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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 평론가’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

풍월 사선암 2010. 8. 14. 10:29

[조선인터뷰] ‘전통주 평론가’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

 

“맥주는 冷, 와인은 산도 높아 속에 부담… 막걸리야말로 착한 술”

침전물 잘 흔들어 마셔야 막걸리 효능 살릴 수 있어 스포츠음료로도 가능성

와인으로 외국인 접대 무슨 큰 감흥 있겠나? 막걸리와 이야기 내놓자

일본의 도전은 좋은 자극 해외판매량 따지기보다 문화 실어내는데 초점을

 

"우리 막걸리와 일본 탁주, 어떤 미각 차이가 있을까요? 우리 술의 깊은 맛엔 무슨 비법이 깃든 걸까요?” 서울 종로구 국립서울과학관 옆에 위치한 막걸리학교에서 ‘(전통)술 평론가’인 이 학교 허시명(許時銘·49) 교장이 수강생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 공책에 적고 카메라로 찍어 가며 수업에 빠져든 학생들 중엔 TV 프로그램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 중인 따루 살미넨(핀란드)도 보인다.

 

막걸리학교는 전통술 기행서적을 잇달아 내며 필명(筆名)을 더해가던 허씨가 막걸리를 직접 빚고 음미하면서 고유문화를 이해하자는 취지에서 지난해 10월 만든 학교(10주 과정, 40명 정원)다. 지난 5일 허씨가 마지막 수업을 한 제5기 강좌는 수강신청 2분 만에 선착순 마감됐다고 한다.

 

낮밤을 술로 살며 우리 술문화를 설파하는 허씨는 막걸리를 두고 우리 문화를 참되게 구현한, 한국을 가장 잘 이해시킬 고혹적인 술이라고 예찬했다.

 

 허시명 술 평론가는 술을 빚는 일은 혼과 인내를 담아내는 신성한 의식이라고 했다. 숱한 지역주를 탐미해 본 그는 마시면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게 된다는 한산 소곡주, 기교를 부리지 않은 해남 진양주를 특히 좋아하는 술로 꼽았다.

 

―어떻게 막걸리학교를 세울 생각을 했습니까?

 

"막걸리와 함께 살고 연구하면서 그 뿌리와 문화를 알리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명륜동에 자그마한 공간을 빌려 시작했지요. 생각보다 반향이 커 외국인이나 재미교포도 강의를 들었고, 재일교포 중 오로지 이 수업을 들으려 한일 양국을 왕래한 이도 있었어요. 초기엔 정년을 앞둔 귀농희망자가 많았고, 요즘엔 20~30대가 늘었어요. 막걸리 관련 창업에 일찍 눈뜬 젊은이가 많아진 것 같습니다. 양조업자·요리사·대학교수도 수업을 들었죠."

 

―막걸리는 어떤 술입니까?

 

"대단히 한국적인,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술입니다. 소주와는 비할 수 없이 부드럽죠. 알코올 도수가 비슷한 맥주·와인보다도 확실히 우월합니다. 보리는 겨울을 견뎌 냉한 곡식인 반면 쌀은 여름을 통과해 따뜻하지요. 포도주는 산도(酸度) 탓에 많이 마시면 속이 깎이는 느낌이 들고."

 

―그래도 골치 아프고 가스 차는 술로 저평가돼 왔습니다.

 

"전통 막걸리는 멥쌀과 밀누룩으로 만들었는데, 1960년대 들어 입국(粒麴·찐 밀가루에 백국균을 배양한 일본식 누룩)과 밀가루를 재료로 사용해 시금털털해졌죠. 1990년대 쌀이 주원료로 복귀하면서 맛이 경쾌해졌고, 기술 진보와 함께 우리 유기농 쌀을 재료로 만드는 등 다양한 시도가 더해졌죠. 생막걸리엔 효모·유산균이 살아 있고, 암·심장질환·고혈압·당뇨에 좋다는 학계 보고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막걸리의 효능은 침전물인 지게미에 많이 포함돼 있어, 잘 흔들어 마시지 않으면 금광에 들어가 동굴 구경만 하는 셈이죠."

 

―막걸리 바람이 스스로의 삶을 많이 변화시켰죠?

 

"작년 여름을 전후해 막걸리 바람이 인 뒤로 찾는 곳이 많아져 제 시간을 제 맘껏 못 쓸 지경이에요. 삶이 꼬여버린 거죠.(웃음)”

 

―전통술에 관심을 두어 ‘술이 곧 삶’이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술 기행 취재를 1999년 시작했어요. 인생을 걸고 고집스레 일하는 장인(匠人)들에게서 삶의 진솔한 모습을 좀 더 깊이 관찰하고 싶어졌어요."

 

―명장들이 빚는 술은 어디가 다르던가요?

 

"발효주는 절정의 시기가 있는데 절정을 구가할 방식을 늘 고민합니다. 경주 교동법주 배영신 할머니, 청양 구기주 임영순 할머니는 어떻게 하면 몸에 좋은 술을 빚을까 모성(母性)을 담아 만듭니다. 문경 호산춘 황규욱 선생은 선비 집안의 위대한 유산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주목합니다. 사찰에서 웬 술이냐고 하겠지만, 전주 모악산 벽암 스님은 금기를 허물지 않은 삶의 쪽문으로서, 몸이 냉해진 선승(禪僧)을 덥히기 위해 사찰주를 만듭니다. 그들을 통해 술과 삶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정의를 맞게 됩니다."

 

―술 유랑을 통한 저술을 업으로 삼겠다는 결정이 쉬웠나요?

 

"술 전문가가 되겠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고, 이 일이 직업으로 분류될 것도 아니죠. 재미삼아 한 게 견문이 쌓여 갔어요. 인생계획에 없던 거지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세상을 얘기했고 타인들이 거기에 귀를 기울여 주니 공을 더 쏟았죠."

 

―술 평론이 밥벌이가 됩니까?

 

"하하, 책 쓰고 강연해서 번 돈으로 그럭저럭 여기까지 왔어요."

 

―홀로 하는 유람이라 회의(懷疑)가 들 법한데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정성껏 술을 빚는 이들에게서 진솔한 사연을 듣고 행복감을 누리는 과정이었어요. 제가 설계해 실천하는 삶이었고요."

 

―그전엔 기자로 일했죠?

 

"월간 ‘샘이깊은물’ 기자였는데 노조위원장으로서 편집권 참여를 놓고 경영진과 다투다 그만뒀어요. 하지만 문화예술계 큰 봉우리였던 한창기(1937~97) 당시 발행인에 대해 아직도 감사하고 있어요. 작은 것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각, 전통문화와 분석적인 언어를 가르친 분이죠."

 

―막걸리는 ‘착한 술’이라고도 말했던데.

 

"한민족이 알코올 도수 6~8도 음료를 폭넓게 마신다는 건 자부할 만한 일입니다. 중국·일본 술이 날카로운 건 이웃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소지하기 편하고 희석해 먹을 수 있는 센 술을 선호한 탓입니다. 그들의 술이 군수품이라면, 우리 술은 농기구 같은 것이죠. 우리는 술을 무기화시키지 않고 노동의 벗이자 농사 밑바탕으로 썼고, 그래서 도작(稻作)문화권임을 상징할 착한 술이란 뜻입니다. 발효과학과 장인의 집념이 담겼고요."

 

―더 보탤 찬사가 있나요?

 

"그럼요. 막걸리 빚는 데 최소 일주일이 걸립니다. 누군가를 위해 혼을 싣고 기다림을 얹는 거죠. 누구와 언제 어떻게 마시겠다는 궁리야말로 대단히 즐겁고 흥미로운 상상이고 인내가 필요한 신성한 의식이죠."

 

―막걸리 열풍엔 일본 관광객이 한몫했다고 합니다만.

 

"단초를 제공한 여러 원인 중 하나였죠. 우리 술에 대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지지를 보낸 건 처음이고요. 막걸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사유할 계기를 줬습니다. 진정한 국민주는 무언가, 우리 조상은 어떤 막걸리를 마셨나부터 안주를 포함한 우리 식생활과 술에 대한 예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민과 과제를 던졌어요."

 

―일본의 막걸리 시장 진출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음식과 문화는 향유하는 사람들 것이지, 국적을 묻고 누가 시작했냐 따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는 800개 양조장이 전국에 고르게 퍼져 있어요. 일본 제품이 늘더라도 우리 제품을 해외로 더 진출시켜 월등함을 입증하면 되니까요. 기술적 자부심과 앞서가려는 노력이 있으면 우리 술은 더 풍성해질 겁니다."

 

―몇몇 대형할인점에서 특정 막걸리 제품만 파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쌀로 빚은 막걸리만 팔겠다는 정책 때문인데, 사실 막걸리는 우리 쌀로 만들어야 진정한 우리 것이라 할 수 있죠."

 

―막걸리의 세계화는 가능할까요?

 

"세계화엔 함정이 있다고 봐요. 술은 문화와 함께 걸음을 떼야 하는 문화상품이에요. 일본청주만 해도 스시와 곁들여 먹는, 대접받는 느낌을 주는 비싼 술이잖아요. 판매·유통·소비량을 따지는 건 허튼 일이고, 문화를 어떻게 실어내는가가 중요한 거죠. 세방화, 즉 세계화와 지방화를 함께 생각해야 해요. 외국 포도주 농장(winery)이 그렇듯 지역 양조장이 자기 색깔과 경쟁력을 갖고 살아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해요."

 

―구체적인 세계화 전략을 말한다면….

 

"고급화가 필요합니다. 1000만원짜리 와인도 있는데 명품(선물용) 막걸리를 못 만들 이유가 없어요. 술에 취하고 싶지만, 도도한 명품에도 취하고픈 게 사람이니까요. 우리 자존심을 대변할 고급 막걸리가 열 가지쯤 나왔으면 합니다. 막걸리는 순해서 스포츠음료로서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런 이미지 마케팅이 필요하고요. 술에 주안상 딸리듯 한식(韓食) 세계화 하고도 같이 가야죠."

 

―지역 막걸리마다 인기 비결이 따로 있겠죠?

 

“달콤한 포천막걸리는 깨끗한 물과 항아리에 담근다는 점, 구수한 금정산성막걸리는 전통누룩을 완전 숙성시킨다는 점, 텁텁함이 없는 장수막걸리는 충분한 발효와 배합(쌀 90% 대 올리고당 10%)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싸구려 술’ 이미지가 여전합니다.

 

"일회용 페트병에 담겨 있어 더 그렇죠. 영세 제조장에서 만들어 상표·유통관리 문제도 있고요. 대기업들이 막걸리 산업에 들어와 경쟁하면서 그 문제는 개선될 겁니다. 실제 제조원가(한 병 기준)를 따지면 막걸리가 790원(750mL)으로, 소주(438원·360mL)나 맥주(503원·500mL)보다 비쌉니다."

 

―막걸리 말고 국제경쟁력을 갖춘 다른 전통주도 있겠죠?

 

"복분자주는 빛깔이 와인보다 곱고 맛이 순하고 몸에 좋으니까 저력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와인을 알아야 문화인·지식인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와인은 구대륙 또는 신대륙 것이냐, 몇년 산(産)이냐부터 시작해 마시는 에티켓과 잔 모양까지 따질 게 많지요. 가장 치명적인 것은 우리 문화가 들어 있지 않다는 점이죠. 남의 역사는 줄줄 꿰면서 전통술에 대해선 한마디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인터뷰를 막 마친 허 교장이 강의를 하려고 교탁 앞에 섰다. 한 수강생이 ‘지난달 삼성그룹 사장단 회의에 강사로 초빙돼 무슨 얘기를 했나’ 하고 질문했다. “수요 오찬 주제가 ‘막걸리의 현대화와 글로벌화’였어요. ‘고가의 와인·위스키로 외국 바이어(buyer)를 접대해 봤자 무슨 감흥을 주겠는가, 막걸리를 내놓고 자신의 젊은 시절과 한국문화를 얘기하면 우리 상품을 더 팔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했어요."

 

허시명 교장은…

 

술 기행작가이자 술 평론가이며, 한국여행작가협회장, 막걸리학교장, 명지대·배화여대 강사로 활동 중이다. 1961년 여수 평도 출생으로 광주 조선대부고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93년 월간지 ‘샘이깊은물’ 기자, 94~97년 편집회사 ‘이야기꽃’ 대표를 지냈다. 1999년부터 전국을 돌며 지역 전통주를 탐찰하면서 우리 술과 술 빚는 장인에 매료됐다. 2005년 히로시마 일본주류총합연구소(4개월 연구생 과정), 2006~08년 중앙대 대학원(민속학 석사과정 수료)에서 술을 천착했다. ‘막걸리, 넌 누구냐’ ‘허시명의 주당천리’ ‘비주(??酒), 숨겨진 우리술을 찾아서’ ‘풍경이 있는 우리술 기행’ 같은 저서를 냈다. 국세청 주류품질인증 심사위원, 농림수산식품부 전통주품평회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 업무상 자주는 마셔도 양은 절제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