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등산,여행

와불을 기다리며…화순 운주사

풍월 사선암 2009. 4. 21. 15:51

와불을 기다리며…화순 운주사

 

남도땅 화순군 도암면에 자리한 운주사에 다녀왔습니다. 천불천탑지라고도 합니다. 계곡을 따라 부서진 석재와 석불, 석탑들이 무수히 널려있는 곳 천년풍상에 얼굴 지워진 석불들을 마주 대하며 한가로이 거닐었던 하루였습니다.

글·이영호 (대한항공 조종사)사진·김연미 기자 

 

절 초입부터 무슨 야외조각 전시장에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신라계와 백제계의 석탑들이 서로 이웃하며 나란히 서 있고, 이전에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형식의 탑파들이 즐비합니다.

 

절벽에 기대어 있는 불상들은 해바라기를 하는 가족인양 도란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원두막 같은 감실 안에 모셔진 석조불의 못 생긴 얼굴도 정겨웠습니다.


仁兄! 와불을 만났습니다.

운주사 한편으로 흐르는 시내에 살고 있는 작은 물고기들을 대신해서 안부 전해드립니다. 시냇가의 넓적한 암반 위에는 불신을 잃어버린 부처님의 불두만이 남아, 그 물고기들에게 삼생의 설법을 들려주시는지 오랜 풍상에 깎여온 원만상호에는 희미한 미소가 빗소리처럼 가늘게 그어집니다.


새로 지은 불당의 당당함과 번쩍번쩍 눈부신 황금종의 화려함이 눈두덩이에 돋아나는 잡티처럼 잠시 불편하였습니다만, 산 속이라 해도 오가는 이의 마음은 번잡한 세사를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법이니, 내 마음의 굽은 잣대로 지금 눈앞의 사물을 재어보지는 않으렵니다.

 

어찌 알겠습니까, 이제 몇 백 년의 세월이 다시 흐른 뒤에 일주문과 황금종도 세월의 이끼가 덮여지면, 그를 보는 후인이 있어 그것들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찬탄하게 될 줄을 말입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의 보편성이 때로는 우리의 어리석음에 기대어 절대가치로 변신합니다.

 

법당 왼편으로 멀리 빗겨 있는 산길을 오르면 산언덕에 태평스레 누워 하늘에만 마음 두신 와불을 만납니다.

 

와불이란 실상은 좌불 한 분에 입불이 한 분입니다. 길고 넓은 목에 좁은 듯한 어깨 위로 우견편단의 가사를 드리우고, 가슴으로 모은 양손을 가사 속에 거두시니 그 가려진 수인이 합장인지 지권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앉으신 매무새가 길상좌라 그저 좌불이라 칭합니다.

 

육계가 떨어져 나간 좌불의 왼편어깨에 다소곳이 기대신 또 한 분의 불상은 상호와 목이 길게 표현 된 입불의 형상입니다. 왜소한 어깨에는 좌견 편단을 두르시고 시무외와 여원인의 수인을 맺으셨는데, 조막손처럼 안으로 굽어 접히는 그 손 모양새가 오히려 현대미술의 추상적 미감을 더 앞서나가는 듯이 느껴집니다.

 

길게 흘러내린 목에서부터 급하게 휘어지는 어깨선을 따라 직선으로 끊어 내린 선의 유려함은 언뜻 모딜리아니의 회화를 연상케도 합니다만, 풍상으로 다듬어진 천년의 미를 어찌 한 점의 서양그림에 비기겠습니까.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는 조선조 숙종 때 의적 장길산과 그의 무리들이 관군에 쫓겨서 이 곳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운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민중이 세우는 새로운 세계. 와불의 전설은 ‘장길산’에서 언급한 뒤로 와불 현신은 전설로 떠돌고 있습니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이면 새 세상이 도래하니, 내세의 미륵불이 용화세상을 이룬다는 구름 같은 이야기가 입내림으로 전해진다 합니다. 그로 인해 운주사의 와불이 언제 일어설 것인가를 두고 사람들은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와불은 결코 일어서지 않습니다. 앞으로 다시 천년의 세월이 흐른다 한들 와불은 누워서 하늘만을 바라볼 것입니다. 세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말 타면 고삐 잡히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는 말처럼, 그저 누운 자세가 가장 편하기 때문입니다. 저라도 그냥 누워서 있을 겁니다. 둘, 둘러보아도 와불 주위에는 좌대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누워 계시도록 입안이 된 듯한데, 광배도 갖추지 못한 와불이 기댈 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일어선다면 스타일 구기는 일입니다. 셋, 누워 있는 것은 와불이 아니라 와불을 세운 이들의 마음입니다.

 

운주사의 불상, 석탑에서는 전대의 정형화된 형상과는 매우 다른 파격미가 느껴집니다. 기존의 양식에서는 도출되기 어려운 조악함의 미가 천불천탑 형상에 서려있습니다.

 

일부의 의견처럼 이 이지러진 물상들은 어쩌면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소외된 기층민중의 잠재된 소망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와불은 새 세상에 대한 약속과 이루지 못할 지복신앙의 오래된 기다림이 하나의 형상으로 체현된 것이며, 미륵불의 용화세상은 잡초같은 민생들의 고통을 위무하기 위한 진통제입니다.

 

지복세상을 코 큰 애들 말로 옮기면 UTOPIA입니다.

라틴어원으로는 OU(NOT)+ TOPOS(PLACE)라고 들었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세상, 땅 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오직 기다림으로만 존재하는 환상입니다. 미륵불은 내일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제라는 것은 오늘이 남긴 발자국일 뿐이며 내일이란 또한 오늘의 차명계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와불은 고통스러운 오늘을 견디기 위해 이 땅 위에 남겨진 당근이었습니다만,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라 해도 그저 무의미한 것만은 아닙니다. 불완전한 현생에 대한 끝없는 인고 속에서 피폐해 가는 우리의 하루를 지탱해주는 한 병의 박카스-디라도 되어줄 수 있다면, 남겨진 약속의 의미는 그것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와불은 일어서지 않습니다.

와불을 일으키는 순간, 이 땅의 민초들에게 남겨진 약속은 사라지며, 굽어진 어깨를 보듬어 굴곡진 삶을 지탱하게 해주던 그네들의 마지막 희망도 깨어집니다. 오르기를 꿈꾸던 산정에 어느 날 이르러보면, 다시금 이어지는 것은 나락 같은 쓸쓸함 뿐입니다. 하여 와불은 다만 기다림으로 그의 의미를 이룰 뿐입니다.

 

일본작가 다자이 오사무가 ‘인생의 99%는 기다림이다’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남겨진 1%는 싸움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삶의 여백을 채우기 위한 끝없는 투쟁, 생존의 그늘 속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지키기 위해 절벽 끝으로 묵묵히 걸어가는 전사들을 愚弟는 사랑합니다.


주말 하루, 천년의 기다림으로 나를 맞아준 와불에 합장합니다.

지금 나의 어리석은 마음 안에도 이름 짓지 못한 와불이 하나 누워있습니다. 어느 하루, 다시 깨어나 천년의 사자후로 내 오랜 기다림을 채워줄 와불을 기다리며, 愚弟는 아득바득 또 하루를 살아갑니다.

 

천지경계를 아득히 지워버릴 흰 눈 속에서 길게 누운 와불의 어깨에 나른히 기대어 앉아, 사무엘 베케트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 에스트라공처럼 오래도록 나의 고도를 기다리려 합니다.

 

돌아갈 길 아직 정하지 못하였는데 해는 이미 산마루에 걸립니다. 어스름 해그늘을 등에 지며 돌아서는 나에게 와불이 바람처럼 속삭입니다.

 

“지친 자에게 가야할 길은 더욱 멀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삶이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