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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없는 전쟁 에피소드

풍월 사선암 2009. 2. 28. 10:18

어처구니 없는 전쟁 에피소드


◀ 진흙밭 속의 대학살, 아쟁쿠르 전투의 비극


1415년 10월,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군은 프랑스의 수도를 향해 진격하던 중 칼레(Calais)의 아쟁쿠르(Agincourt)에서 대규모의 프랑스 정예 부대와 마주하게 된다.


당시 국왕 헨리 5세가 이끌던 영국군은 연이은 전투로 이들은 지칠 대로 지쳤으며, 식량은 다 떨어져 약탈과 노략질로 근근히 연명하고 있었다. 반대로 프랑스 군은 조국 땅을 짓밟은 외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잘 갖춰진 장갑과 무기로 사기 충천이었다.


프랑스 군의 압승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수만 명의 프랑스 군과 수천명의 영국군. 영국은 머리 수는 물론, 장갑과 무기, 심지어 지형적인 면에서도 프랑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쟁쿠르의 전투 결과는 영국의 압승이었다. 프랑스 군은 전멸했고 영국군 불과 수십 명의 부상자만 냈다.


이 믿어지지 않는 기적적인 승리를 영국은 수세기 동안 찬양했고, 이 전투는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에피소드로 기록됐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5세를 찬양하는 "아쟁쿠르의 전투"라는 시까지 썼다 – 바로 이 시의 한 구절인 "we band of brothers"가 오늘날 전쟁 드라마의 제목이 될 정도로 이 전투는 유명하다.


그러나 이 전투는 영국군의 용맹함과 지략으로 이긴 것이 아니었다.


당시 아쟁쿠르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두터운 흙밭이었던 전장은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대로 변해 있었다. 영국군을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 군은 수만의 군대를 좁다란 공터에 빽빽이 사열해 놓았고, 진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진흙에 발목까지 빠진 병사들은 한발도 떼지 못하고 순식간에 마치 도미노처럼 1열 2열 3열 순서대로 진흙밭으로 쓰러져 박히고 말았다.


이들은 다시 일어나 보지도 못했다. 중무장한 프랑스 병사들의 갑옷은 진흙에 완전히 박혀 들어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하중으로 바닥에 눌어 붙었고, 거기에 뒤에 있던 병사까지 등을 덮고 누운 상황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절호의 기회를 맞은 영국군은 엉금엉금 진흙밭을 기어가 바닥에 눌어붙은 프랑스 군을 도살했고, 전투는 한 시간 만에 끝났다. 전투가 끝난 후 영국군은 1만 명 이상의 전쟁 포로를 득하게 된다. (말하자면, 잡아들인 포로의 수가 전투에서 이긴 군대의 수보다 많았던 것.)


그리고 당시 전투 지휘관이었던 헨리 5세는 그 자리에서 잡아들인 1만의 프랑스 포로를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한다. 당시 포로로 잡힌 프랑스 군 중엔 브라방 공작, 네베르 백작, 버건디 공작 등 수십 명의 프랑스 최고급 귀족들이 포함돼 있었는데 이들도 일반 사병과 똑같은 죽음을 당한 뒤 진흙밭에 버려졌다.


 

◀ "성령"을 받은 이들의 반인륜적 행위, 십자군 전쟁

서방은 교황의 주도 아래 1096년 "성지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조직해 동방정벌을 떠났는데 이것이 십자군 원정의 시초다. 십자군 원정은 전략, 무기, 기술이나 산업 발전에 끼친 영향이 거의 전무한 전쟁이었으나, 수많은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양산해 많은 이야기거리를 남겼다. (비록 그 이야기거리는 서양인들에 의해 상당 부분 삭제되거나 왜곡됐지만.)


- 1096년 농민으로 이뤄진 십자군 선발대가 독일로 향해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이교도라는 이유로 학살한다. 이들은 비잔틴까지 행군하는 동안 군자금을 얻기 위해 헝가리 지방의 주민 수천 명을 더 학살한다. (이 살인자들은 자칭 “성령”을 받고 출정한 군대였단다.)


- 1099년 1차 십자군 정규군이 예루살렘 함락. 이곳에서 십자군들은 이슬람 인들을 대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는데, 어찌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당시 교황청이 받아 든 보고에 의하면 "길거리에 이교도의 피가 말의 무릎까지 넘쳐 흘렀다"고. 이들은 또한 안티오크 근처에 있던 마라트 안 누만이란 도시를 유린했는데, 이때 주민들을 불에 태우고 솥에 삶았으며, 인육을 먹는 등 반인류적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 1189년 시작된 3차 십자군 전쟁 때는 당시 원정을 주도했던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가 같은 편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에 의해 감금돼 영국으로부터 몸값 흥정을 당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


-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 때는 엉뚱하게도 베네치아와 결탁해 동맹국인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해 부를 챙긴다.


- 1202년 부모의 허락을 받은 12세 이하의 남녀 어린이로 구성된 일련의 십자군 부대가 출정. 이 원정은 도중에 수만 명의 희생자를 내는 끔찍한 비극으로 끝남.

 


◀ 천재의 마지막 실수, 워털루 전투

1815년 벌어진 프랑스의 전 "황제" 나폴레옹의 운명을, 어쩌면 전 유럽의 판도를 가릴 수 있었던 중요했던 전투.


라이프치히에서 대패하고 엘바 섬으로 쫓겨간 "천재" 나폴레옹은 절치부심 와신상담한 끝에 프랑스에서 군대를 모아 유럽을 재침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럽 연합은 나폴레옹 군대를 에스파냐에서 대패 시켰던, 또 다른 전쟁 천재, 영국의 웰링턴 장군 군대와 프로이센의 블뤼허 군대를 앞세워 나폴레옹에 맞선다.

1815년 6월 15일 아침, 나폴레옹 군대는 벨기에 국경을 넘어와 웰링턴의 군대를 기습할 최적의 위치에 안착한다. 그날 웰링턴은 어처구니없게도 적을 코 앞에 두고 브뤼셀의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부대는 전투 배치가 전혀 돼 있지 않아 기습을 받으면 완전히 쑥대밭이 될 처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블뤼허 군대를 웰링턴으로부터 고립시켜 놓고, 그 다음날 이들을 먼저 공격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그런데 이때 나폴레옹은 퇴각하는 블뤼허를 쫓지 않고 다시 웰링턴의 본대를 치기 위해 워털루로 진군한다.


이때, 나폴레옹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나폴레옹은 웰링턴 부대와 전면전을 벌이기 전에, 자신이 도망가게 놓아준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을 다시 떠올린다. 그리고 그루쉬 장군에게 자신의 병력 1/3을 떼내 이 프로이센 군이 웰링턴 군과 합치지 못하도록 추격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곤 나머지 2/3 병력으로 철저하게 정비된 웰링턴의 군대와 맞서 싸운다.


사흘간 퍼부은 비로 뻘밭이 돼 버린 워털루 전장에서 벌어진 혈투는 좀처럼 끝이 나질 않았다. 프랑스 군은 수시간 동안 언덕을 밀고 올라가 마을과 진지를 점령했다가 다시 쫓겨나고 다시 밀고 올라가기를 수 차례 반복했다. 진흙밭에는 이미 1만 명 이상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양측의 장군들은 초조해졌다. 이들에겐 원군이 절실히 필요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쫓아간 그루쉬를, 웰링턴은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대를.


1/3의 병력을 이끌고 나간 그루쉬 역시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분명 프로이센 군대를 쫓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저 멀리 들리는 대포 소리는 분명 엄청난 전면전이었다. 그러나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그루쉬는 돌아가 나폴레옹과 합세하자는 다른 장교들의 말을 묵살하고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프로이센 군대를 정처 없이 따라 나선다.


반면 블뤼허는 웰링턴의 부대로 합세했다. 프로이센의 기병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쳐 떨어진 나폴레옹의 군대 속으로 파고 들어 복수전을 시작했고, 나폴레옹의 군대는 순식간에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아나는 패잔병 무리로 바뀐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 후 사로잡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워털루에서의 패배를 곰 씹으며) 남은 생을 마친다.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이 브뤼셀에서 웰링턴의 부대를 먼저 기습 공격했어도, 블뤼허의 프로이센 군을 추격해 섬멸하기만 했어도, 아니면 병력을 떼내 버리는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그것도 아니면, 그루쉬가 제때 돌아오기만 했어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말한다.


 

◀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부른 작은 문 하나

1435년, 투르크 왕국의 메메드 2세는 우르반의 괴물 대포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기 위해 공성전을 감행한다.


6주간 계속된 포격으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붕괴됐고, 메메드 2세의 군대는 두 차례 성으로 돌격했다가 콘스탄티노플 군대의 악착 같은 수비에 패퇴한다.


투르크 군대는 3차 공격에 모든 힘을 집중한다. 대규모의 비정규군을 돌격 시켜 콘스탄티노플 군대의 진을 빼 놓았고, 정규 공격대인 아나톨리아 부대가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만 2000의 예니체리 황실 친위부대까지 투입 시켰다. 투르크의 황제까지 직접 나선 이 전투는 양측 모두 사생결단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면 세상의 종말이라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성을 기어 오르는 적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의 외곽을 돌던 투르크 병사 몇 명이 아주 뜻밖의 것을 발견한다.


콘스탄티노플 안으로 들어가는 문 하나가 활짝 열린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안쪽 성벽에는 평화 시에 일반 시민들이 오고 가는 "케르카포르타"라는 작은 문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실수로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 문은 군사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 분명했다.


철통 같았던 성에 이런 사소한, 치명적인 구멍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투르크 군대는 이 문으로 모두 돌진해 들어갔고, 콘스탄티노플의 병사와 시민들은 성 안으로 들어온 투르크 군대에 둘러싸여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 적진 앞에서 오찬을

1582년, 에스파냐 군대는 반란을 일으킨 자신들의 속국, 네덜란드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 브뤼셀 근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 중에 엉뚱하게도 에스파냐 군대의 공작 지휘관은 잠깐 짬을 내 부관들과 간만에 우아한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군대에게 포격을 멈추고 네덜란드 진영에 잠깐 휴전을 하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곤 네덜란드 적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야외 오찬을 준비했다.


당시 문명이 발달하고 예의범절이 중시되던 유럽은 전쟁터에서조차 세련됨을 추구했다. 실례로, 전쟁이 워낙 형식적이고 예의 바르게 변해 전투에 나선 양측 군대 장교가 상대방에게 먼저 발포하라고 고집하거나, 성탄절을 즐기기 위해 합의휴전을 선포하기도 했다.


어쨌든, 네덜란드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에스파냐의 공작은 부관들과 최고급 식사를 들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네덜란드 쪽에선 연이어 대포알이 날라와 부관들의 머리와 몸뚱이를 날려 버렸다. 식탁은 여기저기 흩어진 6명의 장교들 시체로 난장판이 됐고, 공작은 "이건 배신 행위야!"라고 고함을 지르며 다시 전투를 개시했다.


 

◀ 줄루족 전쟁

1879년 있었던 영국 군과 아프리카 줄루족 간의 전투. 기본적으로 이 전투는 총과 대포, 폭약 등 현대 무기로 중무장한 군대가 창과 방패만 든 맨발의 원주민들에게 대패 당한, 역사적으로 매우 희귀한 경우였다.


당시 남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하려는 영국의 제국주의 군대 6000명은 이산들와나에서 줄루 족 병사들을 쫓고 있었다. 이들은 아프리카의 지형은커녕 줄루 족의 전술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 채 총만 믿고 적진으로 전진하다가 주력부대를 은밀히 숨겨놓고 기습한 줄루 족의 전투원에 둘러싸여 순식간에 학살 당하고 말았다.


줄루 족은 당시 유럽이 상대한 원주민 전사 중 당연 최강이었다. 이들은 유럽의 군대 조직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조직과 기강을 갖추고 있었으며, 엄격한 훈련으로 단련돼 있었다. 이들은 맨발로 기병대만큼 빠르게 이동했으며, 지구력도 엄청났다. 게다가 지형을 이용하는 전술은 신기에 가까워 유럽 군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 서부 전선의 크리스마스 사건

1차 대전 당시 유럽 서부 전선에서 크리스마스에 벌어진 매우 진기한 사건. 1914년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벨기에를 격파하고 프랑스로 진격하는 중에 프랑스와 연합군의 반격을 받고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 근처를 사이에 두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수개월 간 계속하게 된다. 이 밀고 밀렸던 양 측간의 전선을 서부 전선이라 불렀고, 겨울이 오자 얼어붙은 서부 전선은 참호 전쟁으로 바뀐다. 양측은 가시 철망과 기관총을 설치하고 서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대치하는 상황이 1개월 이상 지속됐다.


그리고 1914년 크리스마스, 대치 상태에 있던 연합군과 독일군은 너무나 지겨웠던 건지,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에 들떴던 건지, 참호에서 기어 나와 화목하게 인사를 나누고 담배를 교환했다. 그리고 양측은 편을 먹고 축구 시합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이후 다신 용납되지 않았고 이들은 다시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에 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