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영상/일반사진

金日成 희귀사진 입수

풍월 사선암 2009. 7. 24. 11:24

 

'동족상잔의 원흉' 金日成 희귀사진 입수

 

친북인사부터 전직 美대통령 접견까지 다양... 젊은 金正日과 함께한 사진도


아직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김일성(1912~1994)의 희귀 사진들이 익명을 요구한 북한 현지 소식통으로부터 최근 입수되었다.

 

북한은 김정일의 삼남(三男) 김정운으로 이어지는 인류 근대역사상 전무후무한 3대 혈통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근래부터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재개하고 있다.

 

입수된 사진들 중에는 청장년시절 김일성의 모습도 있으며,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등 친북단체 인사들을 접견하는 모습도 있다. 또 최근 수명이 다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김정일과 함께한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89년 입북한 문익환 목사(右)를 접견한 김일성(촬영시기 89년 3~4월 추정)

 

당시 불법으로 입북한 문 씨는 대한민국 대표자 자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통일3단계방안 원칙'에 합의했다.


이적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남측본부 결성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문 씨는 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을 시작으로  93년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었다.

 

임민식  범민련 공동사무국 사무총장(左)을 접견한 김일성(촬영시기 미상)


70년대부터 해외에서의 친북 활동을 전개한 임 씨는 국보법 위반 혐의로 현재 국내 입국이 금지되고 있다.

 

월맹의 호치민(Ho chi minh. 右)을 접견한 김일성(촬영시기 미상)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탈북자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월남전쟁(60~75년) 당시 공군 부대를 파견했다.

 

노쇠한 마오쩌둥(毛澤東. 左)을 접견한 김일성(촬영시기 미상)


북중 양 측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인해 발발한 6.25민족동란 당시 혈맹(血盟)으로 맺어졌으나, 후일 중국이 개혁개방 노선을 지향하면서부터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북한의 1~2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채택을 지지하기도 했다.

 

1차 북핵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94년 6월 15일 대북 특사 자격으로 방북한 지미카터

(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을 접견한 김일성(촬영시기 94년 6월)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의 중재로 미북 관계는 개선되는 듯 했으나, 김일성은 불과 한 달 뒤인 7월 8일 사망했다.

 

이승기 박사(右)와 환담을 나누는 김일성(촬영시기 미상)


서울대 공대학장 출신의 이 박사는 50년 월북, 52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아 97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에 따르면 북한의 핵무기 기술은 96년에 이미 고농축우라늄(HEU) 개발을 시작했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황해제철소(현 황해제철연합기업소) 1호 용광로 조업식에 참석한 김책 내각 부수상(左)과

김일성(촬영시기 58년 추정).


김책은 후일 그의 이름을 딴 김책제철소와 김책 공업종합대학이 건설될 정도로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작년 발생한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수명이 불과 1년 남짓 남은 것으로 최근 외신에 의해

보도되고 있는 김정일(左)과 함께한 김일성(촬영시기 미상)


시사월간지 신동아(新東亞)는 지난 2005년 1월호에서 말년에 접어든 김일성의 대외 개방정책에 위기를 느낀 김정일이 부친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젊은 시절의 김일성(촬영시기 45~46년 추정)


배경은 45년 10월 25일 민간기구로 창설되어 이듬해 6월 7일 평양학원 예하 항공중대로 편입된 신의주항공대이다. 북한은 47년 8월 20일 소련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의주항공대 출신 300여 명을 중심으로 비행대를 창설한 뒤, 48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과 함께 항공대대로 발전시켜 공군을 발족시켰다.

 

중년 시절의 김일성(左). 악기를 연주하는 인민군 장병들과 함께(촬영시기 미상)


긴장된 표정의 장병들과 달리 김일성은 북한을 지배하는 유일신(神)으로서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듯 하다.

 

탄광 노동자들과 함께 한 김일성(左 코트차림) 동족상잔의 비극 이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앙상해진 노동자들과 비대한 체격의 김일성이 대조를 이룬다(촬영시기 미상)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강선제강소(현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근로자들과 함께 한

김일성(右 코트차림) 동족상잔의 비극 이후 극심한 경제난으로 앙상해진 근로자들과

비대한 체격의 김일성이 대조를 이룬다(촬영시기 미상)

 

  평양 '만경대닭공장' 여성 근로자들과 함께한 김일성(中) 북한 내부에서도 일반 주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로 희귀한 사진이다(촬영시기 미상)

 

 

평안남도 문덕군 선거자들과 만난 김일성(촬영시기 미상)


분단 이후 김일성은 '이밥의 고깃국' 구호를 앞세워 주민들에게 공산주의의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 북한은 세계 최극빈국의 대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평안남도 안주군 연풍협동농장에서 벼이삭을 집어 든 김일성(촬영시기 미상)


북한은 김일성 생전 당시 "수령이 있는 한 불가능이란 없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알고 있을까. 인류 근대역사상 유례가 없는 혈통세습을 통해 체제를 믿고 맡긴 장남(長男)이 북한을 300만이 아사(餓死)한 지옥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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