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생활/등산,여행

해오름예술촌·공룡발자국·물건방조어부림…

풍월 사선암 2009. 4. 21. 12:01

해오름예술촌·공룡발자국·물건방조어부림… 

 

아침부터 내리는 비와 잔뜩 찌푸린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태풍 속보를 들으며 이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과연 잘한 결정인가 하는 걱정도 든다. 그러나 한 달 전부터 준비해온 남해 여행이다. 아내와 아이의 기대가 무척 크다. 제발 태풍이 비켜가길 바라며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글·사진 박우섭 

 

우리 가족의 여행패턴은 휴양림 한곳을 숙박지로 정해 놓고 휴양림 반경 50km에 있는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 다만 서로의 목적이 달라 매번 여행지를 정하는데 있어 약간의 실랑이가 있는데, 얼마전부터 사진에 취미를 붙인 나는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선호하고, 아이의 경우는 어디든지 간에 무조건 뛰어놀기 좋은 곳을, 그리고 아내는 이곳저곳 되도록 많은 곳을 둘러보는데 목적이 있기에 다수결에 의해 여행지를 정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다. 항상 그렇듯 아내의 파워에 밀려 이번에도 역시 국토순례대장정을 방불케하는 빡빡한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쏟아지는 폭풍우를 뚫고 마침내 남해 편백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나니 벌써 시간은 5시를 훌쩍 넘겼다. 다행히 남해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내가 서둘러 간단한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8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오느라 지친 아이에게 바람이라도 쐬어줄 겸 숲 속의 집 근처를 가볍게 산책했다. 아이는 일단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잔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이나 즐거워한다. 오늘은 일찍 자야만 내일부터 시작되는 강행군에 낙오하지 않을 수 있다.

 

새벽녘이 되자 유리창이 날아갈까 걱정될 정도로 심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내일 관광이 어찌될까하는 걱정보다 오늘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잠을 설쳤다.

안개 낀 보리암 짧은 산행

 

다음날 다행히도 비가 그쳤다. 아직도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 맑아질 기미도 안보이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첫번째 목적지인 보리암으로 향했다.

 

미리 알아본 바에 의하면 보리암에 오르는 길이 꽤 험하다고 했다. 입구에서 공익요원에게 걱정스레 물어보니 약올리듯 웃으며 잘만 하면 타이어 타는 냄새 안나고 다녀올 수 있다고 한다. 헉, 보리암 오르는 길은 정말 험했다. 뒷좌석에 앉은 아이는 차가 뒤집어지네 마네 하며 호들갑에 난리가 났다.

 

정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차를 주차하고 대략 2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면 보리암이 나온다. 아이에게도 그다지 힘들지 않은 코스. 그런데 올라가면서 이미 보리암을 보고 내려오시는 분들께 물어보니 안개가 심해서 바다는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긴 산에 오르면서도 시야는 10m도 채 되지 않는 짙은 안개 속이다.

 

사진 촬영은 포기해야 하나보다며 한참을 투덜대며 올라갔는데, 다행히도 심한 안개는 걷혔다. 먹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감동을 줄 만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제법 바다와 인근 마을도 보인다. 날씨가 맑을 때 온다면 남해의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그런 곳일 듯 싶다. 누가 특별히 강요한 것도 아닌데도 아이는 절에 오면 항상 불상 앞에서 삼배를 드린다. 뭘 알아서 그러는 것은 아닌듯 싶고 아마도 예전에 할머니를 따라 몇 번 절에 다녀온 뒤부터 절에 오면 으레 그래야만 하는걸로 생각하는 듯 싶다.

 

자동차에서 타는 냄새 별로 안나고 무사히 보리암에서 내려왔다. 산행이라고 하기엔 걸어서 오른 거리가 좀 짧긴 했지만 어쨌거나 늘 산을 오를 때면 아이와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곤 한다. 힘들다, 내려가자, 업어줘(헉, 이녀석 자기가 얼마나 무거워졌는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긴 하겠지만 내 경우엔 어릴적부터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다녔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보이스카웃 활동을 하며 야영을 많이 해서인지 바다보다는 산을 더 좋아하는데 이 녀석은 나와는 정 반대다. 한두 번을 제외하곤 산에만 가면 머리가 아프네 졸리네 핑계를 대며 중도 하산하기 일쑤였다. 이번 가을 예정된 억새 산행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사진 찍기 참 좋은 곳인데….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나는 해오름예술촌

하룻밤을 더 보냈지만 역시 날씨는 흐리다. 아이는 아침부터 해수욕장을 다시 가자고 떼를 쓰지만 날씨도 흐린데다 비가 내린 후로는 기온도 뚝 떨어졌다. 오후에 날씨 봐서 가보자고 달래며 약간의 협박도 곁들여서야 겨우 오늘 일정에 올랐다. 첫번째 목적지는 해오름예술촌. 2층짜리 자그마한 폐교를 개조해서 1층에는 개인이 하나 둘 모아둔 골동품들(개인이 이렇게 많이 모아놓다니!!)을 전시해 놓고 2층에는 일정 기간마다 다른 예술품을 전시해 놓는 그런 곳이다.

 

1층엔 7~80년대의 교실풍경과 아이스께끼통, 조개탄 난로와 그 위에 올려진 양철도시락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어 유년시절의 추억에 빠져든 아빠 엄마를 아이처럼 들뜨게 만들었다. 야호, 엄마 아빠 신났다!

 

“재경아 옛날엔 말야 저 통에다가 드라이아이스가 든 고무주머니를 넣어놓고 아이스크림 팔았다?” “옛날엔 저기에다가 석탄 넣고 불피웠거든. 난로란건데. 저 위에 올려놓은게 도시락이야 도시락~ 야, 저거 좋은 자리에 올려놓으려구 얼마나 치열했는데. 응? 아 저기 제일 밑에 도시락 놔두면 너무 뜨거워서 밥이 다 누룽지가 돼버렸거든!”

 

그랬다. 그때 그 시절엔 그렇게들 살았다. 지금처럼 쾌적하고 풍족한 그런 삶은 아니었지만, 지금보다 더 인간냄새 나는, 그래서 떠올려도 떠올려도 유쾌하기만 한 엄마아빠의 소중한 어릴적 이야기.

 

그런데, 흥분해서 한참을 떠들다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목적과는 달리 이 녀석은 그저 처음 보는 물건에 대해 신기해할 뿐. 겪어보지 못한 그 시절의 얘기가 그다지 와 닿지는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이녀석은 마당 한구석에서 키우는 송아지만한 말라뮤트에 더 관심이 많다. 엄마 아빠의 표현력 부족일까? 아니면 아직은 ‘향수’나 ‘추억’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기엔 아이가 너무 어린 것일까?

 

음… 이번 스케줄은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아님 말고, 우리 가족은 여행에 뭐 아이의 교육이니 이런 거창한 목적을 두진 않는다. 비록 세 명뿐이긴 하지만 우리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라도 만족한다면 그걸로 다행인 게다.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 이건 꼭 영화 ‘삼총사’에만 나오는 대사는 아니다!

 

해오름예술촌에서 나온 후 이어진 강행군. 해일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천연기념물 물건방조어부림, 아이가 좋아하리라 생각하며 찾아간 가인리 공룡발자국 등 꽤나 여러 군데를 다녀봤지만 아이의 만족도는 영 오를 줄을 모른다. 그래, 이런 게 바로 눈높이 교육의 필요성이구나 라는 것만 절실히 느끼고 하루 일정을 마쳤다.

 

역시 아이들에게는 맘껏 뛰어 노는 것 이상은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