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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목사와 그의 생애

풍월 사선암 2009. 12. 26. 13:42

한경직목사와 그의 생애   

 

[ 1902.12.29 - 2000.04.19 ]   

그는 세계적으로 종교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템플턴상을 1992년에 수상하였는데 템플턴상 심사위원회는 한경직 목사의 공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인 영락교회의 설립자이며,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세계의 이목을 한국의 기독교 성장에로 집중하게 한 지도자이다. 한목사는 아마도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가장 뛰어난 목사일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많은 수의 장로 교회를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그리고 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선교사역을 펼쳐나간 선교의 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선교를 통해 수많은 기독교인을 양육하였을 뿐 아니라 여러 교육기관과 사회봉사기관을 설립하여 교육자로서 또 사회봉사자로서 사회복지에 기여하였으며, 국가의 위기시에는 우리 사회의 갈 길을 제시함으로써 사회 현실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그는 1902년 12월29일(음력)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그 지역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당시 이미 그곳에 세워진 자작교회와 초대 선교사의 한 분인 마포삼열 목사가 설립한 진광학교가 어린 한경직에게 기독교와 선진지식을 배우게 한 터전이 되었다. 진광학교를 졸업한 후 한경직 목사는 평북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집에서 가까운 평양숭실학교가 있었으나 애국자가 세운 학교에 가야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오산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하였고 당시에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오산학교는 청년 한경직에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 민족이 힘없이 외세에 억눌려 있었던 것은 과학적 지식이 뒤떨어진 때문이라고 판단한 그는 평양의 숭실대학에서 이과를 공부하였다. 숭실대학 시절에 그는 그 자신의 일생을 성직에 바칠 결심을 싸게 되었으며 또 그러한 길을 가는데 큰 도움을 받을 스승들을 만났다. 이승훈, 조만식, 마포삼열과 방위량선교사가 그들이었다.


청년 한경직의 학구열은 숭실대학에서의 면학만으로는 충족되지 않았으며 또 그를 아끼던 스승들도 온 힘을 기울여 그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유학생 한경직은 미국 켄사스주의 장로교계인 엠포리아 대학에서 인문계 공부를 시작하였다. 특히 역사, 철학,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 학교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후 계획대로 프린스톤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그가 평생동안 설교한 성서중심의 복음주의적 신학을 확립하였다. 프린스톤신학을 마친 후 그는 뜻하지 않은 병을 앓는다. 예일대학으로 가서 박사학위를 위한 공부를 계속하려던 그의 꿈은 그 당시에는 쉽사리 고칠 수 없었던 폐결핵으로 좌절되어 버린다. 뉴멕시코의 한 요양원에서 요양하는 동안 그는 개인적인 야망을 벗어 던지고. 목회와 봉사의 길을 택할 것을 서약한다. 이에 따라 그는 병이 치유되자 곧 귀국하여 민족에 대한 봉사를 시작한다.


선진 지식을 쌓은 한경직 목사는 교육을 통해 민족에 봉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그의 사상을 의심하여 그가 숭실대학의 교단에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목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첫 목회지는 신의주 제2교회였다.


이 교회에서 그는 교회가 하여야 할 전도사업, 교육사업, 봉사사업 등 세 가지 사업을 목표로 정하고 교회의 사명을 충실히 이루어 갔다.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 갔으며 그의 목회 철학은 열매를 거둬 갔다. 특히 이 교회에서 설립한 고아와 노약자를 위한 보린원은 교회가 사회에 해야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역사적 표본이 되었다. 일제가 세계대전을 일으키면서 한경직 목사는 그 교회의 강단에조차 설 수 없게 되었다. 전쟁 상대국인 미국에서 공부한 때문이었다. 그는 그가 설립한 보린원에서 광복될 때까지 농사일을 하며 고아들과 함께 새 날을 기도하고 있었다.


광복은 한경직 목사로 하여금 현실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게 하였다. 일제의 철수에 따른 치안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는 일본인 지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평안북도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고 또 민주사회의 건설을 위해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 야심에서가 아니었고 단지 건국의 틀이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소박한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소련군의 진주와 더불어 내려진 그에 대한 체포령은 그를 월남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한경직 목사가 무사히 서울에 내려와 처음 시작한 일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월남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945년 12월 영락교회가 탄생하였으며 이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고 또 피난민들의 재회의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1973년 영락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그는 이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일생의 사역을 이루어 간 것이다. 그의 일생의 사역은 역시 목회자의 사명인 양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영락교회의 강단을 통해 수많은 성도들을 영적으로 양육하였으며 또 온갖 경로를 통해 한국인과 세계인에게 선교의 메시지를 전했다. 학원, 군, 농촌, 도시공장지대, 그 외의 모든 그늘진 곳 그리고 해외 등 그의 선교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어림잡아 그는 이 지구상에 약 500여 교회를 세웠다.


민족과 국가를 사랑했던 그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아 왔다. 광복 이후 교회 설립과 더불어 대광중고교, 보성여중고교, 영락중고교, 숭실대학, 서울여자대학 등의 설립 또는 재건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교회의 사명이 사회의 그늘진 곳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임을 몸소 실천하여 많은 고아와 과부와 노약자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해외의 기독교인들과 힘을 합해 선명회를 조직하여 전쟁고아를 보살피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는 사회현실의 문제도 등한히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길 곳곳에서 시국강연을 하기도 하였고 대구에서는 3천명의 청년을 모아 기독교 구국회를 조직하여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교계에 대한 그의 봉사는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했고, 한국기독교 연합회회장, 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 숭실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고희를 맞아 공식적으로 영락교회에서 은퇴한 한경직 목사는 은퇴 후 그의 활동 영역을 더욱 넓혀 갔다. 여러 선교 단체를 통해 보다 폭넓은 선교를 시행해 갔다. 군복음화, 외항선교, 사랑의 쌀 나누기 등 활동을 주도하였고 특히 한국기독교 100주년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갔다. 1970년대부터는 군복음화에 앞장서 군복음화 후원회 총재로써 나라를 지키는 육. 해. 공군뿐만 아니라 경찰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노년에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북에 두고 온 교인과 교회였다. 그러기에 그는 템플턴상 상금 100만불을 모두 북한선교를 위해 헌금하고 끊임없이 북한선교의 길이 열리도록 기도하고 있었다.


한경직 목사의 공적이 이토록 빛나게 보이는 것은 그의 근검한 개인생활에도 크게 기인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영락교회와 교계 그리고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퇴 후 영락교회가 마련한 남한산성의 조그만 외딴 집에 기거해 왔으며 6평 남짓한 그의 방에서 기도로 그의 여생을 보내왔다. 그가 남긴 것은 오직 그의 양육과 선교의 열매요 그의 기도를 통해 드러난 우리 교계와 민족의 소망 뿐이라 하겠다.


한경직(韓景職)목사 약력


* 출생-------------------------------------------- 

1902. 12. 29(음)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출생 

(부친 한도풍(韓道豊)씨, 모친 청주 이(李)씨 사이의 장남)


* 학력 -------------------------------------------

1916 평남 평원군 공덕면 진광학교 졸업

1919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졸업

1925 평양 숭실대학교 졸업(이과)

1926 미국 엠포리아 대학 졸업

1929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졸업

1948 미국 엠포리아 대학 명예 신학박사 학위

1956 연세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학위

1977 숭실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학위


* 경력 --------------------------------------------

1931 평양 숭인 상업학교 교목 겸 교사

1933 신의주 제2교회 목사(10년 시무)

1939 신의주 보린원(고아원) 설립

1945 서울 영락교회 창립(27년 시무)

1947 영락 보린원 설립

1947 대광학원 이사장 취임

1950 보성학원 이사장 취임

1950 CCF(기독교 아동복지 재단) 이사장

1951 부산 다비다모자원 설립

1952 영락경로원 설립

1952 영락 중, 고등학교 설립

1953 홀트 양자회 이사장

1953 선명회 이사장(36년간)

1954 영락 모자원 설립

1954 숭실대학 학장 역임

1955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40회 총회장 역임

1956 한국 기독교 연합회 회장

1962 서울여자대학 이사장 역임

1967 숭실대학 이사장 역임

1969 영락여자신학교 설립

1971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대학 이사장 역임

1973 영락교회 원로목사 추대

1973 군복음화 후원회 회장

1973 한국교회 진흥원 원장

1973 아세아 연합 신학원 이사장

1976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총재

1976 한국 외항선교회 명예회장

1983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

1984 재단법인 남강 문화재단 이사장

1985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 재단법인 이사장

1988 군 복음화 후원회 명예회장

1989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대표

1989 선명회 명예 이사장

1990 한국 총연합회 명예회장

1990 고당 조만식 선생 기념사업회 명예회장

1990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명예회장

1995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 '영락 애니아의 집' 설립


* 수훈사항 ------------------------------------------------

1970 국민훈장무궁화장수상

1992 템플턴상 수상


 

한경직 이후 ‘영락교회 역대 담임목사’ 비교분석

 

소기천 교수, 평신도 목회 전통…후임 목회자와 갈등 불러 [2007-11-06 07:31]

 

장신대 소기천 교수가 최근 ‘한경직의 개혁신앙 재조명’이란 주제로 열린 한국개혁신학회(회장 정일웅 교수)에서 한경직 목사 이후의 영락교회 역대 담임목사들을 비교하는 글을 발표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날 소 교수는 한경직 목사의 신앙노선을 ‘성서적 복음주의’로 정의 내리며, 이를 역대 후임 담임목사들이 얼마나 지키고 계승하고 있는지에 대해 비교분석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내외적인 카리스마를 갖춘 박조준 목사’


한경직 목사의 목회 바통을 바로 이어받은 목사는 박조준 목사.(재임기간 1973~1984) 소 교수는 박조준 목사에 대해 “한경직 목사님의 많은 부분을 따라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라며 “이를 위해 한경직 목사의 몸짓과 제스처, 설교할 때의 목소리와 억양 등을 그대로 모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소 교수는 “박조준 목사는 영락교회가 요구하는 대내외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으며, 교회가 추구하는 영적인 이미지에 가장 부합된 목사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가 강남으로 예배당을 이전하려 했을 때 본의 아니게 마찰을 빚었다. 일부 교인들은 6∙25 전쟁 당시 교회에 남아 순교한 김응락 장로의 피가 서려있는 현재의 예배당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 1985년에는 박조준 목사가 영락교회를 사임하게 되는 큰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박조준 목사는 건강상의 이유로 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하게 된다. 출국하던 날 그는 교인들이 개인적으로 마련해 준 미화를 지참하고 있다가 외환관리법을 위반하게 돼 출국장에서 구속되는 등 큰 수모를 겪는다.


’변호사답게 정확하고 꼼꼼했던 김윤국 목사’


박조준 목사의 다음 목회자는 김윤국 목사(재임기간 1985~1988). 그는 변호사답게 정확하고 꼼꼼하게 목회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영락교회에 머문 기간은 3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다. 그는 사람들과 친화적이었으며, 영어를 잘해 대외적인 인물로 손색이 없었다. 이러한 김윤국 목사를 많은 교인들이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건강이 악화돼 담당 주치의의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경고를 받고, 갑작스럽게 교회를 사임한다. 소 교수는 “김윤국 목사 안에 ‘영락교회는 담임목사가 목회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목회하시는 곳’이란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며 “이는 그가 쉽게 교회를 사임할 수 있게 한 밑바탕이 됐다”고 발제했다.


’외적인 치장보다는 내면을 중시한 임영수 목사’


현재 모세골 공동체 대표 임영수 목사(1988~1997). 소 교수는 “그가 내면적으로 한경직 목사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평한다. 그는 재임 초 팀목회를 추진했다. 교육목사 김동호 목사(높은뜻숭의교회)와 행정목사 이성희 목사(연동교회)를 청빙하고 자신은 설교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평신도가 주도하는 힘이 강한 영락교회에 이러한 목회는 중직자들의 많은 반대가 있었다.


개개인의 영적 성숙에 목회의 초점을 둔 그는 영성목회에 큰 힘을 쏟았다. 그는 외적인 치장보다는 진실하게 내면적의 의미를 추구하는 일에 더 큰 보람을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모습은 영락교회가 요구하는 큰 목회자의 리더십에 부합되지 않았다. 이른바 내적으로 큰살림을 하고 대외적으로 업적을 남기는 ‘슈퍼스타 목회자상’이 아니었다.


’기도하는 목회자, 이철신 목사’


마지막으로 현재 영락교회를 맡고 있는 이철신 목사(1997~현재). 그는 여러 경우의 문제들로 영락교회를 떠난 전임 목회자들의 사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기도하는 목회를 표방했다. 그는 교인들로부터 ‘기도하는 목회자’라는 평판을 듣고 있다.


하지만 그는 교회개혁을 추진하다가 당회, 제직회와의 마찰을 초래했다. 그럼에도 그는 개혁교회의 전통인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자세를 잃지 않고 있다. 한경직 목사가 토요일에는 전적으로 설교준비에 매달린 것처럼, 그 역시 토요일에는 설교준비 이외에 다른 사역은 하지 않고 있다.


소 교수는 “영락교회는 평신도의 자부심이 강하고 장로가 목회 일선에서 사역을 주도하는 평신도 목회의 전통이 강한 교회”라며 “그 결과 전통에 익숙하지 않은 후임 목회자들이 당회와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 “하나님께서 과거 한경직 목사를 사용하신 것처럼 후임 목회자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며 “당회와 교인들은 여러 장점을 지니신 분을 후임자로 청빙한 이후에는 일단 그가 소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와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김근혜 기자 khkim@ch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