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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 김수로

풍월 사선암 2010. 7. 14. 20:35


 
가야국 김수로

 

 

김수로(金首露)는 A.D. 42년, 다른 다섯 명의 아이와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 아직 나라의 이름이 있지 않았고 임금과 신하의 호칭 또한 없었던 곳에서 A.D. 44년 가야를 세웠다.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은 멀리 아유타국(阿踰陀國)에서 왔는데, 부부가 합심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신라와 백제 그리고 일본인까지 드나드는 요충지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의 역사는 지금 자세히 전해지지 않으나, 김수로를 시조로 하는 김해 김(金)씨는 현재 전국적으로 400만의 인구를 헤아린다.

 

400만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郞)가 한국을 처음 찾은 것은 그의 나이 49세 때인 1971년이었다. 대표작 [언덕 위의 구름]이 연재를 끝내갈 무렵이었다. 언제까지나 의문으로 남아 있던, 과연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원류를 찾아 본격적인 첫 발걸음을 뗀 것이었다. 그가 이른 곳은 한국의 김해였다.

 

이 김해라는 땅은 우리 일본인에게는 가락(駕洛), 가야(伽倻), 가라(加羅)라는 땅으로 감회 어린 곳이지만, 한국에서는 ‘김해 김씨’라는 것으로 특별한 땅이다. 한국의 성(姓)은 각각 본관의 지역이 있다. 성의 고향이다. 예를 들어 김(金)이라는 성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성의 하나인데, 아마도 5백만 명 이상은 김씨이리라. 그 김씨에도 여러 유파가 있고, 수많은 본관으로 나뉜다. (…) 요컨대 몇 종류인가 있는 김씨의 본관 가운데 김해 김씨가 있고, 이 김해 김의 일족(이라 불리기에는 수백만의 인구이므로 규모가 너무 크지만)의 원조(遠祖)는 누구인가 하면, 가락국 김수로(金首露)라는 사람이다.

 

시바는 김해에서 일본인의 원류 가운데 하나를 보고 싶었다. 김해 곧 옛날의 가야가 왜 일본인에게 감회 어린 곳인가. 그것은 일본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과 관련이 있다. 서기 4세기 이전, 김해 지역은 고대 일본 왕국에 의해 식민통치를 받던 곳이며, 그때의 이름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 그것도 일부 학자의 잠꼬대 같은 주장에 불과하다. 사실 이때라면 일본에서는 고대 왕국조차 성립되지 않았다. 제 나라도 없는 형편에 무슨 식민지 경영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다만 가야 일대에 일본인이 모여들고, 가야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던 것만은 확실하다.

 

시바는 이런 측면에서 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 열도에 아직 일본 국가가 성립되지 않았던 즈음, 매우 많은 왜(倭)인이 이곳을 왕래하여, 그 가운데는 정착하여 살게 된 자도 있고, 그보다도 더욱 수많은 가락국의 사람이 일본 지역에 와서 살았으며, 경작지를 열었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닌, 사람들이 각자 필요에 따라와서 산 곳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일본인의 원류를 이루는 한 흐름이라고 시바는 생각했다.

 

그런데 시바가 이곳에 이르러 뜻밖에 놀란 것은 한국인 가운데 ‘김해 김씨’라는 본관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기적으로 수로왕의 무덤을 찾아 유교식으로 제사 지내는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현재 김해 김씨는 4백만 명으로 추산된다. 역사적으로 이름을 더욱 크게 날린 왕을 선조로 가진 일족보다, 사라진 왕국 가야의 시조 김수로의 후손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김해가 가진 지리적인 특성, 수로의 후손이 지닌 끈끈한 단결력 같은 것이 합하여 이뤄낸 결과는 아닐까. 이런 의문과 놀라움 속에 김수로의 행적을 찾아 떠나 보자.

 

김해에는 수로왕릉을 비롯하여 구지봉, 수로왕비릉 등 가야의 유적이 많다.

 

삼국유사가 전하는 수로왕의 탄생 설화

 

오늘날 가야의 존재를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 [삼국유사]에만 실려 있다. ‘기이’ 편의 ‘다섯 가야’, ‘가락국기’ 그리고 ‘탑상’ 편의 ‘금관성 바사석탑’, ‘어산불영’ 조가 그렇다. [삼국사기]가 겨우 한두 줄, 그것도 다른 기록에 살짝 끼워져 희미하게 가야를 전해주고 있는데 비해 참으로 풍성하다. 이는 우리가 [삼국유사]의 장점으로 꼽는 가운데 하나이다.

 

다만 ‘다섯 가야’와 ‘어산불영’ 조는 아주 간단한 기록이다. 이에 비해 ‘가락국기’와 ‘금관성 바사석탑’ 조는 사라진 가야사(史)를 복원하는 데 절대적인 기록이다. 특히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 왕조 때(1075~1084)에 금관주(州)의 지사에게 딸린 문인이 지은 것이다. 이제 간략하게 싣는다.”는 일연의 주석으로 보아, 가야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사라진 왕국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로는 A.D. 42년 3월, 세상에 태어났다. “하늘이 열린 다음 이 땅에는 아직 나라의 이름이 있지 않았고 임금과 신하의 호칭 또한 없었다. 다만 9간이 있었는데, 그들이 추장으로서 백성을 통솔했다. 모두 1백 호에 7만 5천 명이었다.”는 소개가 있은 다음, 그들이 사는 북쪽 구지(龜旨)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2~3백 명의 무리가 그곳에 모여드는 것으로 탄생의 장면은 시작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구지가(龜旨歌)>라는 노래가 나온다.

 

“하늘에서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내려가 나라를 새롭게 하고 임금이 되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봉우리 위의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 머리를 내밀어라 / 내밀지 않으면 / 구워서 먹을 테다’라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가락국기’에서)

 

이 같은 장면에는 고대사회에서 왕을 맞이하는 전형적인 요소가 다 갖추어져 있다. 일종의 민간신앙적인 의식의 형태인데, 천명(天命)사상과 노동과 협업이 어우러진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다. 얼마 뒤에 공중을 쳐다보았더니, 붉은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드리워졌다. 그 줄의 끝에 붉은 보자기로 싼 금합이 나타났는데, 열어보니 해같이 둥근 황금알 여섯 개가 들어 있었다. 이튿날 아침, 금합을 열자 여섯 개의 알들이 사내아이로 변화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헌칠했다. 그 가운데 수로왕은 열닷새가 지나자 키가 9척이나 되어, ‘처음 나타났다’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 지었고, 그가 만든 나라를 가야국이라 불렀다. 나머지 다섯 알에서 태어난 아이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이때가 A.D. 44년이었다.

 

수로의 탄생은 알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혁거세나 주몽과 같지만, 한꺼번에 여섯 개가 나타나고 그들이 여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이는 아마도 일국 체제의 강력한 왕권이 아닌, 가야가 연합체의 성격을 띤 나라였음을 말하는 것 같다. 수로왕은 궁궐과 청사를 짓는데도 백성이 한가한 틈을 기다렸다 지었다. 그만큼 어진 이였음을 나타내는 삽화이다.

 

먼 바다를 건너온 여인을 왕비로 얻고, 어진 정치를 펼치다

 

◀ 비사석탑(파사석탑)은 수로왕비 허황옥이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기위해 싣고 왔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있다.

 

수로가 왕위에 오른 지 4년 뒤였다. 왕은 자신의 배필이 먼 길을 지나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신하들이 결혼을 권유해도 잠자코 있었다. 드디어 A.D. 48년 7월, 바다 서남쪽으로부터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북쪽을 향해 왔다. 배에서 내린 어여쁜 여인이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께 예물로 드렸다. 수로의 왕비 허황옥의 등장이다.

 

그러자 왕이 나와 맞아 함께 장막 안으로 들어갔으며, 왕비는 자신이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임을 밝힌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꿈을 꾸었는데, ‘가락국의 임금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 왕위에 오르게 한 자이니 그야말로 신성한 사람이요, 게다가 새로 임금이 되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공주를 보내 그의 배필을 삼으라’는 하늘님의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아유타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체로 인도의 한 지방에 실재한 나라로 보고 있는데, 중국의 남부지방까지 진출해 있어서, 한반도의 남쪽 바다에 접한 가야와 교류를 할 수 있었다고 본다.

 

왕비가 먼바다를 건너온 경위에 대해서는 ‘금관성 바사석탑’ 조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금관성의 호계사라는 절에 있는 석탑에 대해 일연은 다음과 같이 썼다. 처음에 허황옥이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나가 동쪽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파도 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아뢰자, 아버지는 이 탑을 싣고 가라 하였다는 것이다. 과연 제대로 건너와 남쪽 언덕에 와서 정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일연 자신도 약간의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때까지 우리나라에는 절을 짓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연은 이 절을 찾아 탑을 직접 보고 ‘네모나게 4면이요 5층인데, 조각한 모양새가 매우 기이하다. 돌에는 엷게 붉은색 반점이 있고, 바탕이 아주 부드럽다. 이 지역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은 거의 본디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문드러졌지만, 일연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 원형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결혼을 한 다음 수로왕의 활약은 더 빛났다. 추장인 9간의 이름을 고치고, 신라의 직제를 따라 각간, 아간, 급간 등의 계급을 두고, 그 아래 관리들에게는 주(周)나라나 한(漢)나라의 관제를 따다가 나눠 정했다. 그런 다음의 모습을 ‘가락국기’에서는,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으면서도 저절로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특히 왕비와 무척 금실(琴瑟)이 좋았음을 빼놓지 않았는데, ‘마치 하늘에 땅이 있고 해에 달이 있으며 양에 음이 있는 것과 같았다’고 말한다.

 

백성에게 사랑을 받던 수로왕, 158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수로왕과 관련된 두 가지 중요한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신라 제4대 탈해왕과 관련된 것이다. 탈해는 가야로 쳐들어와 수로왕에게 왕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바, 그것은 아주 재미있는 변신 담으로 남아 있다. 탈해가 변해 매가 되자, 왕이 변해 독수리가 되었다. 또 탈해가 참새로 변하자, 왕은 새매로 변했다. 탈해가 본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 또한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수로의 승리였다. 탈해는 “내가 목숨을 보전한 것은 죽이기를 싫어하는 성인의 어진 마음 때문이었습니다.”며 곧 절하고 나가버렸다. 매우 드물게 보는 변신 담인데, 가야인에게는 수로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이 같은 이야기가 사실처럼 전해 왔던 것이다.

 

또 하나는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이다. 해마다 7월 29일이 되면, 이 고장 백성들과 아전∙군졸들이 승점에 올라 천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베풀며 환호한다. 승점은 처음에 허황옥이 도착한 곳이다. 그들이 동서쪽으로 눈짓하면 건장한 인부들이 좌우로 나뉘어서, 바다로부터 말을 타고 육지를 향해 급히 달리고, 뱃머리를 둥둥 띄워 물 위로 서로 밀면서 북쪽으로 포구를 향해 다퉈 달린다. 이 놀이는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신하들이 급히 왕에게 알렸던 흔적이 남은 것이다. 수로왕과 왕비는 백성에게 이런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현재 이곳에서는 이 놀이가 전승되지 않는다.

 

수로왕과 왕비에게도 최후가 다가왔다. 왕비는 A.D. 189년 3월 1일에, 누린 나이 157세로 세상을 마쳤다.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으며, 왕은 늘 베개 위에서 홀아비의 슬픔을 노래하며 오랫동안 탄식하였다. 10년이 지난 A.D. 199년 3월 23일, 왕은 누린 나이 158세로 세상을 떴다. 그러고 보니 수로왕은 9년 연상의 여성과 살았던 것이다. 지금 수로왕릉은 김해시 서상동에 있으며, 김해 김씨 후손들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