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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따라서 떠나는 흑산도 여행

풍월 사선암 2009. 4. 21. 15:15

마을 따라서 떠나는 흑산도 여행

 

톡 쏘는 홍어를 안주 삼아 탁주 한 사발 들이키고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둠이 바다에 내리고 해안선을 따라 사리, 심리, 곤촌, 비리, 진리, 흑산도 섬 마을에 하나둘 불이 들어온다. 바다로 가는 길, 작은 포구 가로등은 외롭고 집은  따뜻하다. 

글·사진 김연미 기자취재협조·파나관광(주)

 

산과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흑산도.

예리에 내리니 햇살보다 먼저 비린내가 달려든다. 새끼 조기와 어린 갈치 마르는 비린내. 예리항은 배를 떠난 늙은 어부 같은 모습으로 스산하면서 어쩐지 불친절 할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80년대까지 다도해지역에서 가장 큰 파시의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모텔, 여인숙, 다방 등 섬보다는 육지의 모습을 더 닮았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92.7km 떨어져 있으며 쾌속선으로 2시간 정도 걸린다. 홍도와는 30분 거리. 사람이 사는 유인도 11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 89개, 1백여 개 섬이 위성처럼 떠 있다.

 

흑산도는 신라 덕흥왕 2년(828)에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서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상리산성(반월성)을 쌓으면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상리산성은 예리항 정면의 바다 건너에 있는 산꼭대기에 자리하고 있다.


해안선 24km 따라 11개 섬마을 여행

흑산도 여행의 묘미는 역시 해안선을 따라서 하는 24km 도로 일주이다. 예리에서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섬 마을을 볼 수 있으며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을 도로에서 조망할 수 있어 좋다. 어떤 지형에 마을이 만들어졌는지 살펴보면 사람들의 지혜에 새삼 혀를 두른다.

 

여행은 예리항을 출발하여 서쪽 마을부터 시작했다. 흑산도 두 개 해수욕장 중 하나인 진리 배낭기미 해수욕장을 지나면 흑산중학교가 보인다. 흑산중학교는 섬에서 섬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곳으로 수업중인지 운동장이 조용하다. 진리에는 제주도와 흑산도에만 서식하는 초령목이 자생한다. 3백년이 넘었다는 초령목은 고사하고 주변에 어린 초령목이 3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열두 고개 초입에 3층 석탑과 석등만이 남아 있는 신라 무심사 절터가 있으며 산꼭대기에는 장보고가 세웠다는 반월성이 있다. 꼬불꼬불 열두 고개를 올라 상리산에 오르니 멀리 홍도, 예리항이 한눈에 들어온다. 상리산 전망대와 봉화대, 흑산도아가씨비가 있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드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5백원 동전을 넣고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를 흥얼흥얼 따라 불러본다. 그 옛날 뱃사람들을 상대로 술을 팔던 흑산도 아가씨도 파시도 사라졌지만 씹을수록 톡 쏘는 맛이 더하는 홍어회에 탁주 한 사발 마시고 싶다. 상리상 봉화대는 일출 일몰을 다 볼 수 있다.


비리는 전복, 가두리 양식으로 유명하다. 흑산도 서쪽은 바람이 잔잔해서 가두리양식을 많이 하고 동쪽 마을은 바람이 세서 멸치를 잡는다고 한다.

 

길은 남쪽으로 갈수록 비포장 도로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해안절벽을 달리는 스릴은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진리를 지나면 포구와 가로등이 예쁜 곤촌리가 나온다. 바다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낮추고 있는 마을. 곤촌은 포구에 가로등이 들어오는 저물녘이 가장 아름답다.

 

암동에서 사리로 가는 길에는 홍도 뒤편으로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는 슬픈 노을을 볼 수 있다. 노을을 보려고 차에서 내렸지만 인연이 아니었던지 구름이 끼어서 일몰을 볼 수 없었다.

 

사리·천촌리는 유배 역사지

흑산도는 제주, 거제, 진도 다음으로 고려시대 이후부터 중벌을 받은 죄인이 가는 유배지라고 한다. 특히 흑산도는 양반뿐만 아니라 큰 죄를 진 서민들도 귀양살이를 했다고 한다.

‘고려동경’에서는 흑산도에는‘나라에 큰 죄를 지어 사형을 받아야 할 정도’의 죄인이 가는 곳으로, 고려 의종 2년(1148) 정수개가 최초 흑산도 유배자였으며 조선조까지 약 1백30여 명이 유배를 당했다고 한다.

특히 사리는 손암 정약전 선생이 순조 1년 신유사옥 때 유배되었던 곳이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의 친형이다. 손암은 벼슬을 버리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흑산도에 유배된다.


손암은 15년 귀양살이 동안에 흑산도 근해에 있는 물고기, 해산물 등 1백55여종을 채집하고 명칭, 형태, 분포상황 등을 기록한 ‘자산어보(현산어보)’를 저술했다. 사리에는 정약전 선생이 자산어보를 저술한 사촌서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그 밑에는 크리스마스 카드에 나올 법한 작은 성당이 있다.

 

소사리는 골이 아주 깊은 마을로 흑산도 멸치의 주 생산지이다. 멸치젓 곰삭는 냄새가 구수한데 강원도 산골 마을 같은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촌리는 미역, 멸치가 많이 나는 곳이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면암 최익현 선생 유적지가 있다. 면암은 1876년에 왜선이 강화도에 들어와 수호통상을 강요하자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가 ‘왜적을 물리치지 않으려면 신의 목을 베라’고 엎드려 상소를 올렸다가 3년여 동안 유배를 당한다. 귀양살이 동안에 진리, 천촌리에 서당을 세우고 마을사람들의 교육에 힘썼다. 면암이 바위에 친필로 쓴 ‘기봉강산 홍무일월’이라는 글귀에서 면암의 나라에 대한 충정을 알 수 있다. 천촌리, 가는게 등 일주도로 가는 길에 만나는 보석 같은 마을들. 8척만 남았다는 홍어잡이 배는 보지 못 했지만 섬 마을 바다에 쏟아지는 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