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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조치훈의 24년 응어리... 누가 풀까?

풍월 사선암 2010. 5. 20. 19:57

  

[칼럼]조치훈의 24년 응어리... 누가 풀까?


조치훈 9단이 춘란배 세계대회에서 한국의 젊은 에이스 강동윤 9단을 꺾는 모습을 보며 저절로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언제적 조치훈인가. 일본의 명인이 되어 신문 1면 머리기사를 장식한 조치훈이 고국에 돌아와 문화훈장을 받는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이 벌써 30년 전이다. 한데 지금도 저렇게 살아 젊은 강자들을 혼내주는 모습이 재미있다.


한국바둑 은 30년 전 그 조치훈으로 인해 1차 중흥기를 맞이했다(2차 조훈현, 3차 이창호로 이

지며 한국바둑은 세계를 제패한다). 하나 조치훈은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기원과는 서먹한 관계였다. 소주를 좋아하는 그는 서울에 오면 후배들과 개인적인 술자리는 가져도 한국기원엔 결코 들르지 않는다. 조치훈의 친형인 조상연 4단이 24년 전인 1986년 한국기원에서 제명당했고 이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한데 한국기원 사무국이 최근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1941년 생인 조상연씨는 고교생이던 56년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숙부인 조남철 9단이 한국기원을 세우고 54년부터 입단대회를 시작했는데 3년 만에 유망한 젊은 기사가 등장했다. 이해 막내 치훈이 태어났다. 치훈은 6세의 어린 나이에 조남철 9단의 손을 잡고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문하에 들어간다. 이때 상연씨도 한국에서의 기사 생활을 포기하고 일본에 건너가면서 파란만장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기타니 도장과 일본에서의 긴 이야기는 덮어두자. 한국 제일의 바둑 가문의 집안사도 덮어두고 조치훈이 금의환향한 뒤의 이야기도 덮어두자.


조상연씨가 제명당한 이유는 '바둑세계'라는 잡지를 발행했기 때문이다. 한국기원이 '월간 바둑'이란 잡지를 발행하는데(당시만 해도 이 잡지는 매달 3만 부가 넘게 팔려 한국기원 운영에 큰 몫을 했다) 따로 잡지를 낸 것이 화를 불렀다. “한국기원의 수입에 막대한 타격을 주고자 하는 행위를 했고 이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만장일치로 제명한다”고 당시 한국기원 상임이사회 기록은 밝히고 있다.


3년 전이던가. 조상연씨는 한국기원 한상열 사무총장 앞으로 청원서를 보냈다. 한·일 양국 바둑 교류와 동생 조치훈 9단의 국위 선양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옛날 일, 그리고 너무 의욕이 넘쳐 본의 아닌 마찰로 제명을 당한 뒤 오랜 세월 심적 고통을 겪었던 점과 후회하는 마음을 적었다. 그러고는 이제 이순을 지나 고희를 앞둔 시점에서 고국으로 돌아가 고국의 바둑 발전에 여생을 바치고 싶다는 절절한 심정을 토로했다.(일본기원 7단이기도 한 조상연씨는 2007년 일본바둑에서 은퇴했다).


6세 때 일본에 건너간 어린 조치훈이 얼마나 부모 품이 그리웠을까 생각해본다. 그 공백에 15살 위의 육친인 형이 있었다. 조치훈이 어떤 경우에도 형을 감싸 안는 것은 바로 이역만리에서 함께 보낸 어린 시절 때문일 것이다. 조상연씨의 바람대로 한국기원이 그를 복권시켜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이다. 24년은 어떤 잘못도 녹일 만한 긴 세월이다. 더구나 조상연씨의 제명 사유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형의 복권으로 조치훈 9단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스산한 응어리를 풀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열혈 투혼의 조치훈, 그는 혼자 힘으로 당시로는 하늘같은 일본바둑을 제압하며 온 국민의 환호를 받았다. 그는 바둑 영웅이었다.


그런 조치훈에게 일본은 끊임없이 귀화를 권했을 것이다. 아이들과 부인, 동료들도 귀화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조치훈은 일본에서 50년 가까이 살았지만 여전히 한국 국적이다. 한국이 조치훈을 섭섭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조치훈 9단이 한국기원에 찾아와 어린 후배들과 인사를 나누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중앙일보 4월 2일자, 박치문의 검은돌 힌돌, 글 | 박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