모범적인 군인이라고 극찬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오만과 허풍, 현란한 언사로 일관하며 문민우위에 도전한 공화당 보수우파의 정치군인일 뿐이라고 악평하는 쪽도 있다.

 

맥아더는 분명 미군의 최고 엘리트였다. 웨스트포인트를 개교 이래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그는 항상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필리핀 점령군 사령관을 지낸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후광도 작용했다. 맥아더는 1차대전에서 최연소 사단장과 준장으로 승진하며 13차례나 되는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다. 43살의 나이로 웨스트포인트 사상 최연소 교장에다가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육군의 최고자리인 참모총장에도 최연소로 취임했다. 총장 재직 때 군 현대화를 추진하며 능력도 과시했다.

 

그러나 그는 군과 정치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평화주의와 공산주의는 동침자'라는 등 보수우익적 정견과 대담한 언사로 논쟁을 불렀다.

 

대공황이 몰아치던 1932년 여름 맥아더는 1차대전에 참전했던 2만명의 퇴역군인들이 약속된 1천달러의 보너스를 미리 지급해달라며 벌이던 농성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그는 기관총부대와 탱크까지 동원해, 대검을 휘두르며 이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이들을 쫒아 애나코스티아 강까지 건너 노숙하던 텐트를 불질러 버렸다. 노숙지에 있던 아이들과 여자들을 걱정했던 후버 대통령은 강을 건너지 말라고 두번이나 명령했으나 그는 그것에도 개의치 않았다.

 

맥아더는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며, 한때 자신의 전우였던 이들을 "추악한 몰골의 폭도"라고 태연하게 비난했다.

 

문민우위의 원칙을 무시하는 그의 성향을 잘 보여준 이 '보너스 부대' 사건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공화당 정부의 인기를 급락시켜, 그 뒤 20년이 넘게 지속된 민주당 정부 출범에 일조했다. 이 사건을 지켜본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맥아더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맥아더는 이 민주당 정부와 평생 알력을 벌인다. 그러나 이 사건은 공화당의 보수우파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맥아더는 보수우파의 대표적 군인으로 더 탄탄한 입지를 굳힌다.

 

맥아더에 대한 논란은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맡은 그의 역할이 중심을 이룬다. 루스벨트와 알력을 벌이던 맥아더는 1937년 필리핀 군사고문을 마지막으로 전역했으나,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한 1941년 현역으로 재소집되어 필리핀에 주둔하는 극동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나는 돌아온다."는 말 실제 사정 미 합동참모부는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할 경우 루손에 주둔한 병력을 마닐라만의 입구인 바탄 반도와 코레기도 섬으로 퇴각시켜 마닐라만을 방어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맥아더에게 그 작전은 너무 수세적이었다. 그는 마닐라만이 아니라 전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 해변에 병력을 산개하는 더 대담한 작전을 벌이자고 합참을 설득했다. 조지 마셜 육군참모총장도 이 계획을 받아들이고, 100대의 B-17 폭격기까지 제공했다. 이 폭격기들도 해변의 기지에서 발진하도록 배치됐다. 맥아더는 13만5천명의 병력과 227대의 각종 전투기들로 엄청난 방위 및 공격 전력을 보유했다며, 필리핀은 미국 방위선의 핵심기지가 될 것이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이는 미군 역사상 가장 멍청한 작전임이 곧 드러났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 직후 맥아더는 비행기들을 옮겨야 된다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방치하다 다음날 바로 일본 공군의 공격으로 비행기들의 절반을 잃고, 2주도 안돼 마닐라도 함락된다. 맥아더는 뒤늦게 바탄 반도로 총퇴각을 명령해, 식량도 챙기지 못한채 포위됐다. 워싱턴 쪽은 맥아더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피신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는 부하들을 남겨두고 갈 수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는 돌아온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워싱턴의 전쟁지도부는 필리핀에서 일패도지당한 맥아더를 해임해도 시원치 않았으나, 군 내에서 그의 명성과 영웅신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맥아더는 오히려 2개월간 용감히 저항한 전쟁영웅으로 부각돼,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까지 거론된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은 해군으로 넘어갔다.

 

전쟁 내내 맥아더는 전략을 놓고 워싱턴과 알력을 빚었다.

 

"나는 돌아온다"고 한 약속에 집착한 맥아더는 일본 열도 침공의 교두보로 먼저 필리핀의 해방을 주장했다. 반면 어네스트 킹 해군참모총장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 등 해군지휘부는 대만을 선호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해 태평양 전쟁의 방향을 틀어쥔 해군이 워싱턴의 신뢰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맥아더는 전세가 미국으로 결정적으로 기울어진 44년 겨울이 되어서야 필리핀 상륙을 허가받고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트루먼은 종전 뒤 공화당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태평양 전쟁의 조연이던 맥아더를 다시 주연으로 만들어준다.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장면으로 맥아더는 다시 전쟁영웅으로 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모두가 반대하던 인천상륙작전을 밀어붙여 다시 한번 떠오른다. 맥아더는 이 작전으로 그의 지휘력과 과단성을 과시했으나, 그 특유의 오만도 드러냈다. 마오쩌둥 중국 주석은 그의 전략을 분석한 뒤 지적했다. "그가 그렇게 오만하고 고집불통이라며? 좋아. 오만하고 고집불통일수록 좋지. 오만하고 고집불통의 적을 무찌르기는 쉽지." 맥아더는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군사명언을 남겼다. 사실 이는 그에게 적용해야 할 말이었다. 그는 필리핀에서도 한국에서도 경계에 실패한 용서받을 수 없는 지휘관이었다.

 

한국서 재연되는 맥아더 논란

 

맥아더가 38선을 돌파하자,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우려한 트루먼은 맥아더와의 면담을 원했다.

 

맥아더가 중대한 시기라서 워싱턴으로 갈 수 없다고 거부하자, 트루먼은 태평양 상의 웨이크 섬까지 날아왔다. 이때 맥아더는 군통수권자인 트루먼에게 경례도 하지않고 악수만 했다. 트루먼은 1차대전 때 자신의 사단에서 대위로 복무했던 부하였다.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그것은 결정적인 위협이 될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들의 개입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이 참전해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막강한 공군력으로 최대의 살륙전을 펼칠 것이다." 맥아더는 크리스마스 때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트루먼에게 호언도 했다. 맥아더가 10월15일 웨이크에서 이렇게 호언할 때 중국 인민해방군의 최정예 부대들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압록강을 은밀히 건넌 상태였다.

 

맥아더는 필리핀에서 패전한 뒤 다시 최대의 패배를 맛보았다. 그후 그는 원폭사용, 만주폭격, 국민당군의 중국연안 항구 침공 및 한국전 참전 등을 주장했다.

 

맥아더의 확전론이 현실화됐을 경우, 한반도와 세계정세가 어떻게 됐을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확전하지 않는다면 미군이 고사할 것이라며, 확전과 철수 중 양자택일하라고 워싱턴에 압박했다. 그가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한반도를 놓고 위험한 도박을 벌이는 사이, 한국전쟁의 실질적 지휘권은 새로 8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매튜 릿지웨이에게 넘어갔다. 릿지웨이는 워싱턴의 훈령대로 제한전을 벌이며 38선을 회복해 '확전 아니면 철수'라는 맥아더의 주장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해임된 맥아더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는 조국에서 영웅 대접을 받으며, 트루먼과 민주당 행정부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의회 청문회 과정에서 웨이크 섬 회동내용 등 그의 전략적 오류들이 공개되며, 그에 대한 인기는 곧 시들해졌다. 그를 부동의 대통령 후보로 여겼던 공화당도 1952년 대통령선거에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의 참모였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를 후보로 지명했다.

 

필리핀에서 맥아더의 참모로 근무했던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항상 현실을 무시한 채 거창한 아이디어와 계획만을 주장한다고 불평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맥아더는 아이젠하워를 "내가 만난 최고의 사무원"이라고 조롱했으나, 아이젠하워는 "나는 맥아더 밑에서 연극을 배웠다"고 되받아쳤다.

 

맥아더는 고별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맥아더를 죽일 수는 없지만, 이제 그를 조용히 사라지게 할 때이다.

한겨레 | 입력 2005.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