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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실록 요점정리(24대~34대)

풍월 사선암 2009. 2. 8. 17:23

■ 제24대 원종 1219년-1274년. 재위기간 1259년 1274년 15년. 41세-56세.

● 원종의 친원정책과 무신정권의 종식


원종시대는 무신정권의 말기이자 원의 고려복속정책이 본격화 되던 시기로서 고려조정은 왕실중심의 친몽파와 무신들이 이끄는 반몽파로 갈라진다. 원종은 1241년 태자에 책봉되고 1259년 4월 몽고와의 화의정책에 따라 고종을 대신해서 몽고에 입조했다. 그 해 6월 고종이 죽자 실권자 김준은 고종의 둘째 안경공창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1259년 6월 원종은 41세의 나이로 왕에 올랐으며, 그가 몽고에 가있는 동안 김준 등 무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태손 심이 왕위를 지키고 이듬해 3월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와 비로소 왕위를 받았다.

 

원종이 몽고를 방문 했을 때 몽고는 쿠빌라이와 아리패가가 왕위를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헌종의 아우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쿠빌라이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그를 일국의 왕으로 대접하였다. 이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몽고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을 하였는데, 오직 고려만이 30년을 항전하며 항복하지 않는 것에 대한 특별한 대우였다. 후에 쿠빌라이는 자신의 딸과 충렬왕(태자심)을 결혼시켜 사돈관계를 맺게 한다. 고종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하 속리대로 하여금 원종을 호위하게 하였고 이같은 쿠빌라이의 호의적인 태도를 접한 원종은 그 후부터 다소 친몽적 경향을 띠게 된다.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진이후 왕은 형식적으로는 왕권을 되찾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힘이 없었다.원종은 몽고측의 출륙환도와 무신들의 강화도 고수 주장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심 몽고의 힘을 이용하여 무신들에게 뺏긴 정권을 환수하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지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의지는 무신들의 강한 반발로 한동안 실행되지 못한다. 새로운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김준이었다. 최의를 제거하던 당시에는 유경이 권좌에 있었으나 권력 투쟁이 전개되는 과장에서 난을 실질적으로 주도 했던 김준이 유경을 밀어 내고 권좌에 오르게 된다. 이 때문에 강화 궁궐에 도착한 원종은 정사는 뒷전으로 미루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 한편으로는 무신정권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몽고와의 유대관계 강화에 주력 한다.


원은 1268년 고려에 송나라 정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하였고 김준 부자 및 아우 김충으로 하여금 원병을 이끌고 연포로 올 것을 요구했는데 김준은 몽고에 가면 권좌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생각에 원나라 사신을 죽이고 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원종은 김준의 이같은 의견에 반대 했다. 그러나 그 후 김준 부자와 김충은 몽고를 다녀왔고 이후 김준과 원종 관계는 매우 악화 된다. 김준은 몽고의 사신을 영접하는 일이 없었고 몽고의 요구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몽고 사신에게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원종은 김준을 극도로 미워 하였고 급기야 1268년 12월 원종은 임연을시켜 김준과 김충을 살해케 했고 김창세, 허인세 등의 도당들도 함께 제거되자, 원종은 개경환도를 서두르며 친몽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던 임연은 원종의 이같은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임연은 재상들을 모아 원종을 폐립하기로 결정하고 왕의 친서 형식을 빌어 원종의 병이 위독하여 안경공 창에게 선위 한다는 서신을 원나라에 보냈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을 폐위하고 창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태자 심(충렬왕)은 몇 개월 전에 몽고로 떠나 그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국왕폐립 사건에 대해 추궁하고 몽고측은 원종과 안경공창, 임연 등을 연경으로 호출한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임연은 그 해 11월 대신들과 의논한 뒤 안경공을 폐위하고 원종은 5개월만에 왕위를 회복시켰다. 며칠 뒤 원종은 왕창과 함께 쿠빌라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몽고로 떠났다. 1270년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오면서 바로 개경환도를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류무는 방호사 및 각 산 성별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육지로 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개경환도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이에 원종은 임유무를 제거한다. 이로써 일 백년 동안 지속되던 무신정권은 종식되었고 40년 가까이 머무르던 강화도 궁궐시대도 끝이 났다. 1273년 마지막 반몽세력인 삼별초가 몰락하자 고려조정은 거의 원에 복속 되었으며, 1274년에는 원나라의 매빙사가 와서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자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민간에 혼자 사는 여자와 역적의 처,노비의 딸 등을 뽑아 원에 공녀로 보내는 처지가 된다. 또한 이해에 태자 심이 원의 부마가 됨으로써 고려에 대한 원의 입김은 더욱 강화된다.


■ 제25대 충렬왕 1236년-1308년. 재위기간 1274년-1298년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7월 39세 -73세.

●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 국으로 전락한 고려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친원 정책덕분으로 고려 왕실은 오히려 무신정권에게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되고 이에 따라 조신들의 힘은 미미해져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 전반에 변발과 호복 차림의 몽고 풍속이 만연하여 고려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 간다. 충렬왕은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있던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 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1272년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렀으며 1274년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 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되었다. 친원 정책을 표방한 충렬왕은 즉위 4개월만에 원의 요구로 일본 정벌을 단행한다. 일본 정벌을 위해 몽고군과 한족 연합군 2만5천을 동원하였고 뱃길 안내자 및 수군 6천7백명이 가세하여 총 4만여 군사가 9백여척의 배에 나눠타고 일본 정벌길에 올라 대마도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일본 본토로 나가지 못하고 회군하였다.원은 다시금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1281년 에는 15만의 여원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태풍우로 인해 본토 진입에 실패하고 원 세조는 지속적으로 고려 조정에 일본정벌을 강요하여 민간의 피해가 극에 달했다. 그런 가운데 1290년에는 원을 괴롭히고 있던 내안의 합단군이 고려에 내침하여 충렬왕이 조신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 하는 지경에 이런다. 합단은 한때 원주와 충주를 함락하고 개경을 위협하는 등 고려군을 궁지로 내몰았으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1년 반만에 종결됐다.


설상가상으로 북방야인과 왜구들의 침입마져 잦아졌고 고려사회는 더욱 불안 해지기 시작한다. 원은 고려의 행정관제를 자신들보다 격하시킬 것을 주장하고 묘호에 조나 종 대신에 왕을 붙이도록 했고 왕의 시호 앞에는 일괄적으로 충자를 붙이도록 강요하였다.또한 宣旨는 王旨로 짐朕은 고孤 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는 세자로 격하되었다. 충렬왕은 점차 몽고에서 배운 사냥에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그의 총애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궁인 무비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졌다. 이 때문에 제국대장 공주와 세자 원의 반발이 심했지만 충렬왕의 잦은 사냥과 폐행은 계속되어 일부 신하들의 권력독식이 심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충렬왕과 세자간에 알력이 생겼고 세자는 1296년 원에 가서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된다. 이듬해 5월 세자원의 모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여 충렬왕과 세자간의 알력은 더욱 심해진다. 세자원은 그해 7월에 귀국하여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 등을 죽이고 그들의 도당 40 여명을 귀양 보낸후 다시 원나라로 떠난다.

 

이로써 원 왕실은 세자 원을 지지하게 되고 충렬왕은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물러 나겠다는 글을 원에 보낸다. 충렬왕이 물러남에 따라 1298년 1월에 세자원이 즉위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충선왕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고려 제도를 복원 하는등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려고 하다가 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원에 무고하는 바람에 즉위 7개월 만인 그 해 8월에 국새를 빼앗기고 왕위는 다시 충렬왕으로 넘어가고 충선왕은 원으로 압송당한다. 이후 충렬왕은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위해 왕위를 10촌 종제인 서흥후 전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그에게 개가 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한다. 그는 이일을 성사 시키기 위해 1305년에 직접 원나라를 방문하여 2년간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1307년 정월에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이 무종의 옹립에 공을 세워 힘이 강해지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무산 된다. 무종의 신망을 얻은 충선왕은 그 후부터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아직 태자로 있던 무종의 힘을 빌어 그 동안 자신과 부왕 사이를 이간질 시키던 왕유소, 송영방, 송린,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 및 그 일당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충렬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모든 정사는 충선왕이 주관하게 된다.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 행을 강행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1307년 4월 귀국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308년 7월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 제26대 충선왕 1275년 -1325년. 재위기간 1298년 1월-8월. 1308년 7월-1313년. 총 5년3개월.

● 충선왕의 傳旨 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심지어는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증되고 한편에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된다. 충선왕은 즉위후 2개월을 제외한 재위기간 전부를 원나라 연경에서 보냈고 이로 인해 고려조정은 항상 불안한 날을 보내야 했다. 충선은 1277년 1월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8년 정월에 태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을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왕비 계국공주와의 불화로 그해 8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1308년 7월 충렬왕의 뒤를 이어 복위하였다. 충선왕은 즉위하자 관제개혁을 실시하고 고려관제를 복구하는등 다소 반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일명 '조비무고사건' 으로 불리는 일이 발생한다. 세자비 였던 조인규의딸 조비와 충선왕의 금실이 너무 좋자 이를 시기한 왕비 계국공주에 의해 발생한다.


계국공주는 조비가 충선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이를 질투하여 편지를 써서 원의 황태후에게 전하게 된다. 공주는 충선왕이 조비만 총애하여 자신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관직을 변경하여 반원적 차원에서 처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그 결과 조비를 비롯한 최충소와 장군 유온이 순마소巡馬所 에 갇히고 조인규와 그의처 는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원나라로 압송된 조인규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허위 자백을 하였고 조비와 내관 이온이 다시 원으로 압송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충선왕은 궁지에 몰리고 충렬왕 지지세력이 충렬왕의 복위를 도모한다. 이 때문에 1298년 8월 충선왕은 즉위 7개월만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으로 호송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충선왕이 새롭게 설치했던 관청과 관직도 모두 혁파되고 충렬왕대의 것으로 복원되었다. 원으로 호송된 충선왕은 그후 10년 동안 연경에 머문다. 그리고 충선왕은 원 왕족간의 왕위다툼에 가담하여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고 이었고 자신이 지지하던 무종이 차기 왕으로 유력시되자 사태는 반전 되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원에 갔던 충렬왕은 되레 충선왕에 의해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모두 잃고 왕권 마져 상실한다. 그리고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은 다시 왕좌에 앉는다. 10년만에 왕위를 되찾은 충선왕은 즉위하자 조신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조세의공평, 인재등용의개방 공신자제의 중용, 농장업의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횡포 엄단 등 혁신정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는 고려의 왕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지 즉위 두달만에 숙부인 제안공 왕숙에게 정권을 대행케 하고 다시 원으로 건너갔다. 때문에 개혁안은 허사가 됐고 고려 조정은 연경에 머무는 충선왕의 傳旨 에 의해 국정 전반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조신들은 개경과 연경을 오가며 국정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전승 최유업이 극언으로 귀국할 것을 상소 했지만 충선왕은 원나라 왕실의 후한 대접을 잃게 될까 봐 귀국하지 않았다. 당시 충선왕은 원 무종의 신임을 받아 심양왕에 봉해져 있었으며 심지어는 무종이 심양의 관리들에게 충선왕을 거치지 않은 청원이나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따라서 충선왕은 이같은 절대적인 힘과 배경을 포기할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세자 왕감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충선왕은 세자와 그의 측근들을 죽이면서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였고 이로 인해 엄청난 물자가 매일같이 연경으로 이송되어야 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자 1313년 3월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극단적 조치를 내리고 신하들의 환국압력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때 충선왕이 이복형 강양공 왕자의 둘째 아들 왕고를 세자로 세우는 바람에 후에 충숙왕과 왕고간에 치열한 왕위 다툼을 유발시킨다. 이렇듯 원 왕실이 부여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던 충선왕은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을 세워 그 곳에서 당대 명류들과 학문을 교류하기도 했고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내 그들과 교류하게하여 고려학문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316년에는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 왕고 에게 물려주고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이처럼 무종, 인종 대를 거치면서 원 왕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동시에 누렸다. 하지만 1320년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자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원 왕실로부터 심한 환국 압력을 받아야만 했다. 거기다 고려 출신인 환관의 모략에 말려들어 토변으로 유배되고 1323년에 태정제가 즉위하여 겨우 풀려나 연경으로 돌아갈수 있었으나 1325년 5월 중국 연경에서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하였다.


■ 제27대 충숙왕 1294년-1339년. 재위기간 1313년 -1330년 .1332년 2월복위 - 1339년 2월. 24년

●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전한 왕위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 에게 물려 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이같은 충선왕의 이해 못할 행동은 고려조정을 왕위 쟁탈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 간다.이 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 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위기 상황에 몰린다. 1313년 3월 원나라의 심양왕 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충숙왕은 충선왕이 즉위전부터 원나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어린시절을 거의 원나라에서 보냈다. 충숙왕 에게는 감이라는 형이 있었는데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고 1310년 조정대신들이 충선왕의 환국을 청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몇몇 조신들이 세자 왕감을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려 하자 이미 충렬왕과 부자간의 세력다툼을 벌여본바 있는 충선왕은 세자 왕감과 그 주변 인물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충숙왕은 냉혹한 정치적 결단의 희생자가 된 동복형 왕감을 대신하여 고려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충선왕은 이복형 왕자의 아들인 조카 왕고를 총애하여 그를 세자에 세우니 왕고는 지속적으로 왕위찬탈의 음모를 꾸며 충숙왕을 곤경에 빠트리곤 한다.


원나라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1315년 원나라의 강요로 귀족과 천민들의 옷 색깔을 다르게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1316년에는 상왕인 충선왕이 자신의 심양왕 자리를 조카이자 세자인 왕고에게 넘겨 줌에 따라 왕위를 위협받게 된다. 심양왕에 오른 왕고는 원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되자 그 힘을 바탕으로 고려 국왕의 자리를 넘보게 되고 충숙왕은 왕고의 형인 왕유를 단양부원대군으로 동생인 왕훈을 연덕부원대군으로 봉하여 심양왕 왕고 에게 화합의 손길을 내밀었다. 1316년 7월 충숙왕은 원나라 영왕의 딸 복국장공주와 결혼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된다. 하지만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온지 3년만 인 1319년 9월 의문의 죽음을 남기고 죽는다. 이 당시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충숙왕은 덕비홍씨를 잊지 못하고 자주미행을 나갔으며 정사를 뒷전으로 하고 사냥과 주색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미행을 나갔다가 백성을 만나면 구타하는 일이 잦았고 왕의 폭력적인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주의 부고가 원나라에 전해지자 사인규명을 위해 선사 이상지를 개경으로 보내 수사하게 하였다.


공주의 궁녀와 요리사 한복만을 가두고 심문을 하자 1328년 8월 왕이 연경궁에서 덕비홍씨와 노는 것을 목격한 공주가 질투를 하다가 왕에게 얻어맞아 코피가 난 일과 그 다음날에 다시 유련사에서 왕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당한 일을 실토한다. 이렇게 되자 원의 이상지는 궁녀1명과 요리사 한복만을 원나라로 압송해갔고 충숙왕은 중서성에 공문을 보내 한복만이 거짓진술을 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충숙왕은 원 왕실의 불신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320년 원에서는 영종이 새롭게 즉위 하였고 심양왕 왕고는 영종의 신임을 받으며 충숙왕을 강하게 비토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충숙왕은 밤마다 연회를 열고 술에 젖어 살았으며 국고가 탕진되자 내서사인 안균을 경상도에 파견하여 돈을 거두게 하여 향락생활을 지속하자 대신들의 불만이 심화 되었고 왕은 상소를 올린 대신들을 마구 구타하여 조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같은 충숙왕의 행태는 왕고를 통하여 원 왕실에 보고되었고 1321년 3월 원나라 입조명령을 받아 충숙왕은 왕유에게 서무를 대리하게하고 연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약 3년 동안 원나라에 붙잡혀 있으면서 왕위를 노리고 있던 왕고의 협박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이 당시 충선왕은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영종의 명령을 거부 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상태였고 충숙왕은 거의 폐위된 상황 이었다. 왕고파인 유청신, 오잠 등은 원나라 도성에 서면을 보내 고려 국호를 폐하고 고려를 원에 편입시켜 성을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하자 원 왕실은 이같은 터무니없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의 영종이 죽고 태정제 진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태정제는 유배중이던 충선왕을 다시 호경으로 불러들이고 충숙왕을 풀어준다. 그래서 3년 가까이 왕위를 상실한 체 호경에 머물고 있던 충숙왕은 1324년 2월에 개경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왕고의 왕위찬탈 위협이 계속되자 충숙왕은 원의 지원을 받기위해 다시금 원나라 위왕 아가목의 딸 금동공주(조국장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충선왕도 충숙왕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태정제에게 충숙왕의 무고함을 간언한다. 하지만 이듬해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고 산고로 인해 18세의 어린 나이로 횡사한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다시 궁지에 몰린다.


충숙왕의 입지가 약해진 틈을타 왕고의 왕위 찬탈음모가 다시 진행되고 왕고파인 유청신과 오잠이 원나라 중서성에 가서 충숙왕은 눈이 멀고 귀먹은 벙어리라 친히 정사를 돌볼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충숙왕은 왕자 정을 세자로 책봉하여 원에 입조케 하였다. 충숙왕을 접한 원 매려는 유청신과 오잠이 거짓말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왕고가 심양왕직에 있기 때문에 고려 세자를 겸할수 없다는 충숙왕의 설명을 듣고 모든것이 왕고파의 무고라는 사실도 알게된다. 이 일로 입지가 강화된 충숙왕은 왕고의 도당인 조신, 김온, 권하, 전굉 등을 순군옥에 가두어 귀양 보내는 등 왕권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몸이 약해져 1330년 2월 세자 정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앉아 있다가 그해 7월 원나라에 가서 머물렀다.


하지만 충혜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음탕한 것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1332년 2월 복위 하였다. 복위한 충숙왕은 원에 머물러 있으면서 민상정과 조염휘를 파견하여 정승 윤석을 비롯한 수십명에 대하여 왕을 잘못받든 죄로 삭직하고 유배 시켰다. 그리고 몽고여자 경화공주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원나라가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케하고 공녀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 하도록 청원하는등 몇가지 업적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대인 기피증이 심해져 신하들을 멀리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복위 8년 만인 1339년 지병이 악화되어 46세를 일기로생을 마감하였다.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 사이에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았다.


■ 제28대 충혜왕 1315년-1344년.재위기간 1330년-1332년. 1339년복위-1344년. 6년간 16세에 즉위.

●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


1330년 2월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16세에 왕에 올랐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나라를 통치할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져 포악하여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젖어 지냈다. 즉위후 6일동안 정사를 페하고 사냥을 즐기는가 하면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다. 또한 배전,주주 등에게 국가의 정책을 일임하여 일부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극대화되고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몹시 싫어 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같은 폐정이 2년동안 지속되자 원 왕실은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여 근신명령을 내리고 충숙왕을 복위 시켰다. 하지만 연경에서 충혜왕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자 1336년 12월 고려로 돌려 보냈다. 그리고 1339년 3월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은 복위 하였다.충혜왕은 닥치는 대로 음탕한 짓들을 일삼기 시작했는데 1339년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권씨를 강간하였고 8월에도 역시 부왕의 후비인 숙공휘령공주를 강간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서모까지도 서슴없이 강간하던 충혜왕 이었기에 일반 민가의 아녀자들에 대한 이 같은 행위는 이루 헤아릴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 가운데 원나라 조정은 그 해11월 중서성 단사관 두린과 직성사인 구통을 개경에 파견하여 충혜왕 에게 국새를 내려 복위를 인정하였다. 이들은 숙공휘령 공주를 찾아 원나라 왕이 보낸 술을 건넷는데 이때 공주는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한 사실을 고하였다. 그러자 두린 일행은 수하들을 시켜 충혜왕을 비롯한 홍빈, 조운경 등을 포박하여 연경으로 압송하였다. 원나라로 압송 당한 충혜왕은 1340년 3월 형부에 갇혔고 김인, 김륜, 홍빈등도 함께 갇혀 심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은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풀려나 4월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무렵 원나라에서는 고려출신 여자 기씨를 순제의 제2왕후로 삼았는데 그녀가 바로 기황후로 기철의 누이 동생이었다. 충혜왕의 음행은「고려사」에 기록된 강간 사건만 수없이 기록되고 있는데 기록되지 않는일을 합한다면 충혜왕의 음행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1343년 3월 어느날 밤에는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으려다 횃불이 옮겨붙어 누각을 불태운 일이 있었고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 민가 백여채 를 헐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 하기도 하였다. 충혜왕의 이같은 학정이 계속되자 기철 등은 원나라 조정에 고하여 충혜왕의 폐정이 극에 달했다며 그를 소환하여 폐위 시킬것을 건의 하였다. 충혜왕의 악행을 보고받은 원나라 조정은 협의 끝에 그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 등 6명을 보냈다. 이들은 하늘에 제사할 것 과 대사령을 반포하는 원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는 핑계를 댓고 충혜왕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정동성으로 갔다. 이때 타적이 발로 왕을 걷어차 포박하여 원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왕과 함께 있던 백관들은 대부분 도주 하였다.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의 결정에 따라 게양현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에 앞서 내려진 원 순제의 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써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 먹는것이 너무 신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로 온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하였다. 충혜왕은 유배가던 중 악양현에서 1344년 정월 30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에 백성들은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다.


■ 제29대 충목왕 1337년-1348년. 재위기간 1344년 - 1348년. 4년간. 즉위 7세-12세.

● 어린 충목왕의 즉위와 덕령공주의 섭정


1344년 2월 고룡보가 여덟살 먹은 세자 흔을 안고 원나라 순제를 찿아 갔더니 순제가 흔에게 물었다. "너는 아비를 본받으려고 하느냐 ? 아니면 어미를 본 받으려 하느냐 ? " 이에 흔이 어미를 본받겠다고 말하자 순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교지를 내려 그를 고려 제29대 왕으로 책봉했다. 그리고 그의 모후 덕령공주가 섭정을 시작했다. 충목왕은 서연에서 우정승 채하중을 비롯한 수십명의 신하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정치와 예의를 익혔다. 1347년 정월에는 쌍성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의 숫자를 파악하게 하고 또한 각도에 파견하여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덕령공주가 국가 기강을 바로 잡으며 경제 재건에 힘쓰고 있는 동안 충목왕은 급속도로 병약해져 1348년 8월에는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덕녕공주는 충목왕의 거쳐를 건성사로 옮겨 요양토록 하고 자신은 밀직부사 안목의 집에 거쳐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정사를 처결하였다. 충목왕은 모후 덕령공주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제30대 충정왕 1338년-1352년. 재위기간 1349년-1351년. 2년간. 12세-15세.

● 충정왕의 짧은 통치와 비참한 최후


충목왕이 죽자 고려조정 내에서는 왕자 저를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래서 노정, 손수관, 이군해 등이 그를 데리고 연경으로 떠나려 하자 전법관들이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사신의 힘에 밀린 전법관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연경에 도착한 왕자 저는 그해 5월 순제로부터 왕에 책봉되어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이때부터 덕령공주와 충정왕의 모후 윤씨 사이에 치열한 세력다툼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세력다툼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1350년부터 경상도 일원을 중심으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왜구의 만행이 진행되자, 민심은 흉흉하였고 관리들은 출전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고 오히려 왜구를 피해 피난을 떠나는 마당이었기 때문에 고려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렇게 전국이 왜구로 인해 뒤숭숭한 가운데 원나라 순제는 고려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 왕기를 왕으로 세웠다.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되고 몇 개월을 그곳에서 지내다가 이듬해 3월 공민왕에 의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독살되었다.


■ 제31대 공민왕 1330년-1374년 . 재위기간 1351년 1374년 22년간. 22세즉위.

●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 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


14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배원 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하여 국권을 되찾고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려 한다. 이로써 고려는 1백여 년간 지속된 원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몽고 풍속을 없애고 친원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일곱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관제 개혁을 실시하여 문종시대에 완성된 관제를 복구 하였다. 정방을 폐지하고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고 1366년 신돈의 주도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귀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 소유주자 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게 된다. 공민왕은 1352년 8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옛날에 임금들은 일심전력하여 나라를 다스릴때 그 나라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친히 국가의 정무를 봄으로써 자기의 견문을 넓히고 하부의 실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 그렇게 할때다. 참의사,감찰사.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모두 판결 송사에 대하여 5일에 한번씩 계를 올리도록 하라" 이러한 명령은 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공민왕의 강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변을 일으켜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후 공민왕은 조일신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한다. 그리고 이제현을 우정승에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1352년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 시켰으며 1356년 에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 하였다. 정동행성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기철을 숙청했으며 이자춘의 내조에 힘입어 원나라 복속이후 일백년간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승려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승직에 관한모든 권한을 대행토록 하는등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기도 한다. 1356년 7월 고종말년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다시 친원 정책으로 돌아서고 1355년 홍건적은 국호를 송이라 하고 고려를 침범한다. 1361년에 다시 대대적인 2차 침입을 감행한다.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개경의 궁성이 완전히 전소되고 각도의 문화재와 사찰이 불타는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되자 반원정책을 포기하고 1361년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였다. 1363년 찬성사 김용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공민왕은 안도적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고 반란은 최영과 오인택 등에 의해 제압된다.


1356년 2월 노국공주가 산고끝에 죽음응 맞이하자 공민왕은 절망에 사로 잡히게 되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왕사 신돈 에게 정권을 내맡겨 조신들을 견제토록 한 후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에 전념 하였다. 신돈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자 공민왕은 신돈이 부담스러웠고 이를 눈치챈 선부의장 이인이 1371년 7월 신돈을 역모로 고변하자 공민왕은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 시킨후 처형했다. 신돈이 제거된 후 공민왕은 즉위 초의 개혁적인 성향은 거의 찾아볼 수없고 자주 술에 취해 있거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미행을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이때부터 공민왕은 변태적인 행동을 자주하였다. 관음증에 빠지기도 하고 자제위를 두고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고,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하여 홍륜, 한안등을 시켜 왕비를 강간토록 하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자기 자식으로 삼으려 하였다.


1374년 9월에 그는 내시 최만생 으로부터 익비가 아이를 잉태 했다는 보고를 받고 익비의 몸속에 있는 아이를 완전히 자기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최만생에게 왕비와 같이 잔 홍륜과 그 무리를 죽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일을 안 최만생도 죽이려 하자 최만생은 홍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그들은 침전에 침입하여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죽인다. 최만생과 홍륜 일당은 그 다음날 모두 체포되어 죽거나 유배됐다. 익비 한씨는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될 때 조민수는 그녀에게 국새를 맡겼다. 그래서 그녀는 이성계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이성계등이 창왕을 폐하자 이성계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양왕을 왕으로 세우라는 교서를 내렸다. 정비 안씨는 우왕, 창왕, 공양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 옹립 교서를 내리게 된다.


■ 제32대 우왕 1365년-1389년. 재위기간 1374년 1388년. 재위13년간. 10세에 즉위.


1374년 공민왕이 최만생, 홍륜등에 의해서 살해되자 살인범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 등은 우를 고려 제32대 왕으로 옹립하는데 이때 우왕의 나이는 겨우 10세였다. 공민왕은 자신이 살해 당하던 달인 1374년 9월 이미 사망하고 없던 궁인 한씨를 왕우의 생모라고 말한 다음 한씨의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 또한 우왕 즉위후 에 순정왕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그러나 정작 우왕의 친모인 반야는 우왕 2년에 자신이 왕의 친모라고 주장하다가 이인임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임진강에 수장되고 만다.


공민왕이 우왕의 친모를 궁인 한씨라고 말한 것은 반야가 신돈의 여종 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개국공신들은 반야가 낳은 아들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다.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 홍씨도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 하고 우를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


1378년에는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부여와 공주를 침입하여 목사 김사혁을 패주시키고 공주를 점령한 사건이 발생하자 고려 조정은 왜구 소탕 작전에 나서서 1376년 에는 최영이 논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1380년에는 나세, 최무선 등이 화약과 화포로 적선 5백여 척을 불사른다. 또한 이해에 황산에서 이성계가 왜구를 대파하고 1383년에는 정지가 서남해 에서 수백척의 적선을 궤멸시킨다. 1388년 명나라에서는 일방적으로 철령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귀속 시키겠다고 통보해왔다. 철령이북이 원나라에 속해 있으니 당연히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조정은 회의를 거듭 하게 되고 결국 우왕은 최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을 정벌하기로 한다. 한편으론 밀직제학 박의종을 시켜 철령이북 지역은 옛부터 고려영토였다는 편지를 명나라에 보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는 왕득명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통고를 고려 조정에 보내 왔다. 이에 우왕은 요동정벌을 위해 요동진 공격 계획을 수립하고 8도에서 군사를 징집 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 해 5월 출병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5만 군사와 함께 압록강의 위화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불어난 물 때문에 진군을 못하고 있었고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하자 우왕에게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여전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와 협의하여 군사를 돌려 회군을 단행한다. 회군에 성공한 이들은 최영과 그의 측근들은 체포 되어 유배지로 떠났으며 우왕도 폐위 되서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다시 1389년 11월 강릉으로 이배 되었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에 능도 마련되지 않았으며 실록도 편찬되지 않았다.


● 최영의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최영의 요동 정벌 - 1388년 명나라에서 고려의 철령이북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예속시키겠다는 통보를 해 오면서 고려와 명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요동부의 관리를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려 하자, 최영은 우왕에게 주청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최영의 요동정벌론을 받아들인 우왕은 전국5도의 각 성에 성을 수축할 것을 명령하고 군사를 서북방면에 집중배치 하여 명나라의 급습에 대비하였다. 한편 개경의 방비군을 동원하여 한양의 중흥성을 축조하였다. 이는 전쟁상황에서 왕족을 중흥성에 이주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무렵 우왕은 자신의 신변안정을 위해 최영의 딸을 영비로 삼았다. 최영은 전쟁준비를 하면서 요동정벌에 강하게 반대했던 공산부원군 이자송을 죽여 버렸다. 그 무렵 명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이에 우왕은 문하찬성사 우현보에게 명령하여 개경을 지키게 하고 요동진격을 준비하였다. 그러자 이성계는 요동공략에 반대하며 ‘사대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정벌계획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출병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성계는 군대를 서경에 머물게 하였다가 가을에 출병 하는게 좋겠다고 주장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 요동정벌에 출병한 병력수는 좌우군을 합쳐 총5천여 명, 동원된 말은 21682필이었으나 적군의 사기를 죽이기 위해 10만 병력이라고 말했다.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1388년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

왜구의 토벌이 한창 진행되던 우왕 말년에, 고려와 명 나라 사이에 영토 싸움이 일어났다. 명은 원의 쌍성 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땅을 그들의 직속령으로 만들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이에, 고려의 조정은 크게 분개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요동정벌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견이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쪽은 싸움에 나가라고 주장 하였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쪽은 국내외의 상황으로 보아 요동 정벌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반대하였다. (철령위 문제)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정벌군이 파견되었다. 고려에서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첫째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 운반이 곤란하며, 둘째 모든 군사가 싸우러 나간 틈을 타서 왜구가 공격해 올 것이고, 셋째 지금은 덥고 비가 오는 때라서 활을 붙인 풀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모두 병에 걸릴 것이고 냇째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니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로써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얼마 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쫒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한 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 제33대 창왕 1380년-1389년 . 제위기간 1388년 - 1389년. 재위 1년간 . 9세에 즉위.

● 어린 창왕의 짧은 치세와 신진세력의 득세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세력이 축출되고 우왕이 폐위되자 조정은 회군세력에 의해 장악된다. 차기왕을 세우는 문제로 이성계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는데반해 조민수 일파는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조민수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이색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로 하여금 창을 왕으로 세울것을 명령하는 교지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에 이색과 조민수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이성계는 병을 핑게로 사직을 청원 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과 협의하여 개혁을 단행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많은 신진 관료들이 이에 찬성하고 있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조준은 관제, 신분, 국방 등 국정전반에 대한 혁신을 주장하고 그 내용들을 이성계, 정도전 등과 협의하여 1388년 7월에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개혁소를 올렸다. 이때 조민수는 이들의 개혁안에 대해 지나치게 거부 반응을 보이다가 이인임과 친척관계로 한때 부정한 짓을 하였다는 조준의 탄핵을 받아 그 해 8월 창녕으로 유배 되었다. 조민수의 유배는 문하시중으로 있던 이색에게는 큰 타격이었지만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에 대한 주장을 억제하며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대세는 완전히 이성계파로 기울었고 이에 이색은 명나라 힘을 이용할 요량으로 창왕의 명나라 입조를 추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스스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 장단으로 가서 머물렀다. 창왕이 사람을 보내 여러번에 걸쳐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이색은 등정하지 않았다. 1389년 11월 우왕의 복위 사간으로 반 이성계파가 대거 축출되자 곧 창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보내 졌고 그 다음 달인 12월 신종의 7세손인 공양왕이 즉위하자 왕명을 받은 대제학 유구에 의해 창왕은 죽음을 맞이 한다. 우왕과 창왕과 마찬가지로 신돈의 후손이라 하여 실록이 편찬되지 않았다.


■ 제34대 공양왕 1345년 -1394년 . 재위기간 1389년 - 1392년 . 재위 2년간. 45세 즉위.

● 고려의 마자막왕 공민왕과 고려왕조의 최후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의 복위 사간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 진입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남은, 조준, 정도전등 급진 신진세력은 유교적 왕도 정치를 꿈꾸었고 역성혁명을 강행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철저한 유교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건파인 정몽주, 이숭인 등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유지 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여 사회 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역성혁명을 꿈꾸는 남은 등을 경계하며 제거할 기회를 노렸고 1392년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하러 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등청하지 못하자 4월에 정몽주가 조준, 남은, 정도전, 남재, 조박, 오사충 등의 급진파를 탄핵하여 유배시켜 버렸다. 이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아픈 몸으로 가마에 실려 부랴부랴 개경으로 돌아와야 했고 이방원은 이들 온건 개혁파의 실력행사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조영규 등의 수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한다.

 

이성계와 조준은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6월에 남은과 정도전을 유배지에서 소환하여 중책에 앉혔다.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 하면서 역성 혁명은 구체화 되었고 마침내 1392년 7월 정도전, 남은, 조준,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 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이들은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이성계는 고려 국왕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개국한지 474년만에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