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바둑,오락

[기고] 최고 기사 지키지 못한 기사회

풍월 사선암 2009. 6. 16. 23:43

[기고] 최고 기사 지키지 못한 기사회

한철균 (프로기사 7단ㆍ전 기사회장) 

 

국내 랭킹 1위 이세돌 9단이 최근 휴직원을 제출했다. "심신이 피로해서 바둑에 전념할 수 없다"고 했지만 지난달 한국기원 임시 기사 총회서 '이세돌에게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사실상 징계 결의안이 표결에 붙여져 압도적으로 통과됐기 때문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기사회가 이 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는 '한국바둑리그에 불참하면서 중국 리그에는 출전하는 등 그동안 이세돌이 취했던 일련의 행동이 한국기원과 프로 기사들의 명예와 이익에 해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명확한 규정 위반이라기보다 그저 불경죄, 괘씸죄, 건방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기사회는 기본적으로 회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무국이나 이사회의 부당한 징계나 조치에 맞서야 하는데 오히려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뚜렷한 죄목도 없이 마치 인민 재판 하듯 소속 기사를 몰아붙였다. 6.25 때 '붉은 완장'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 없는자 돌을 던지라'고 했듯이 요즘 한국 바둑계 현실에서 과연 어떤 기사가 이세돌 9단에게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바둑판 사건'에 공식적인 의견 개진이 없었던 기사는 말할 자격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징계나 처벌 기준이 그 때 그 때 달라지면 신뢰성이 떨어진다. 한 바둑팬은 이번 이세돌 징계건을 처리하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터넷 사이트에 가명으로 출전해서 상금을 따먹는 기사들도 자격이 없다. 한국기원이 주최, 주관하지 않는 대회에 참가하면 중징계 사유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 아닌가?


각종 대회 개막식이나 폐막식 등 여러 가지 행사에 반드시 참여해 자리를 빛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한 번도 참석치 않은 기사들도 마찬가지다.


이번 총회서는 또 중국 리그에 참가하는 기사들의 수입에서 일정액을 적립금으로 떼겠다는 안이 통과됐다. 대국 일정에 편의를 봐 주겠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원칙적으로 사유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게다가 프로 기사가 개인 자격으로 중국 리그에 출전하는데 한국 기원이 나서서 대국 일정까지 봐 준다니 어쩐지 중국 리그가 국내 기전보다 위에 있다는 느낌이 들어 씁쓸하다. 비록 자발적인 납부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다수의 힘으로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같은 논리로 한다면 프로기사의 방송출연이나 저술행위는 물론 인터넷 사이트에서의 중계 방송이나 해설 및 최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바투 대회에 나가 상금을 취득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도 뭔가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결국 한국 최고 기사가 앞으로 1년 반이나 바둑계를 떠나게 됐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세계 최강의 실력으로 한국 바둑을 빛냈고 중국 대지진 때는 상금 전액을 쾌척하는 등 남이 선뜻 하기 어려운 선행에도 불구하고 흔히 이세돌에 대해 칭찬보다 질책이 많은 것은 앞으로 스스로 커나가면서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부디 쉬는 동안에도 꾸준히 기도연마에 힘써서 돌아오는 그 날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세계 최강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지덕을 겸비한 기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선배 프로 기사로서 지켜주지 못해 부끄럽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