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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렬의 흑백광장] 센돌, 바둑 없이 견디겠다고?.

풍월 사선암 2009. 6. 16. 23:40

[이홍렬의 흑백광장] 센돌, 바둑 없이 견디겠다고?.

[ 2009-06-14 ] 

 

이세돌이 기어이 휴직계를 냈다. 내년 말까지, 앞으로 1년 반이나 쉴 모양이다. 누구의 잘 잘못을 떠나 한 없이 안타까운 일이다. 우선 팬의 입장에서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 그의 신작 기보를 접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1인자가 사라진 바둑계가 겪게 될 타격도 지금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클 것이다. 최고 황금카드의 한 축이 사라졌으니 세계바둑 전체로 보더라도 큰 손실이다. 아무런 승자도 없는, 모든 사람이 패자인 희한한 게임이었다.


진검과 목검의 차이


가장 힘들어진 사람은 두 말 할 것 없이 당사자 이세돌이다. 수입이 올 스톱되는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소속사회에서 혼자만 외톨이로 떨어져있는 소외감이 뼈가 저리도록 엄습해 올 것이다.

하지만 진짜 큰 괴로움은 따로 있다. 바둑을 둘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야 말로 최대의 고통이고 형벌임을 곧 깨달을 것이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또 제자들을 상대로한 지도대국 같은 건 계속하겠지.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온 몸을 던지는 시합바둑과는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


바둑계 검객들에게 있어 진검(眞劍)과 목검(木劒)이 어떻게 다른지 몇 사람의 예를 들어보려 한다. 우선 루이나이웨이(芮乃偉) 부부다. 둘은 90년 모종의 정치적 사연으로 조국을 떠났다(당시엔 아직 애인 관계였다). 장주주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루이는 일본에 정착했다.

장주주의 회상. “고국과 연인으로부터 떨어진 외로움은 참을 만 했다. 하지만 바둑을 둘 수 없다는 현실이 미칠 것 같았다.” 그는 그 때마다 차민수가 살고 있는 LA까지 차로 꼬박 5시간을 달려갔다. 두 이국(異國) 남자가 미국 땅에서 이런 식으로 머리를 맞대고 둔 판 수가 족히 수 백판은 됐다.


루이는 객원기사를 목표로 일본기원을 노크했으나 뜻밖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의 막강 파워에 겁먹은 일본 여류들이 완강히 저항하고 나선 것이다. 루이와 장주주는 홧김에(?) 결혼식을 올린다. 92년 여름 주일 중국대사관에서였다.

조국을 떠난 후 일본과 미국을 오가던 10년간의 방랑생활은 그들에게 ‘바둑 궁핍의 시대’였다. 그리고 한국이야 말로 이들 부부에겐 구원의 땅이었다. 99년 4월 정착한 두 사람은 “한국에서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평생 이곳에서 바둑만 두겠다”며 귀순용사처럼 감격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 후 다시 1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둑계에서 그들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우쑹성(吳淞生) 9단을 빼놓을 수 없다. 독설가 서봉수는 일찍이 그를 가리켜 “세계에서 바둑을 가장 좋아하는 프로기사”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곤 했었다. 중국 상해 출신으로 진조덕, 왕여남 등과 함께 중국 바둑 1세대로 꼽히는 그는 85년 호주로 이민 갔다가 89년 한국기원 객원기사가 됐다.

도무지 호주에선 바둑 둘 상대가 없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단행한 행마였다. “너무도 바둑이 두고 싶어” 몸살을 하다 처자식 곁을 떠나 한국에서 홀아비(?)생활을 시작한 것. 그는 무려 12개 국내기전 본선서 활약했으며, 96년엔 제1회 삼성화재배 때 전성기의 마샤오춘을 보냈을 정도로 실력도 뛰어났다.


가정과 목숨보다도 강한 바둑의 마력


그만 하면 바둑 갈증을 풀었을 만도 하건만 우쑹성은 아예 ‘환자’ 수준이었다. 대국이 없는 날이면 기사실에서 아무나 붙잡고 바둑 두자고 졸랐다. 프로동료가 안 보이면 10급짜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국후 “이거, 좋은 수”라며 바둑돌을 가리키면서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쑹성은 기어이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한국체류 10년 만에 중국으로 유턴해야했다. ‘가정보다 바둑을 더 좋아한 죄’ 때문이었다. 그는 그 이후 다시 호주를 찾아 말년을 보내다가 2007년 말 6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계훈이란 프로가 있었다. 6년 아래의 양재호 9단과는 입단 동기에다 함께 울산을 대표한다는 공통점을 가진 기사였다. 호방하고 씩씩한 성격, 의리를 중시하는 남성다움으로 아끼는 팬들이 많았다. 감각과 빠른 수읽기 등 기재도 높이 평가받았었다.

그런 그가 98년 프로기사 직을 떠나게 됐다. 말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바둑계 일선에서 물러난 뒤엔 통신바둑업체 자문역으로 활동하면서 아마추어들도 지도했다.


필자와 소주 한 잔을 나누던 날 그는 “바둑이 두고 싶어 미치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짜릿짜릿한 ‘제도권 승부’가 너무도 그립다는 얘기였다. 좀이 쑤셔서 아마추어 대회라도 나가보고 싶은데 그마저 뜻대로 안 된다며 푸념했다. 프로기사 사직 후 일정기간이 지나기 전엔 아마대회 출전이 불허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닷새 뒤 그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휴가에서 돌아와 충격적인 소식을 받았고 결국 조문조차 못 갔다. 사망 5일 전 절실했던 말투와 표정으로 미루어 그의 사인(死因)은 2년 여 동안 겪었던 ‘진짜승부에 대한 그리움’이었음을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C씨는 왕년에 알아주던 프로기사다. 20여 년 전 은퇴했다. 이젠 나이가 꽤 들어 예전 전성기 때의 기량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항우같은 힘을 자랑한다. 그는 요즘 각종 대회에서 항상 상위권을 지키는 아마 강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아직까지 프로 현역에 머물렀었다면 230여 국내 직업기사들 중 서열 10위 안쪽에 자리했을 것이다.

그 정도의 고참 배테랑인 C씨가 체면 안 따지고 ‘새카만’ 후배 아마추어들과 칼을 섞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살 떨리는 승부의 긴장감을 벗어나선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빠른 복귀가 서로 사는 길


바둑에 ‘미친‘ 사람들의 예를 들라면 한도 끝도 없다. 특히 바둑을 직업으로 하는 경지의 사람들에게 바둑이란 단순한 밥벌이 수단으로 그치지 않는다. 하루 세끼 밥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것과 다름없는 생활의 일부다.

기사들 상당수는 하루 온종일 처절하게 시합바둑을 둔 날 밤에 ‘머리를 식히기 위해’ 각종 게임을 즐긴다.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싱긋이 웃으며 “긴장은 긴장으로 푼다”고 답한다. ‘긴장과 스릴의 체질화‘야 말로 프로 세계의 본질이다.


그런 직업기사들에게 바둑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들에게 부과할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은 바둑을 두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축구선수로부터 축구공을, 가수에게서 마이크를, 목수로부터 연장을 빼앗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게다가 이세돌의 승부사적 캐릭터는 프로들 중에서도 유별나다. 배짱과 모험심, 도전정신과 승부끼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18개월씩 공식전을 안 두면 실력 퇴화를 걱정하기 앞서, 바둑돌을 잡지 못하는 고통 그 자체로 폐인이 될 것이다.


이세돌은 과연 바둑 없는 삶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이번 결단을 내렸을까. 그 고통의 부피가 얼마나 큰지 상상해 본 적이 있을까. 혹시 “나름대로 각오는 했었지만 이렇게까지 괴로운 줄은 몰랐다“는 말이 머지않아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바둑이 고파서, 시합대국의 전율이 너무도 그리워서 그는 아마도 도중에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바둑의 속성과 마력이 이세돌로 하여금 도저히 장장 18개월이나 장외(場外)에 머물 수 없도록 강한 인력(引力)을 발휘할 것이다.


바둑 없는 이세돌은 서서히 황폐해져 갈 테고, 이세돌 없는 바둑계는 더 끔찍한 추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세돌이 18개월을 다 채우지 않고 조기 복귀하리라고 한 것은 예언의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은 기원(祈願) 쪽에 가깝다.

아무튼 집나간 이세돌에게 엄숙히 고해두고자 한다. 바둑이 고파지면 멋쩍어하지 말고 즉각 당당하게 귀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