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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景福宮)의 역사

풍월 사선암 2010. 6. 5. 14:56

경복궁(景福宮)의 역사

 

경복궁은 1392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에 의해 세워진(만들어진) 첫 궁궐이다.

 

조선왕조의 법궁(法宮)으로서 개국공신 정도전으로 하여금 <시경(詩經)> 주아편의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에 큰 복(景福)을 누리리라’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궁궐의 이름을 경복(景福)이라 정하게 했다고 한다.

 

한때, 이방원 (태조의 5번째 아들 - 후에 태종)주도의 왕자의 난으로 조선 2대왕 정종(태조 2째 아들) 등극 및 정종의 개경환도로 잠시 경복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으나, 3대 태종의 한양 재환도와 4대 세종의 즉위를 기점으로 법궁으로 써 제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3대 임금인 태종의 한양환도 때에 또 다른 궁궐인 창덕궁이 제2의 궁궐로 창건되어 궁궐이 2개로 늘어났으며, 그 후 9대 성종 조에 이르러 창경궁이 중건되니 궁궐의 수가 3개로 늘어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궁궐의 수가 늘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명실상부한 「제1의 궁궐」로 통치자의 권위의 상징이자 국권의 중심부로 역사의 표면에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그 후 창덕궁, 창경궁은 복구되나 경복궁만은 273년간 재건되지 못한 채 빈 터로만 남아있다가 1865년(고종2)에 흥선대원군 주도로 중건에 착수, 1868년(고종5)에 다시 복원됨으로써 왕조의 법궁으로 써 면모를 되찾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극의 시작을 알리는 1895년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왕비살해)이 일어나고 이듬해인 1896년(고종33)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이동, 1897년 경운궁(덕수궁) 에 기거하시니 주인 없는 집은 그 의미를 잃듯이 경복궁 역시 빛을 잃게 된다. 그 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궁궐은 크게 훼손되어 고종중건 당시의 10%정도의 전각만이 남게 되는 비운을 겪으며 공원화 되는 위기를 극복하고 현재 장기복원 계획에 의해 본래 모습을 되찾는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은 사적117호로 종로구 세종로 1-56 번지에 위치, 규모는 연 면적 약 127,000평 (416,990㎡)에 이르며, 궁궐 내에 근정전, 경회루의 국보와 자경전, 아미산 굴뚝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광화문

 

경복궁의 정문(正門)이자, 국권(國權)이 드나드는 왕권의 상징성을 갖는 문이기도 하다. 창건초기에는 오문(午門)  이라 칭하다가 세종 조에 이르러 동서남북 4방위의 문들이 각각 이름이 붙여져 오문(남문을 뜻함)은 광화문으로 명명되는데 의미는『빛이 나라밖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光被四表化及萬方)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 광화문도 수난을 많이 당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신축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철거당하여 건춘문(동쪽문) 북쪽으로 이전 되었다가 1968년에 현 위치로 자리 잡게 되는데 본 위치에서 약15m 가량 뒤로 물러나게 되고 문루(문의 상부)는 6.25동란에 소실되는 아픔도 간직하고 있으며, 3개의 홍예(아치)가 아름다움과 권위를 겸비한 조선궁궐의 정문이다.

 

흥례문

 

이 문은 본디 홍례문이라 했는데 고종 중건때 흥례문으로 바뀌었고 궁궐 내로 들어가는 두 번째 문이다.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좌우공간은 궁궐을 지키는 군사들을 위한 관청 및 부속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기타 궁궐 내 작은 행사나 큰 행사의 준비가 이루어졌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과거 일제에 의한 조선역사 말살과 왜곡의 희생지는 1차로 이 지역에서 단행되어 이곳에 「조선 총독부」건물이 지어졌다.

 

그런 연후 궁궐의 중심부를 시야에서 차단하여 역사의 관념을 지워 버리려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그 옛 모습으로 근간에 복원되어 중심축을 이루니 궁궐의 본래 모습이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

 

간혹, 역사의식 없이 구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미련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궁궐은 ‘건축’만을 감상하는 곳이기 보다 "역사를 음미하는" 장소임을 생각해주시기를 바란다.

 

영제교

 

흥례문을 들어서 근정전으로 나아가기 전 또 하나의 통과례를 거치는 곳. 일반사회의 공간에서 지엄하신 공간으로의 이동은 무언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곳은 서에서 동으로 금천(禁川)이  흐르고 다리가 놓이는데 바로 영제교라 한다. 금천의 의미는 잡스러운 것이 함부로 근접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되며 이는 마치 사찰을 방문할 때 중생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경계짓는 상징물과 같다.

 

금천에 흐르는 물은 명당수라 칭하며 행여 사악한 것이 물줄기를 타고 접근할 새라 파수꾼의 역할을 하는 서수가 영제교를 중심으로 네 마리가 버티고 있다. 또한 영제교 위에도 네 마리의 서수가 있어 다리를 건너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언행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여러분도 이러한 상징물들의 의미를 헤아려보면서 조선조 궁궐을 드나들던 관리들처럼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영제교를 건너보신다면...

 

근정문, 근정전

 

궁궐(宮闕)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그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며 그 외 나라를 다스리는 곳, 즉 통치를 하는 공적인 공간이다.

 

근정전은 이 공적인 공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국가적 큰 행사로, 조하(朝賀)라고 해서 군신간에 연초 하례가 있고 조회(朝會), 즉위식(卽位式), 책봉례(冊封禮), 고급관리 임용식, 사신영접(중국) 등 국가의 대사가 행하여졌다.

 

중심건물인 근정전은 궁궐 내 가장 높은 건물로 상, 하 월대와 돌난간을 두루고 난간의 모퉁이에는 12지신상 및 방위신상의 서수를 조각하여 위용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해 놓았다.

 

그 외에 답도, 드므, 정, 품계석, 박석, 근정전내 어좌, 보개, 일월오봉병 등 보고 느끼고 생각할 것이 많은 조선조의 조정이 있는 곳이다.

 

사정전

 

근정전이 큰 행사의 공간이라면 사정전 권역은 구체적 통치행위가 이루어진 실질적 업무공간이다. 이곳에는 두 개의 부속건물도 자리하는데 동쪽에는 만춘전, 서쪽에는 천추전이 있으며 두 부속건물은 아궁이가 있어 난방이 가능하나 중심건물 사정전은 마루로 되어 있어 계절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였나 보다.

 

사정전은 생각 思, 정치할 政, 곧 만백성을 생각해 가면서 어진 정치를 행하여 달라는 염원을 담아내고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인 유교적 도덕률을 엿볼 수 있는데 근정전도 근면한 마음으로 정치를 행해 달라는 의미와 연관된다. 조선의 군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폭군이 아니라 따뜻한 어버이이기를 바랬다.

 

수정전, 궐내각사

 

현재 수정전은 고종 때 중수한 것으로 고종의 집무실(편전), 개혁 기구인 군국기무처, 내각청사, 일제의 물산공진회 때는 전시관으로 1960년대에는 민속관, 전시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조선 전기로 올라가면 역사적 유래가 의미심장한 곳이다.

 

세종연간에 집현전이 있던 곳. 한글창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며 당시 엘리트 집단의 근무처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궁궐 내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를 궐내각사라고 한다.

 

지금은 그 건물들의 자취를 느낄 수 없으므로 궁궐기능이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데 현재 잔디와 나무로 단장되어 있는 공간이 과거엔 관청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궁궐은 잔디와 나무가 아무 곳에나 있지 않았으며, 공원 놀이마당 정원 같은 곳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유념하길 바란다.


경회루

 

경복궁을 찾는 모든 관람객이 최고로 여기는 장소 중 하나이다.

 

웅장하고, 늠름한 자태의 경회루를 바라보면 조선건축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만다. 현재도 그러하거니와 과거에는 더욱더 경외의 대상이었다. 바로 앞 궐내각사에 근무하던 관리들도 높은 담장으로 막혀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던 왕실전용 연회의 공간이자 사신 접대의 장소인 경회루. 1, 2층 기둥의 재료와 그 모양새, 천원지방(天圓地方)과 주역원리(周易原理)의 동양사상을 표현한 건축술, 또 인공섬 세 개를 만들어 봉래, 방장, 영주라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화한 의미 있는 구도, 동양 제일의 누마루 집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건축미를 자랑한다.

 

또한, 실용성을 도입한 경회루 3개다리의 배치, 지붕 잡상의 궁궐 내 최다 배열 등 어느 하나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곳이 이곳이다.

<국보 제224호로 지정>

 

강녕전

 

강녕전은 내전의 왕의 침전(寢殿)으로 부르지만, '왕의 일상적 생활 및 업무공간'이라고 넓게 보아야 한다. 침소는 물론 이려니와 대신들과 일상 업무를 보는 집무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연회를 베풀기도 했으며, 왕실 가족들과 월대를 중심으로 가설무대를 설치하여 궁중가무 등을 관람하기도 했다.

 

강녕은 <서경>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인 강녕(康寧)에서 유래되었는데 건강하시라는 뜻이다.

 

현재 강녕전을 중심으로 부속건물은 동쪽에 연생전과 연길당이 서쪽에 경성전과 응지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건물들은 1995년도에 복원된 것으로 교태전과 함께 멀쩡했던 본래의 건물이 헐려져 창덕궁으로 옮겨진 역사적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용마루가 없는 지붕의 건축양식이다. 경복궁뿐만 아니라 다른 궁궐에도 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용마루를 두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왕이 주무실 때 하늘의 기운을 받아야 하는데 용마루를 천기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생각한건 아닌지 추정해본다.

 

교태전과 아미산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중궁전(中宮殿), 곤전(坤殿)이라고도 한다. 궁궐에서도 가장 깊숙한 중심부에 위치해 구중궁궐이라 부른다.

 

왕비도 공식적인 업무가 많았는데 이를테면 내, 외명부 총괄, 친잠례 등 주요업무와 왕의 공식적 수행업무를 보필하는 왕비의 공식적 업무도 상당했다(혼례, 제사 등). 따라서 교태전은 왕비의 공식 집무실도 겸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음(陰)과 양(陽)이 화합하고 교통하는 주역(周易)의 원리를 통해 설명되는 "태(泰)괘"를 빌려 왕조의 법통을 생산하고 이어주는 왕비의 역할을 사상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왕비는 국모로 대접을 받고 있었으나 유교적 관습으로 행동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그래서 그에 대한 위로의 공간인지 작은 동산과 꽃 계단이 아미산이라 하여 곱게 꾸며졌다. 조형예술을 발휘한 굴뚝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자경전

 

경복궁 남북 중앙 중심축에서 약간 동쪽으로 벗어나 위치한다.

 

자경(慈慶)은 ‘자친(慈親)에게 경사가 이르기를 바란다’는 뜻을 의미하는 데 추존왕 익종의 비인 신정왕후 조대비(고종은 조대비의 양자로 왕위에 올랐음)가 오래 거처한 곳으로 유명하나 초기에는 고종의 편전으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의 특징은 한 건물 같으나 세 채(자경전, 청연루, 협경당)로 이어져 있으며 청연루는 여름을 위한 공간, 자경전*협경당은 난방을 하는 일상공간으로 구성되며 기능적으로 보면 생활공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내, 외전의 엄격한 좌우대칭형 건물구조에서 기능성이 동원되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뒤뜰에는 십장생굴뚝이 있는데 다산, 다복, 건강,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등의 상징물로 장식하여 대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서쪽 담장밖 꽃담은 매화, 천도, 모란, 석류, 국화, 대나무와 각종 문양, 전서체 글씨 등의 조형물로 단장하였다.

 

집경당, 함화당

 

교태전과 자경전을 둘러보고 경복궁 후면부에 위치한 향원정을 향할 때 넓은 공터와 나무숲을 지나게 되는데 이는 본디 공터가 아니었고 궁궐의 생활에 필요한 많은 건물들이 잇대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휑한 광경과 키 자란 나무들로 변해버려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궁궐이 훼손된 결과의 산물이다.

 

그 가운데 단청은 퇴색되고, 지붕은 높지 않으나 고풍스럽고 단아한 두 채의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집경당과 함화당이다.

 

물론 담장이나 건물의 출입문 등은 없어진 채지만 건물이 시사하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고종 경복궁 중건시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오래된 건물이라 하고 고 건물이 시대의 풍상을 겪으면 이렇게 변해가는구나 하는 것 외에 일제의 철저한 훼손과정 속에서 살아(?) 남은 점. 그것이 그들의 전시실, 관리실 용도의 결과라 하니 울컥하는 상념을 건드린다.

 

집옥재, 팔우정, 협길당

 

경복궁 북서쪽 담장 부근에 조금은 낯선 세 채의 건물이 보이는데 이들이 집옥재, 팔우정, 협길당이다.

 

처음에 창덕궁 함녕전 별당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나, 1888년 고종이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함께 옮겨졌고, 고종의 서재이면서 때론 외국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여 졌다고 전해온다. 먼발치로 보아야 하지만 집옥재는 지붕의 모양이 궁궐의 다른 건물과 색다르게 맞배지붕과 옆면의 벽돌형식이 특이하다. 단층 같이 보이지만 내부는 다락형식의 구조가 있어서 옆의 팔우정과 2층 복도모양으로 통로가 연결된다. 팔우정은 2층의 누각건물이고,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협길당 또한 집옥재를 중심으로 한 부속적인 기능의 건물로 봄이 타당하다.

 

향원정, 취향교

 

여기야말로 경복궁의 정원이요, 궁궐의 풍류를 이야기할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다. 조선 전기에도 이곳은 서현정, 취로정, 접송정 등 의 정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그래서 그런지 후기에 큰 못(池)을 만들어 정자를 지으니 바로 향원정이다. 연못 한 복판 둥근 섬 안에 2층의 육각형 누각 건물을 지으니 한 폭의 조형 예술품을 올려놓은 듯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확 트이는 정경이다.

 

그런데 향원정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현재 남쪽에 있지만 사실 본래의 다리가 아니다. 원래의 다리는 북쪽에 아치형의 취향교가 건청궁 터를 향하여 놓여져 있었는데 6*25 전란에 불에 타버려 그 아름다운 자태를 지금은 볼 수가 없다.

 

또한 향원정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가설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향원정 연못의 서북 모퉁이에는 열상진원이란 우물도 있어 연못의 수원이 되기도 한다.

 

자선당, 비현각

 

동궁이라는 말은 궁궐 중심에서 동쪽에 배치하면서 유래된 말로 춘궁(春宮) 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동궁마마"는 바로 세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다음 보위를 이을 세자의 공간이다. 동쪽은 해가 솟는 곳, 계절로는 새싹이 움트는 봄에 해당되니 장차 이 나라 백성과 왕조의 번성을 위해 좋은 정기를 마음껏 함양하시라는 염원의 공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세자와 세자빈이 거처하는 자선당(資善堂)은 침전이요, 비현각(丕顯閣)은 세자가 훌륭하신 스승을 모시고 소양을 연마하는 학문의 전당이다.

 

자선(資善)이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고, 비현(丕顯)이란 "크게 드러나다"라는 뜻이다. 조선 세종대에 동궁의 위상이 가장 중요하게 전해지는데 5대 임금 문종은 세자시절 이곳에서 20여년간을 머물렀다고 한다.

 

건청궁 터

 

향원정 뒤편 지금 넓다란 공터가 있는데 여기가 바로 건청궁이 있었던 자리이다. 그런데 건물은 간데 없고 허망한 공터만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여기서 건청궁의 역사적 배경을 짚어 보면 이러하다. 고종은 즉위 후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그늘아래서 그의 통치의지를 발휘하지 못하다가 즉위 10년이 되는 해 1873년 경복궁 내 작은 궁궐을 신축하면서 건청궁이라 하고 자립의 의지를 표명하는 계기가 된다. 그 후 고종과 왕비가 거처하는 주요 건물로 사용되다가 비운의 을미사변(1895. 8.<음> 일본인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바로 이 장소에서 겪게 된다. 그 후 1929년 일제 강점기에 박람회라는 미명하에 건청궁은 헐려지고 왜색풍의 정체 없는 건물이 들어서 미술관, 민속박물관 등으로 쓰여졌고 지금은 그것도 헐어내고 복원을 기다리는 상처가 서려있는 장소이다.

 

출처: 우리궁궐길라잡이   <Wang Jung Ki – 눈물속의 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