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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바다의 인심을 닮은 산 - 고흥 적대봉

풍월 사선암 2009. 4. 21. 12:09

넉넉한 바다의 인심을 닮은 산 

고흥 적대봉

 

바다와 섬과 산, 그리고 넉넉한 인심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가을 산행을 맛보았다. 거금도 적대봉. 억새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누워있는 소같이 순한 산이다.

글·사진 한결가족 

 

“꼭 그 산을 닮았네요.”

“으응, 어느 산?”

“있잖아요, 여기 능선처럼 생겨 꽃이 잔뜩 피었던 산이요.”

“아아, 영취산?”

 

산을 타는 기회가 늘다보니 한결이도 이젠 제법 보이나 보다. 정말 그랬다, 능선 따라 손짓하는 억새들의 모습은 여수 영취산의 진달래 군락지 모습과 참 많이 닮았다. 진달래만 억새들로 바꾸어 놓은 듯하다. 들꽃, 맹감, 억새, 저수지, 산, 바다 등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참으로 푸근한 산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길에 들어선 지 30분 정도 지나자 이내 발걸음이 여유로워진다. 그저 앞만 보고 숲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경사진 바윗길을 기어가는 것도 아닌, 몇 걸음 떼다 뒤를 돌아보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에 얼굴을 맡기는, 그런 해찰을 부리건만 저 앞쪽엔 벌써 정상이 얼굴을 내밀고 우릴 부른다. 그것도 완만한 능선을 따라 온통 억새가 일렁거리는.

 

오늘 우리가족 셋을 품어준 산은 고흥에 있는 ‘적대봉’이다. 물론 섬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하룻밤은 섬에서 잤다. 어제 소중한 ‘인연’의 한 자락을 잡고 이 섬을 찾는 길은 어쩐지 친근하고 정겨웠다. 그저 둘러보기가 아닌 진짜 ‘사람내음’을 맡을 수 있을 거라는 설렘에 하늘까지도 쪽빛과 일렁이는 햇살을 더해준 길이었다. 광주에서 화순, 보성의 조성을 지나 고흥으로 향하는 길, 억새는 절정에 이르렀고 논은 마지막 알곡을 벗어놓느라 힘겨워하고 있었다. 가을은 여물대로 여물어 꺾이기 직전이었다.

 

적대봉을 안은 ‘거금도’, 고흥군 금산도로 불리는 섬. 우리는 ‘녹동항’에서 배에 승용차를 실었다. 배가 출발하는데도 승객들은 자리에 앉을 생각도 없이 갑판에서 서성이는 걸 보고 한달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짐작했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저기”라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정말 엎드리면 코 닿을 수 있을 만한 곳에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항구를 떠난 배는 채 20분도 못 되어 ‘신평선착장’에 도착했다. 30분 간격으로 ‘금전선착장’에 번갈아 배를 대는데 시골버스가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은 서둘러 자기 갈 길을 갔다. 숙박업소보다 민박을 좋아하는 우리는 인연이 닿은 복으로, 9대째 토박이로 살고 있는 ‘오천 마을’의 김형남님 댁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분의 세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섬 일주를 마치고, 그 집에서 특산물로 풍성한 저녁까지 잘 먹고 잠자리에 들었던 덕에 아침 산행이 상쾌할 밖에.

 

어제 오후 출발지를 미리 답사했기 때문에 성치마을로 곧장 들어서 산행의 출발점인 ‘파상재’에다 차를 주차시켰다. 그리고 여유로운 산행 시작. 산길은 잡목과 잡풀을 베어내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수고했을 사람들에게 절로 고마움이 우러난다. 적대봉 등산 계획은 지난 8월부터 세웠다. 면사무소에 부탁해 자료도 구하고 문의도 했더니. “지금은 산길에 가시덤불이 많으니 추석 쇠고 오면 다듬어져 고생이 덜 할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당연히 계획은 미뤄졌고, 약속은 지켜져 우리가족은 거금도 가을여행과 함께 이렇듯 편안한 적대봉을 찾게 된 것이다.

 

산길은 순했다. 경사는 제법 있지만, 그리 힘들어 할 일을 없을 듯하다. 지난 주 내내 단식을 했던 한결엄마가 조금 뒤처지기는 하지만, 아들 녀석은 다른 때보다 수월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섬 산의 가장 큰 매력인, 사방의 바다를 보는 재미 역시 똑 같다. 산등성이에 올라서지도 않았는데 고개만 돌리면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15분쯤 지나니 작은 샘터가 나온다. 아직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지만 플라스틱 병을 잘라 만들어 놓은 컵이 눈이 띈다. 정성을 들인 인정 많은 그 사람에게 또 고마움.

 

한결이는 넓은 바다를 보는 기념으로 폭죽 터트리자 한다. 각자 한방씩 쏘았다. 며칠 전 아내의 생일 때 선물 받은 케이크에 있었던 폭죽인데, 4개를 가지고 왔다. 정상에 오르면 나머지 두 개를 또 쏘기로 하고 다시 배낭을 맸다. 산에서는 ‘야호’조차 하지 않는 가족이지만, 한결이 기분을 맞추고 싶어 좀 무례한 짓을 했다. 기분은 더없이 상쾌하다.


샘터부터 경사는 약간 더 급해지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다. 빨갛게 익어 가는 길옆의 맹감을 따먹고 구절초 같은 가을 들꽃들이 앙증맞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다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며 발길을 떼는데, 다시 15분도 못돼 억새가 한없이 펼쳐진 능선삼거리에 다다랐다. 가슴께까지 닿는 억새는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일렁였다. 그 너머로 펼쳐진 남해바다는 눈이 부실 정도이고 반대쪽 바다 건너에는 녹동항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었다. 섬의 물을 책임질 거라는, 최근에 완공된 저수지가 산자락과 억새 사이로 이국적인 풍경마저 자아낸다. 오직 우리가족만이 정상으로 가는 길은 억새숲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당연히 ‘찰칵!’.

 

눈앞에 정상이 있는데 한결이가 어리광을 부릴 이유가 없다. 이제는 되레 누가 먼저 정상에 오를 수 있는지 내기를 하자 한다. “5학년쯤 되면 결이가 엄마 아빠보다 더 산을 잘 탈 것으로 생각했다”는 칭찬에 힘을 얻은 것인가, 내기를 신청하고는 앞장서서 달린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 갔다.

 

어린이들이 달리는 방법, 잘 알잖은가.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해 뛰다가 얼마 못가 지쳐버린다는 걸. 한결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처음엔 잘 달리더니 산길이라 그런지 얼마 가지 못해 헉헉거리는 숨을 견디지 못하고 멈춰 선다. 그래도 제법 달려서인지 뒤를 따라가던 우리도 숨은 찬다. 부러 앞장서려는 몸짓을 하니 소매를 잡고 매달린다. 그래도 정상은 자기가 먼저 밟아야 한다면서.

 

‘하하, 껄껄’ 웃으면서 행복이 이런 거지 싶은데, 그렇게 장난하다 보니 금방 거대한 봉수대가 있는 정상(592m). 이렇게 고생 없이 쉽게 올라온 산도 드물 것이다. 고흥군에서는 팔영산(608m) 다음으로 높은 산인지라 왜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 때 신속하게 전달해 주는 봉수대가 들어섰던 것은 당연한 이치.

 

게다가 이곳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완도, 남쪽으로는 거문도, 동쪽으로는 여수 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오니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을 터. 날씨만 좋으면 제주도까지 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어제 들었다.

 

완도나 진도 바다와는 달리 바다들이 넓고 그래선지 양식장들의 크기도 대단하다. 날씨 덕인지 ‘청정바다’ 라는 말도 그대로다. 저 바다 덕에 거금도의 인심도 넉넉하기만 한 걸까?

 

봉수대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된 것이라 한다. 둘레 약 34m, 직경 7m의 봉수대는 큰 돌들이 촘촘하게 쌓여 있어 웬만하면 허물어지지 않을 듯 싶었다. 돌탑을 쌓아 놓은 봉수대의 정상에 서니 바다에 둘러싸인 섬이라는 게 실감나고, 그 바다 사이사이의 섬들이 바로 잡힐 듯 가까이 자리 잡고 있다. 가지고 간 안내도를 앞에 놓고 눈앞의 산들을 맞춰보니 장흥의 천관산과 보성의 일림산도 지척이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약속대로 한결이와 폭죽을 한방씩 터뜨리며 자축했다.


가는길

●버스 : 강남고속터미널 - 고흥 녹동(항) - 거금도

●기차 : 전라호남선 - 순천(버스이용) - 고흥 녹동(항) - 거금도

●자동차 : 호남고속국도 - 남해고속국도 - 순천 - 벌교 - 고흥 녹동(항) - 거금도

   배시간표 : http://igoheung.go.kr

 

 

 

거금도 적대봉(592.2m)

바다에 떠 있는 고래등 같은 산

거금도에 솟아 있는 적대봉(積臺峰)은 마치 바다에 떠있는 고래등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산이다. 섬산이면서도 고흥군에서는 팔영산(八影山, 608.6m)다음으로 높은 적대봉은 펑퍼짐한 산세와 달리 전망이 매우 뛰어난 산이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완도, 남쪽으로 거문도 동쪽으로 여수 일원의 바다와 섬들이 한눈에 들어 올 뿐만아니라 날씨가 좋으면 멀리 제주도가 바라보인다 할 정도로 전망이 좋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성때문에 적대봉 정상은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 등 비상사태를 신속하게 전달해주는 봉수대는 둘레 약 34m, 직경 약 7m의 규모다.

 

적대봉 기슭은 또한 조선때 목장성(牧場城)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소록도, 절제도, 시산도, 나로도와 함께 도양(道陽)목장에 속한 속장(屬場)의 하나였던 거금도는 옛이름이 절이도(折爾島)로 적대봉을 중심으로 30리 길이의 성을 쌓아 말 116마리를 키웠던 세납 (稅納)목장으로 전한다.

 

거금도의 남북을 종단하여 석정리와 어전리를 잇는 임도 곳곳에 목장 성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적대봉 일원은 예전 수림이 울창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해안가의 방풍림만이 옛모습을 겨우 떠올릴 수 있게 하지만, 옛 문헌에 의하면 거금도는 조선시대 사복시 (司僕侍)에 속한 둔전(屯田)과 왕대산지가 있었고, 선재(船材)의 확보를 위해 벌채를 금지했을 정도로 질 좋은 나무가 많이 자랐던 곳으로 유명하다.

 

적대봉 주변의 해안 경관도 뛰어나다. 섬의 동쪽 오천리는 해안선을 따라 조약돌이 널려있는 등,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또한 섬의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익금해수욕장은 수심 2∼3m속의 해산물이 보일 정도로 물이 맑을 뿐만 아니라 울창한 방풍림을 배경으로 길게 뻗은 은빛 백사장은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산행코스 : 성치마을 → 파상재 → 정상 → 파상재 → 송광암 → 중촌(5시간)

산행기점인 성치마을은 신평선착장과 금진선착장을 잇는 도로 사이에 위치해 있다. 신평선착장에서는 면소재지가 위치한 대흥으로 가는 버스를 이용, 성치마을 입구에서 내린다. 금진선창으로 들어설 경우는 선착장에 대기중인 금산버스를 타고 용동까지 간 다음 용동에서 신평행 버스를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