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고려 왕조실록 요점정리(12대~23대)

풍월 사선암 2009. 2. 8. 17:17

■ 제12대 순종 1047년-1083년. 재위기간 1083년. 3개월

● 순종의 병상 3개월 치세


순종은 문종의 장남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7년에 태어났으며 8세 때인 1053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12대 왕에 올랐다. 그는 원래 병약한 몸인데 문종이 죽자 그 슬픔과 상중의 피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이 더욱 약해졌다. 그 바람에 재위 3개월만에 임종을 앞두는 신세가 됨으로써 고려 34대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 되었다.


■ 제13대 선종 1049년-1094년. 재위기간 1083년-1094년. 10년

● 선종의 중도정치와 고려 문화의 융성


순종이 즉위 3개월만에 생을 마감하자 친동생인 선종이 왕위를 이었다. 선종은 문종의 둘재 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사에 밝고 제술에 뛰어나 1056년 3월 국원후에 봉해졌으며 상서령에 제수된 뒤 순종 때 수태사중서령이 되었다. 순종1년(1894)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순종2년(1085) 동생인 의천이 몰래 송에 건너가 불법을 공부하고 2년 후에 돌아왔다.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였다. 1094년 2월 열병하고 5월에 연녕전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손하고 슬기로웠으며,자라서는 효도하고 공손하고 검소 하였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을 많이 세워 백성들의 과중한 노역으로 인한 원망이 많았다 한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이며, 시호는 사효 이다.


■ 제14대 헌종 1084년 1097년. 재위기간 1094년-1095년. 1년.

●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


헌종은 선종과 사숙왕후의 소생으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11세의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했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 명으로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선종이 자신의 병약한 아들에게 선위해 버린 것이다.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왕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한 관계로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전략가들에게 겉잡을 수없게 일어나며 역적 난신들이 대권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나는 후궁으로 물러 앉아 남은 여생이나 유지 하겠다. 즉위 초에도 이미 헌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백관 등 역시 그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후궁으로 물러앉은 헌종은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 마감한다. 병명은 소갈증 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왕위를 찬탈한 숙종에 대한 두려움 이었을 것이다.


■ 제15대 숙종 1054년-1105년. 재위기간 1095년-1105년. 10년.

●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질이 강하여 매사에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경자사 등 많은 서적을 읽어 학문에 밝았고 이 때문에 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문종은 어린 그에게 "후일에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아마도 네가 될 것 같구나" 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아꼈으며 1065년 그를 계림군에 책봉했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경 상서령에 올랐고 이듬해 소태보와 왕국모의 도움으로 외척 이자의 세력을 몰아낸 다음에는 중서령에 올라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해10월 측근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고려 제15대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임.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르던 날에도 친인척을 귀양 보냈다. 숙종은 이처럼 처음부터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기며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형성 하고자 하였다. 정치, 외교는 전번기에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여진족의 국력강화에 따라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대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안정궤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덕택으로 주목할 만한 문화적 성과를 남긴다.1096년에는 6촌이내의 혼인을 금지하게 되는데 이는 유학자들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 왕실은 광종이후 지속적으로 성골왕족을 중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6촌이내의 족내혼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유학을 숭상하던 유림들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리를 중시해서 숙종대의 6촌 이내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림들의 힘이 강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족외혼을 권장하던 송나라의 입김도 한껏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별로 지켜지지 않았다. 유학의 진흥책과 함께 원효와 의상을 국사로 추정하고 그들의 공덕을 새겨 동방의 성인으로 높임으로써 불교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문화적 업적 이외에 군사적으로는 기마병 중심의 여진에 대항하기위해 별무반을 조직하게 된다. 윤관의 주장으로 설치된 별무반은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과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이 있었으며 고려는 이를 별무반을 통하여 여진정벌을 추진한다. 숙종 대에는 이와 같이 정치, 외교적으로 전환기에 놓였기 때문에 한편으론 안정되고 또 한편으론 불안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숙종은 이런 정세 속에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 하다가 1105년 고구려 동명왕의 묘역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결국 환궁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는 노상의 수레 안에서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제16대 예종 1079년-1122년. 재위기간 1105년-1122년. 16년. 17세 즉위.

● 예종의 영토확장 노력과 여진의 성장


여진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거란의 힘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서쪽으로는 거란에게 내주었던 압록강 변의 두성을 찾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진출하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영토확장 계획은 2년뒤 출병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1107년 10월 고려조정은 여진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경비군관의 보고에 따라 선제공격을 결정하고 17만 대군으로 여진정벌을 단행한다. 그 해 12월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등을 장악하고 그 곳에 성을 쌓았으며 이듬해 초에 항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고 또다시 3월에 의주, 동태진, 평윤진 등에도 세성을 쌓아 백성들을 이주 시킴으로써 고려는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된다. 여진은 이 9성을 회복하기위해 매일같이 싸움을 걸어왔다. 여진은 북계의 9성을 돌려주면 고려에 곡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는 변방을 넘보지 않겠다고 했다. 고려조정은 찬반토론 끝에 조정의 대세에 따라 9성이 반환되자 여진은 고려에게 대대손손 공물을 바치고 국경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1109년 7월 철수작업에 돌입했다.

 

고려조정은 역모사건으로 왕규를 비롯하여 수십명이 귀양길에 오르고 그중 일부는 참형을 당하였다. 고려가 이렇게 내부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중국 대륙에서는 여진족이 꾸준히 성장하여 1115년 금을 건국하였고 추장 아골타는 황제를 자청하면서 고려에 대해 형제지국을 맺을 것을 요구해온다. 하지만 고려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진의 팽창에 따라 거란은 고전을 면치 못하자 고려에 원병을 요청해왔고 고려는 사태의 추이를 살피며 거란의 원병요청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거란의 야율녕은 고려에 쌀을 원조해 줄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내원성과 포주성을 포기하면 굳이 쌀을 원조받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며 두성을 고려에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리하여 고려는 1117년2월 거란에 빼앗겼던 내원성과 포주성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서쪽으로 밀려난 거란은 고려에 공문을 보내 함께 여진을 칠 것을 강권하지만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1117년엔 송나라에서 대성악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궁중 음악인 아악의 시초다. 급변하는 격동기 속에서 예종은 이렇듯 밖으로는 중립외교를 통하여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하고 안으로는 요순정치를 구현하며 태평성대를 꿈꾸는 왕이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가 시인임을 자처하며 어려서는 선비들과 시를 지어 화답하고 송나라의 선진적인 문화를 숭상하며 유학의 발전에 주력했으며 동시에 토속신앙과 불교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고려문화의 질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종의 정치에 대해 실록을 편찬한 한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예종은 영토를 넓히는데 뜻을 두고 변방에서의 전공을 요행수로 기대하여 적과의 혼극이 계속 되었으며, 송나라 문화를 흠모하여 호종단(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벼슬을 한 사람)을 신임하여 자못 그의 말에 미혹됨으로써 실수를 하기도 하였다."


■ 제17대 인종 1109년-1146년. 재위기간 1122년-1146년 23년 14세 -37세.

● 인종의 우유 부단한 정치와 고려왕조의 위기


예종이 죽고 14세의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은 권력암투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한다. 이 때문에 인종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세력 사이에 끼어 수동적인 정치로 일관한다.


■ 제18대 의종 1127년 -1173년. 재위기간 1146년-1170 24년.

● 향략주의자 의종과 환관정치와 정중부의 난


묘청의 난 이후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즉위한 의종은 왕권을 회복하기위해 친위세력 형성에 주력한다. 이 때문에 환관과 내시들의 힘이 막강해져 그들과 간언들 사이에 치열한 힘겨루기가 전개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멸시 당하던 무신들이 반란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때문에 모후 공예왕후는 둘째 왕자 경을 태자로 책봉하고자 주장 하였으나 인종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공예왕후는 끈질기게 둘째 왕경을 새롭게 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한다. 이에 인종도 마음이 통하여 그를 폐립할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예부시랑 정습명이 태자 폐립을 반대하며 자신이 의종을 보필하여 정사를 원만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자청한다. 의종이 왕이 된 이후에 정습명에 의해 철저하게 행동을 규제 받는다. 정습명은 너무 지나치게 왕의 행동을 규제하는 바람에 의종이 점차 그를 꺼리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의종은 환관과 내시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근위 세력을 형성하고 김존중, 정서등을 측근으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정습명을 정계에서 축출하여 죽여 버린다. 의종은 시를 잘 짓는 내관들과 악공들을 데려놓고 밤새도록 주연을 즐기는 일도 잦았다. 의종은 호위병들의 고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3일에 한 번씩 연회를 배풀었고, 이에 호위병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고 마침내 반란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 제19대 명종 1131년-1202년. 재위기간 1170년-1197년. 27년간. 40세 즉위.

● 허수아비 임금 명종과 무신들의 정권다툼.


정중부의 반란으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무신정권의 시대로 접어든다. 왕은 존재하나 힘이 없고 모든 권력은 일부 무신들이 장악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잇따른다. 이로 인해 국가기강은 무너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른다. 왕위에 오른 명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모든 권력은 난을 일으킨 무신들이 쥐고 있었고 명종은 그들 무신들의 권력싸움의 틈바구니에 끼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그만큼 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명종은 즉위하자 곧 정중부, 이의방, 이고등을 벽상공신으로 삼아 그들의 화상을 그려 전각에 붙이고 양숙 채원등은 그다음 자리에 두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중방을 설치하 고 권력을 농단하면서 조정을 독점하기위해 각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 제20대 신종 1144년-1204년 재위기간 1197년 - 1204년. 6년 집권. 54세 즉위.

●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신정권의 성립


신종시대에는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는가 하면 전국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아 고려사회는 건국이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다. 최충헌 형제와 그의 측근들은 명종을 제거한 후 차기왕으로 사공 왕진과 평양공 왕민중 한 사람으로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논의 끝에 금나라 에서 사공 왕진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왕위를 찬탈했다는 의심을 살 염려가 있으므로 의종의 전례에 따라 왕민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박진재의 판단에 따라 결국 왕민이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금나라 에서는 왕위찬탈 의혹이 있다면서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명종을 대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 등이 명종은 요양차 아주 먼 곳에 있기 때문에 30일 이상 걸어야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하여 신종은 가까스로 금나라 왕의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종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조정 대소사의 모든 결정권은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다 쥐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자기들끼리 알력이 생겨 마침내 치열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최충수는 최충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다가 최충헌에게 죽음을 당하고 박진재도 후에 지나치게 권력을 확장시키다가 최충헌 에게 양쪽다리의 심줄이 잘리는 형을 당하고 유배되어 죽었다. 최충헌은 이처럼 권력을 위해서는 혈육도 가차없이 죽이는 모습을 보이며 독재정치를 구현해 나갔다. 최충헌은 1197년 상장군으로 오른 그해 추밀원지주사등 거듭 승진되었고, 1203년에도 거듭 승진을 하게 되자 조정의 병권 및 인사권등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한다.이로써 최충헌은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고려 왕실은 점점 힘을 상실하여 왕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공포정치를 실시하며 조정을 독식하던 그는 1203년 중서문하 평장사에 올랐다가 1205년 만인지상 일인지하인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이규보를 등용하여 정중부의 난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던 문인들을 등용하였으며 1209년 도정교감을 설치하여 국정전반을 그 곳에서 처결하였다.


1211년(희종7년) 예시낭중 왕준명등이 궁궐 내에서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휘말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 일을 방관한 희종을 내쫓고 그의 아들 강종을세웠다. 이후 1218년에 70세가 되어 스스로 치사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강종은 그에게 칠순이 넘도록 관직에 머물도록 허락하는 궤장을내렸다. 하지만 이듬해 병이 들자 그는 궤장을 반납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제21대 희종 1181년-1237년. 재위기간 1204년-1211년 7년.

● 왕권 회복을 꿈꾸는 희종과 최충헌 제거계획


희종 역시 신종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충헌에의해 이루어 졌다. 하지만 희종은 신종과 달리 부왕의 선위를 받아 왕실의 예법에 따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측면에서 즉위에 대한 대의명분이 분명했다. 이같은 사실은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될 수있었기 때문에 최충헌을 제거 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희종 즉위 년에 최충헌부자를 살해하기위해 급사동정 지귀수의 집에 모여 모의하다가 발각 되었고,1209년에도 청교역리 3명이 최부자 살해 계획을 세웠다가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 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범인들을 색출하기위해 임시로 설치된 교정도감은 그 후부터 무소 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관으로 자리 잡는다. 최충헌은 스스로 교정도감의 별감으로 있으면서 그 곳에서 모든 국사를 처리 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최의, 최항, 최의가 교정별감직을 세습하여 왕권을 대신하게 된다.


1211년 그 동안 최충헌의 왕권능멸을 지켜만 보고있던 희종은 측근 내시들과 모의해 최충헌 세력을 제거하고자 거사를 결행한다. 최충헌이 왕을 배알하기위해 수창궁으로 찾아 들었고 희종은 그를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중관 내관들이 최충헌 수하들을 궁궐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자 미리 잠복 하고 있던 10여명의 승려와 무사들이 그들을 습격하였다. 때문에 내전복도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최충헌은 자신을 죽이기위해 자객이 들이 닥친 것으로 판단하고 희종 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 하였으나 희종은 내실의 문을 닫고 최충헌을 내실로 들이지 않았다. 이에 최충헌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급한 김에 지주사 다락에 몸을 숨겼고, 그의 수하들이 내전으로 달려가 최충헌을 구했다. 최충헌을 구한 김약진은 궁궐로 군사를 몰아 임금을 비롯한 모든 내인들을 죽이려 하자 최충헌은 이를 만류하며 자신을 제거하려 한 왕준명 등 중관들 을 체포하여 모두 죽이거나 유배시키고 이들의 모의를 후원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다. 희종은 유배지를 떠돌다가 노년에 법천정사로 옮겨 1237년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제22대 강종 1152년-1213년. 재위기간 1211년-1213년 1년. 60세에 즉위함.

● 강종의 황혼녘 짧은 치세


강종은 명종과 의정왕후김씨의 맏아들로 1173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197년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쫓겨날 때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210년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1211년 한남공에 봉해졌다가 12월에 최충헌이 희종을 폐위시키고 그를 옹립함에 따라 60세에 즉위하였다. 그는 부왕 명종이 강제로 퇴위됨에 따라 14년 동안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따라서 그에게 왕위가 넘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는데 희종이 왕권회복을 위해 최충헌을 제거 하려다 가 실패하는 바람에 환갑을 앞둔 나이에 곤룡포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유배생활로 몸은 병이 들었고 1213년 지병으로 병상에 누워 태자 진(고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강종에 대해 사관은 "강종이 임금으로 있을 때 일체정사는 강신들의 통제를 받았으며 갑자기 병에 걸려 국왕으로서 행복을 누린지 며칠되지 않으니 슬픈 일이로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평왕후 이씨는 이의방의 딸이다. 강종이 태자로 있을 때 이의방의 권세에 의지하여 1174년 3월에 태자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그 해 12월 정균에 의해 이의방이 살해되면서 입궁 9개월만에 대궐에서 쫓겨났다. 그 후 강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추존되었다.


■ 제23대 고종 1192년-1259년. 재위기간 1213년-1259년. 45년.

● 고종시대의 계속되는 변란과 대몽 항쟁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든 고종시대는 몽고의 중흥기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린다. 서쪽으로 밀려났던 거란이 다시 동으로 쫓겨 왔으며 남으로 밀려났던 송이 망국에 직면하고 북쪽의 맹주로 자리한 금도 몰락한다. 몽고의 이같은 무서운 팽창정책에 맞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영토수호 전쟁을 수행하고 무신정권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이어지고, 왕실은 무신들 의 암투를 이용하여 왕권을 회복하려 한다. 1218년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조정은 몽고, 동진, 금 등과 연합하여 거란군을 격퇴키로 결정하고 1218년 12월 합진과 찰라가 이끄는 몽고군 1만과 동진의 군사2만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화주,맹주,순주, 덕주 등을 무너뜨리고 거란의 본거지인 강동성으로 향하자 김취려와 조충이 이끄는 고려군도 이들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애워쌓다. 이에 거란군은 한 달간을 버티다가 1219년 정월 성문을 열고나와 항복하였다. 이에 몽고는 고려에 강화를 청하였고 형제지국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 후 몽고군이 돌아가면서 수하 40여명을「다루가치」 의주에 남겨 두었고 이 때문에 고려 전역엔 '가을에 몽고군이 다시 온다' 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 와중에 1219년 실권자 최충헌의 병이 악화되었고 후계자를 놓고 최우와 최항이 다툼을 벌였다.


최충헌의 측근인 대장군 최준문,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낭장 김덕명등 4인이 최우를 없애고 최향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다가 되레 최우에게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향, 최향의 장인, 처남, 노비 등이 유배 되었으며 그 해9월 최충헌이 죽자 국정 전반에 관한 모든 실권은 최이에게로 넘어갔다. 한편 고려와 형제관계를 맺은 몽고는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고압작인 자세로 공물을 요구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최이는 몽고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1221년 의주,화주,철령등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그런데 1225년 정월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는 길에 도적들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고는 고려의 소행으로 보고 보복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양국간에 국교가 단절되고 긴장이 강화됐다. 이때 경상도 지방에 왜구들이 침입하여 민가를 괴롭히자 조정은 일본정부와 우호관계를 맺고 왜구를 소탕했다.


1227년 징기스칸이 죽자 몽고족의 풍습에 따라(말자상속) 셋째 아들 오코타이가 칸에 선출 되지만 일찍 죽고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칸이 되어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원을 세우고 몽고 제일주의 즉 민족차별 정책을 썼다. 몽고는 1231년 살리타의 지휘아래 압록강을 건너 왔으며 이는 7차례에 걸쳐 28년 동안 지속적으로 자행된 고려침략의 서막이었다. 1231년 몽고가 대군을 이끌고 제1차 침입을 감행했다가 화의약조를 하고 물러가자 최우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섬과 산성으로 이주시켜 몽고군과 전면전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강화도로 이어 하는 것을 반대하고, 최우는 강화도로 옮겨야 된다고 강요하는데도 불구하고 궁궐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최우는 녹전차 백여대를 동원하여 자기집 재산을 모두 강화도로 운반토록 하고 기일을 정하여 궁궐의 모든 기관을 강제로 강화도로 가도록 하였다. 그는 강화도로 떠나지 않는 관리들은 모두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동시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강화도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최이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도 어가를 타고 강화도의 새 궁궐로 들어갔다. 고려의 도읍이 강화도로 옮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몽고는 다시금 대병력을 보내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후부터 약30년간 몽고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1232년 서북면과 서경에서 몽고 잔병인 다루가치를 습격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고는 2차 침입을 시도하고, 고려군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군관민이 단결하여 싸웠다. 그해 12월 수원의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몽고원수 살리타를 살해했고 이에 몽고군은 당황하여 서둘러 철군하였다. 1247년 몽고군은 고종의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다시 침입을 했는데 이때 몽고 왕이 죽었다는 연락이 오자 그들은 곧 철수하였다. 1249년 11월 최우가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후계를 이었는데 최항도 최이와 마찬가지로 몽고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구도에 큰 변화는 오지 않았다. 몽고군은 1251년 다시 출륙환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도 환도의 뜻을 품었지만 최항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253년 몽고군은 제5차 침입을 강행했고 고종이 몽고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승천부로 나와 몽고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다시한번 몽고군은 철군하였다. 그 뒤 몽고군은 끈질기게 고종의 출륙환도를 주장했고, 고종은 화의조약을 얻어내기 위해 김수강을 몽고 왕에게 보냈고 김수강의 뛰어난 언변에 감탄한 몽고왕은 고려국왕의 친조와 출륙환도를 다짐받고 철군을 단행했다. 최항은 몽고왕의 친조는 물론이고 출륙환도도 미뤘으며 해마다 보내던 공물도 중단시켜 버렸다.


이무렵 최항은 중병이들어 병상에 누웠고 1257년 윤사 월에 서자 최의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죽었다. 1257년에는 몽고군이 제7차침입을 강행해왔고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던 몽고는 수위를 낮춰 태자의 입조로 대신할 것을 제의했고, 이에 따라 양국간의 강화가 성립되는듯했다. 하지만 고려에서 태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안경공창을 대신 보내자 몽고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1258년 4월 유경, 김인준등에 의해 최의가 피살됨으로써 그 동안 몽고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취하던 최씨 무신정귄이 무너졌다. 그 해12월 고려조정은 박희실과 조문주를 몽고에 보내 최이의 죽음을 알리고 출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이듬해 왕태자가 40여명의 대신들과 함께 몽고에 입조 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28년 동안 지속되던 여몽전쟁은 완전히 종결됐다.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숱한 전쟁을 겪다가 몽고와 화의조약을 맺던 1259년 6월 강화도에서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삼국지연의, 수호지, 동방견문록 등이 이 원나라를 보고 작성했다. 1271년 몽고는 원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원 제국 성립하고 남송 명망시킴. 또 고려의 왕족들은 원에 볼모로 잡혀 그 곳에서 원의 왕실과 결혼을 해야 했고, 결국 원은 고려를 자신들의 부마 국으로 삼으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