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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실록 요점정리(1대~11대)

풍월 사선암 2009. 2. 7. 19:27

고려 왕조실록 요점정리


■ 1대왕 태조왕건 877년-943년 재위기간 918년-943년. 25년

●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본관 개성.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 정기대감이 되고, 900년 광주·충주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 배현경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 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 《계백료서》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개성)이다.

 

태조는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열세로 후백제에게 계속 패했으나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뒤 935년에 투항해온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직후 태조는 직접 政誡 1권과 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여 반포했다. 이것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방을 개척하여 만년에는 서북으로 청천강 하류 安州 지방에서 동북으로 永興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망명해오자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민족융합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거란과는 국교를 단절했다.


943년 죽기 얼마 전에 大匡 朴述熙에게 훈요 10조訓要十條를 남기면서 후세 왕들이 대대로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훈요10조를 통해서 볼 때, 태조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은 불교와 지리도참설, 유학이었다. 불교와 지리도참설은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유학은 정치의 실제적인 실천윤리로서 존중되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육성시켜 건국초기부터 많은 사찰을 지었고, 국내외의 고승을 극진히 예우했다. 943년 재위 26년 만에 죽었다. 건국초기 왕건은 정주유씨, 평주유씨, 경주김씨, 황주황보씨, 광주의왕씨, 충주의유씨 등 지방호족 딸들과 정략적으로혼인했다.


거란과는 적대관계 - 942년 10월 거란이 사신 30여명과 낙타50필을 보내와 고려와 화친을 제의하나 단호히 거절함. 왕건은 일찍이 거란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나라로써 친선관계를 맺을 대상이 못 된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거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사신은 섬에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다리 밑에서 굶겨 죽였다.

 

● 훈요십조 : 943년 병상에 누워서 후대 왕 들이 명심해야함 10가지를 박술희 에게 구술함.

01.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쟁탈을 금지할 것.

02.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03. 서열에 관계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04.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05. 서경에 일 백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06.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 하지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07. 상벌은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08. 차령산맥이남 공주강 외각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09.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졸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10.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 제2대왕 혜종 912년-945년. 재위기간 943년-945년. 2년 34세 사망.

● 왕자무의 태자책봉을 둘러싼 역학관계


고려실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초도 함께 소실되었다. 실록편찬은 바로 이때 소실된 사료의 복원차원에서 1013년 9월 현종의 명으로 '칠대 실록' 편찬에 착수한다.


사초 소실로 과거사를 알 수없자 나이 많은 노인을 찾아다니며 사료수집 작업을 벌이고 사료수집이 완료되자 그것을 토대로 '7대실록' 이 편찬되었다.고려실록 편찬 사료들이 이처럼 허술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혜종, 정종때의 왕위계승 다툼에 대한내막은 정확하게 기록될 수 없었고 왕규를 역적으로 기록한「고려사」의 역사평가에서 신빙성이 없는 자료와 정종, 광종의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있다. 태조가 죽자 혜종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있던 충주유씨세력과 신명순성왕후 소생들인 정종,광종 등이 본격적인 권력팽창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혜종은 박술희를 대광에 임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왕요와 왕소는 서경세력의 핵심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치고 박술희와 왕규에게만 의존하는 혜종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던 청주 유력가 김긍률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또한 견훤의 사위이자 왕요(정종)의 장인인 박영규와 박수경,수문 형제등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왕권은 점점 위축되어, 혜종은 침실을 옮겨 다니며 자야할 지경이었다. 왕규는 이러한 현실을 분통해 하며 혜종에게 왕요형제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역모세력을 엄단 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내주면서 화해의 의사를 타진한다. 비록 왕규와 박술희가 보좌를 받고 있긴 했지만 혜종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따라서 혜종은 왕요 형제와 화친하는 것이 가장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혜종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왕요 일파의 왕권위협은 더욱 가속화되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마침내 병을 얻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45년 9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있다.


■ 제3대왕 정종 923년-949년. 재위기간 945년-949년. 집권3년.

● 개경파와 서경파의 정권다툼과 왕요의 등극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 하기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 시작한다. 하지만 천도계획은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정종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 준다. 정종은 강인하고 고집스런 성품이면서 한편으론 불심이 깊고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정종은 겉으로는 강한척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백성들의 민심이 돌릴까봐 마음을 졸였고 또 한편으로는 즉위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인명을 죽인 것에 대해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즉위하자 곧 손수 불사리를 받들고 십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개국사에 봉완하기로 했고 곡식 7만석을 풀어 각 사찰에 전달하기도 했다. 죄책감이 원인이 되어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등 불교 진흥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다. 948년 9월에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 등이 말 7백필과 토산물을 바쳤는데 이때 손수 이 물건을 검열하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우뢰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들었다. 그로 인해 병상에 눕자 백성들은 부역에서 헤어 날수 있다 하여 좋아했고 이같은 민심을 전해들은 정종은 점차 기력을 잃었고 949년 3월 동복아우 왕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27세 때 정종이 죽자 서경천도 계획은 취소되었고 왕성건립도 중지되었다.


최승로는 「시무28조」와 함께 올린「5조 치덕평」을 통하여 서경 천도계획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종은 참으로 그릇되게 믿고 왕성을 옮길 것을 결정 하였습니다.그는 천성이 강한 반면에 고집을 고치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난폭하게 끌어 모아 공사를 일으켜 사람들을 고생시켰습니다. 그래서 비록 임금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옳다고 하는 일도 백성들의 마음은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원성이 일어났고, 재앙이 그림자처럼 빨리 나타나서 미쳐 서경으로 옮기지도 못한 채 영영 왕위를 떠났습니다'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친 자매로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이다. 태조의 제1비 동산원 부인도 박영규의 딸이다. 이같은 삼중결혼은 고려 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태조의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이뤄진 일로 보인다. 이는 후백제 세력을 달래는데 박영규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보여 준다.


■ 제4대왕 광종 925년-975년. 재위기간 949년-975년. 집권 26년. 25세 즉위.

● 광종의 강한 개혁작업과 호족들의 수난.


광종의 치세 첫 번째 시기 - 모색기 즉위7년까지.

두 번째 시기 - 왕권강화기 7년-11년.

세 번째 시기 - 호족숙청시기 11년- 집권 말 까지.

광종은 즉위 초부터 독자연호를 사용하고 951년 후주연호를 사용함 - 여진과 거란을 경계하기 위함.


■ 제5대왕 경종 955년-981년. 재위기간 975년-981년. 6년.

● 경종의 화합 정책과 호족 왕족들의 재등장.


979년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을 받아들였고 청새진(희천)에 성을 쌓아 변방의 안정을 모색한다. 이시기에 발해의 유민 수만명이 고려로 왔다는 것. 곧 요를 세운 거란족이 체제를 정비하고 남하하여 여진을 압박하고 동시에 고구려 유민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실시함을 의미한다. 또한 고려가 일시에 수만명의 이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안정된 상태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유배되어 있던 최지몽이 내의령에 임명되면서 고려 조정은 다시 한 번 역모의 소용돌이에 휘 말리게 된다.

 

혜종시절에 사천관으로 있던 최지몽은 왕규의 역모혐의를 고변한 인물로 정종과 광종의 즉위에 기여한바있다. 하지만 광종 재위시에 왕을 따라 귀법사에 갔다가 술에 만취하여 왕에게 주정을 한 죄로 외직에 나가 있다가 경종5년(980년)에 다시 등용된다. 이때 최지몽은 대광, 내의령관직과 동래군후의 봉작에 식읍 1천호를 받았다. 최지몽은 점성술이 능한데다 왕규를 제거할 때 깊숙이 관여한 바 있기 때문에 경종은 그의 예언적 능력을 정적 제거에 이용했던 것이다.


● 헌애왕후 : 997년 제7대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한다. 이때 목종의 나이는 18세 였으나, 그녀는 정권욕이 강했기 때문에 섭정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천추천에 거쳐 하였으며 스스로 천추태후라고 불렀다. 그녀는 섭정기간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아들로 하여금 목종의 대를 있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신들은 안종과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대량원군(현종) 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고자 하였다. 당시 대량원군은 헌애왕후의 강요로 머리를 깍고 삼각산 신혈사에 머물렀는데, 그녀는 그를 죽이기 위해 몇 번이나 자객을 보내고 독살을 계획 하지만 실패한다.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헌애왕후의 인척들을 귀양 보낼때 그녀도 황주로 내쫓긴다. 이때 강조는 목종을 죽이고 대량원군을 즉위시키는데 그가 고려 8대왕인 현종이다.


■ 제6대왕 성종 960년-997년. 재위기간 981년-997년. 집권 16년.

● 유학정치 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


성종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연관회와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폐지하고 사회 전반에 유학열풍을 불러일으킨다. 거란은 발해를 몰락시킨 후 당연히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가 이러한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침략도 불사하겠다는 엄포에 고려조정은 숙의 끝에 거란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을 결정하고 거란에게 고려는 신라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에 거란은 993년 소손령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려를 침공한다. 이에 서희는 소손령과 담판을 통해 강동6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이에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변까지 확대대고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던 여진세력은 더욱 위축된다.


고려 초에는 여자의 재가가 허락되고 이혼이 인정되지만 왕이 재가녀로 왕비를 맞아들이는 예는 찾아볼 수없었다. 때문에 성종과 문덕왕후의 결혼은 광종이후 정착된 족내혼은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종친들의 동의하에 이뤄진 일이다. 하지만 문덕왕후는 왕규에게 시집가서 이미 딸을 낳은 상태였다. 성종은 대종의 아들로써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광종의 사위로써 계승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후에 제8대 현종의 왕위 계승에서도 재현되는데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는 족내혼이 이뤄졌던 고려 왕족에서만 볼 수있는 특이한 계승법 이었다. 성종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귀족들과 제휴해서 노비안검법을 폐지한다. 노비에서 면천됐던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환천시켜 귀족들에게 돌려주기로 한다.


■ 제7대왕 목종 980년-1009년. 재위기간 997년-1009년. 11년 18세에 즉위함.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


18세의 어린 목종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가 차지하게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경종비) 김치양과 부부의 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척촉과 권신들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목종은 경종이 사망할 당시 두 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는 성종에게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들이 없던 성종은 송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 개령군에 봉했다.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헌애왕후가 섭정을 실시한다. 정권을 거머쥔 헌애왕후는 자신의 정부인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은 성종대에는 천추궁에 출입하면서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가 발각되어 장형을 당하고 귀양 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부르도록 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주므르고 김치양과 부부행세를 하며 아들까지 출산한다(1004년). 김치양은 우복야겸 삼사사에 오르고 인사권을 장악하여 백관의 임명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되자 벼슬을 원하는 자들로 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뇌물이 엄청 들어왔다. 목종은 이런 김치양을 내쫒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지만 헌애왕후로 인해 번번이 실패한다. 이렇게 되자 목종은 동성애를 하고 그 대상은 유행간이며 유행간은 합문사인의 벼슬에 오르게 되고 항상 목종 곁에서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한다. 목종은 정사에 관한 한 유행간에 묻지 않은 것이 없었고 유행간은 마음먹은 일이면 언제든지 왕을 조정하여 이룰 수있었다. 유행간은 또 유충정이라는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 줬고 조정은 점차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현종) 뿐이었다. 헌애왕후의 친동생인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보냈다. 그 후 헌정왕후는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현종)이다. 1009년 목종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이기위해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그들의 측근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왕의 얼굴조차 볼 수없었다. 목종은 좀처럼 편전에 나가지 않았으며 만나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주지 않았다. 따라서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말은 모두 왕명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목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한시바삐 후계자를 결정코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 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선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은 은밀히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그를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에 서경 도순검사인 강조를 불러들였다.


강조가 왕명을 받고 용천역에 도착했을 때 최창이 찿아왔다. 그들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위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헌애왕후는 강조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생각에 도중에서 그를 생포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배치해둔 상태였다. 그 사실은 곧 강조의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는 급히 사람을 시켜 왕이 이미 죽고 없으니,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난을 평정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강조는 병력 5천을 인솔하고 평주에 도착해서야 왕이 살아 있다는것을 알았다. 이에 강조는 병사를 이끌고 온 것을 후회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고 부하 장수들의 건의에 따라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정했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우고 김치양부자와 유행간등 7명을 죽이고 그 도당과 헌애왕후의 친족 이주정등 30명을 귀양 보냈다. 목종은 강조가 사람을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강조의 부하들이 목종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이때 목종의 나이는 30세였다. 이같은 강조의 역모사건은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는 빌미가 되었다.


■ 제8대왕 현종 실록 992년-1031년. 재위기간 1009년-1031년 22년 18세 즉위.

● 수난을 먹고 자라난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신장.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현종) 뿐이었다.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 보냈다. 그 후 헌정왕후는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의해 대궐에서 양육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다.


헌애왕후가 대량원군 왕순을 죽이기위해 자객을 보내고 독이든 술과 음식을 먹이도록 강요하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왕순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몇 번에 걸쳐 목종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유행간에 의해 곧잘 중간에서 사라지곤 하였다. 하지만 대량원군 왕순을 차기 왕으로 앉혀야 된다고 생각했던 유충정이 그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다행히 위기 상황을 전할수가 있었다. 목종은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유충정을 통해서 전해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충주부사로 있는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왕순의 편지를 보여 주며 한시바삐 신혈사로 가서 왕순을 대궐로 데려 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강조는 왕의 명령이 헌애왕후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기위해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서경을 떠날 때 강조는 이미 김치양 일파에 의하여 왕이 살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도 평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와 반역으로 몰릴 것이 뻔한 처지에서 선택의 길은 한가지 뿐인 궁궐로 향해 말을 달렸다. 강조의 군대는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했다. 궁궐을 장악하자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 제9대왕 덕종 1016년-1034년. 재위기간 1031-1034년. 3년. 16세-19세.

● 덕종의 짦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德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덕종은 나이답지 않는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평민한 정치를 펼쳐 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왕위에 오른지 3년 여만에 생을 마감한다. 덕종은 현종과 마찬가지로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정권다툼으로 밀려난 거란인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정국을 진단하고 내부사정을 분석하기도 했다. 현종대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외침 속에서 국력을 한층 신장시킨 고려는 덕종대에는 군사적으로 강성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성종 대이후 꾸준히 성장한 과거출신 신진관료들이 바로 이러한 정치의 안정적 기반이었다.


■ 제10대 정종 1018년-1046년. 재위기간 1034년-1046년. 11년. 17세-28세.

● 정종의 실리정책과 고려의 안정


정종 대에는 거란과 화의모색으로 거란의 연호를 사용한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대치관계는 일단락 되고 이후부터 거란이 멸망하는 13세기까지 양국간의 평화는 지속된다. 1044년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한다. 이같은 국력의 증대는 고려사회를 외침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내부 기강확립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1039년에는 奴婢從母法 을 제정하고, 1045년에는 악공과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진출 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마련하는 등 정종은 변방의 안정을 바탕으로 일련의 사회의 안정책을 실시한다. 정종은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4남 1녀의 자녀를 얻는다. 선대왕들과는 달리 모두 혈연관계가 없는 족외혼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정종의 왕권이 비교적 강력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입김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작용 했다는 의미이다.


■ 제11대 문종 1019년-1083년. 재위기간 1046년 1083년 37년간. 28세-65세.

●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


정종시대에 마련된 안정을 기반으로 문종은 정치.사회.문화.외교.학문등 모든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을 일궈 낸다. 3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된 이러한 발전은"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되고 이에 따라 고려문화의 대외적위상은 한층 격상된다. 최제안의 후임으로 최충을 시중에 앉히면서 본격화되어 왕총지 이자연등의 재상들을 거치면서 한층 무르익는다. 1071년 문종은 신하들의 강력한 만류를 저지하고 민관시량 김제를 송에 파견함으로써 고려와 송은 다시금 정상적인 국교관계를 맺었다. 송은 당시 고려와 힘을 합해 거란을 압박하고 과거의 영토를 회복 하고자 하였고 고려는 송을 통해 거란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부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거란과 외교관계를 끊지 않음으로써 고려는 북방의 안정을 유지 시켰다.


문종 대에는 정치와 외교의 안정과 더불어 학문적으로도 대단한 발전이 있었다. 학문을 주도한 인물은 최충이었다. 그는 일흔이 되자 스스로 퇴직을 신청한 후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문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력을 동원하여 흥왕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절은 1055년 에 공사가 시작되어 약 13년만에 완성되었으며 총 2천8백 칸의 규모로 대궐의 크기와 비슷했다고 한다. 금144근 은427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기도하고 절 주변에 성을 쌓아 재난시에 방어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했다. 계행이 청정한 1천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흥왕사는 문종대 이후 고려불교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숙종 대에는 흥왕사 금탑에 송나라에서 보내 온 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다.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 팔관회를 공식적으로 부활시키고 많은 불교행사를 치렀다. 또한 스스로 청정한 생활을 하며 매월 세 번 이상 꼭 절을 찾아 기도를 하면서 백성들의 불심을 자극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그중 하나인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천태종이 도입되어 대대적인 불교 운동이 일어난다. 이는 당시 대신들은 대개 유학에 몰두하였는데 대게 유학에 몰두하였는데 유학의 지나친 부흥으로 대신들의 힘이 강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민심을 하나로 통일 시키기 위해서는 불교를 융성시키는 것보다 좋은 방책은 없었다. 문종은 철저한 법치주의를 주장하며 법제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곧잘 예외를 인정하고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는 포용력이 있는 왕이기도 했다. 대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판단될 때는 과감하게 자신의 고집을 꺾는 군자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무서운 추진력을 보이기도 했는데 불교융성책과 흥왕사 창건 그리고 송나라와의 국교 정상화 등의 문제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문종의 정치적 넓이와 인격은 고려사회를 건국이래 최고의 황금기로 끌어 올렸다.


문종은 이자연의 세 딸을 맏이 하였으며, 그중 인예왕후 이씨에게서 10남2녀를 낳았으며 12대순종,13대선종,15대숙종,대각국사 의천등이 있다. 인경현비 이씨가 3남을 낳았으며 총13남 2녀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