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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대통령 재조명

풍월 사선암 2010. 8. 29. 13:14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대통령 재조명

(1875.3.26.∼1965.7.19.)

 

▶ 초대 국회의장, 건국 대통령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조부가 황해도 평산 능내동(平山陵內洞)에서 살다가 이박사가 3살 때 서울 도동으로 이사해서 살았다. 도동 우수현(雩守峴) 남쪽 오막살이에 살면서 학자 이근수(李根秀)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우남(雩南)이란 호(號)는 '우수현(雩守峴) 남쪽'이란 데서 따온 것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광복 후 제헌국회 초대의장,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이다. 독립운동의 중추였고 건국을 주도한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주역이었다. 그의 최대 업적은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은 것이다. 비록 남한만의 정부를 수립하여 통일의 과업을 남겨두었지만 민주공화제와 자본주의를 지향한 그의 혜안은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일생은 우리 나라 근 ― 현대사의 소용돌이와 함께하고 있다. 조선왕조의 말기인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한 그는 13세 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는 전통 한학에 정진하여 18세에는 사서삼경을 독파하는 경지에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신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1894년에는 배재학당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승만은 선각자였던 서재필에게 세계역사와 지리를 배우고 배재학당 학생회인 협성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 영어를 배워 미국인들과 친교를 넓히기 시작한 이승만은 사회 활동 초기 언론에 주목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898년 1월 1일 협성회 회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논설을 쓰고 이를 발전시켜 일간지 매일신문의 발간을 주도한다. 1898년 4월 9일 제호를 바꾼 매일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이다. 이보다 앞선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격일간이었다.

 

이승만은 같은 해 8월 10일 창간한 제국신문의 주필을 맡아 일본의 침략을 폭로하는 등 활발한 언론 활동을 벌였다.

 

▶ 옥고를 치르다

 

이승만은 언론과 함께 정치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동하며 황국협회의 보부상들과 대결하는 선봉장 역할을 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 당한 뒤 이승만은 1899년 1월 9일 투옥됐다. 황제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덮어쓴 것이었다. 선교사들의 통역을 맡았던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도움으로 미국공사관이 나서 조선정부에 석방을 촉구했다. 석방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이승만은 탈주를 시도하다가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이승만의 수형생활은 특이했다. 그는 옥중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제국신문 등에 논설도 집필했다. 그는 옥중에서 저서도 집필했다. 그가 얇은 종이에 쓴 ‘독립정신’은 노끈으로 위장되어 반출되었고 박용만이 미국으로 가져가 1910년 2월 출판됐다. 일제는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금서로 규정하여 판매를 금지시켰다.

 

(2205) 초대 대통령 이승만 1부
(2206) 초대 대통령 이승만 2부/건국과 분단
(2207) 초대 대통령 이승만 3부/6.25와 4.19

 

이승만의 옥중 생활에서 그의 꿈과 치밀한 계산을 보여주는 대목이 중죄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것이다. 쇠줄로 묶여있는 그 자신을 기록한 것이다.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던 이승만은 특사로 1904년 8월 석방됐다. 미국 선교사들과 미국 공사관의 노력으로 특사를 받았지만 그의 옥중 생활은 5년 8개월이나 됐다.

 

이승만은 제국신문의 주필로 다시 복귀했다. 제국신문은 10월 7일자 논설이 일본의 치안에 문제가 된다고 하여 민족지로는 처음으로 정간처분을 받았다.

 

신문이 정간 중일 때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났다. 11월 4일이었다. 이승만의 가방에는 고종의 밀서가 담겨 있었다. 미국대통령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내용이었다.

 

이승만은 고종의 밀사로 방미한 것이며 1905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밀서를 전달했다.

 

이승만의 탁월한 선택은 그가 미국에서 학문을 닦아 미국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인정을 받은 사실이다. 이승만은 1905년 1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했고 곧 이어 하버드 대학원에 진학하여 정치학과 역사학 분야의 석사 학위를 받았다.

 

독립청원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승만은 학문을 계속했다. 1908년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하여 1910년 6월 정치학과 경제학 역사 분야의 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한국인 최초의 정치학 박사가 된 것이다. 이승만의 닉 네임이 된 ‘이박사’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승만 생애의 초기는 이같이 자로 잰 듯 기획한 인생을 충실히 실천했다.

 

▶ 망명 33년과 외교활동

 

이승만은 1910년 국치 직후 귀국했다. 이승만은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청년학교 학감을 맡았으나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12년 4월 미국 미네아폴리스에서 개최한 국제감리교 평신도 대회에 참석을 이유로 다시 도미, 망명의 길에 올랐다. 하와이에서 한인기숙학교를 확장하여 교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던 이승만은 1917년 세계약소민족대회의 한국대표로 참가하고 1919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를 개최했다. 조국에서 3·1독립선언서가 발표되고 대일항쟁이 일어나자 연해주 노령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이어 상해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대통령, 국내 13개 도대표들이 결성한 서울의 임시정부는 그를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국내외에서 한국지도자로서 이견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승만은 워싱턴에 한국위원회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체계화하고 외교전을 강화했다. 이승만은 상해 임정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하와이에서 상해로 밀항했다. 그는 하와이의 미국인 친구가 마련해준 관속에 누워 입항했다. 그리고 1919년 12월 28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은 1921년 9월 워싱턴 군비축소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상해 임정은 그의 외교 위주의 독립운동에 불만을 보이며 1925년 임시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했다.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제네바로 갔으며 여기에서 프란체스카 도너를 만났다. 이들은 1934년 10월 뉴욕에서 혼인했다. 이승만이 59세 때였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일본내막기’를 저술 출판했다. 1941년에 나온 이 책은 아시아를 침략한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책이 나왔을 때는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그해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의 예언은 적중했고 그는 명성을 얻었다.

 

일본이 패망했으나 이승만은 광복 한국의 지도자로 예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견제를 받아 개인 자격으로 1945년 10월 16일 환국했다. 망명 33년만이었다.

 

▶ 탁월한 정치지도자

 

그가 귀국하기 직전 조선인민공화국은 조각을 발표,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귀국한 이승만은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거부하고 임시정부를 우리 정부로 지지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을 매국노로 규정하여 결별을 선언했다.

 

이승만은 미군정청 최고 자문기구인 남조선민주의원의 의장을 맡았다. 부의장은 김구와 김규식이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남한임시정부 수립과 민족주의 통일기관 설치를 주장했다. 다음 해 초 다시 미국으로 간 이승만은 북한에서의 소련군의 활동을 알리고 남한에서의 군사훈련 필요성을 강조했다. 귀국한 이승만은 돌연 하지 중장에게 미 군정과 협조 포기를 선언했다. 미국과 계속 갈등을 빚은 것이다.

 

 

찬탁, 반탁 투쟁을 거쳐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서울 종로 을구에서 출마한 이승만은 당선되어 제헌국회의 초대 의장에 선출됐다. 국회의장 이승만은 대한민국 제헌헌법에 서명, 헌법을 발효시켰다. 국회에서 뽑은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가 나와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남한의 단독정부로 출범하는 시기, 우익을 대표하는 유일한 지도자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법률 제1호로 공포한 대통령식령에 대한민국 30년이라고 밝혀 새정부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었음을 선언했다.

 

북쪽의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기습 남침을 감행했고 대한민국은 출범 2년도 안돼 시련에 직면했다. 이승만의 탁월한 정치력은 전쟁중에 발휘됐다. 전쟁 전에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공산주의의 발호를 막았고 미국을 비롯한 유엔을 참전시켜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전쟁중에서도 대학생들의 징집을 연기해줬다. 이런 교육정신은 전후 나라를 복구하는데 큰 힘이 됐다. 휴전에 끝까지 반대했던 이승만은 북한반공포로 2만 7천명을 석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는가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 내는 성과를 올렸다.

 

전화로 폐허가 된 국토의 재건에 나섰으나 이승만은 주변의 아첨배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노욕에 빠져 끝내 ‘독재자’로 평가 받기에 이르고, 결국은 4·19를 촉발했다.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승만은 하와이로 본의 아닌 망명길에 올랐고 생전에는 다시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서거했다. 거대했던 이승만의 일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였다.

 

(서희건 / 조선일보 논설위원·국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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