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성공한 국왕, 실패한 국왕

풍월 사선암 2008. 2. 25. 23:47

성공한 국왕, 실패한 국왕


 

성공한 국왕의 공통점은 어렵게 즉위했다는 점이다.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이 찬한 태종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은 "태종이 정사(定社:왕자의 난)할 때에 형세가 심히 외롭고 위태로웠다"고 적고 있듯이 태종은 수많은 정변을 치른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다. 이런 태종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세자가 된 양녕의 처신은 미흡했다. 태종은 재위 18년 6월 3일 '충녕대군은 몹시 추운 때나 더운 때도 밤새 글을 읽는다'며 충녕을 세자로 선택했다. 사냥을 좋아했던 양녕과 달리 새 왕조의 기틀을 잡는 데는 충녕의 학문이 필요하다고 본 것인데, 3자(子)라는 불리한 상황을 뚫고 즉위한 세종은 과연 새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놨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벽파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罪人之子 不爲君王〕'는 '팔자흉언(八字凶言)'을 조직적으로 유포시키며 세손(世孫: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다. 영조가 대신들에게 '세손에게 당파와 나랏일과 병조·이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가르치고 싶다'고 말하자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洪麟漢)은 '동궁은 당파를 알 필요가 없고, 이조·병조판서를 누가 할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며, 나랏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습니다.('영조실록'51년 11월 20일)'라고 반박했다. 한마디로 세손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런 어려움을 뚫고 즉위한 정조는 미래지향적 개혁정치로 조선 후기 최대의 성공한 군주가 되었다.


어렵게 즉위했다고 모두 성공한 국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임란 후 선조는 광해군이 문안하면, "앞으로 문안하지 말라"고 꾸짖었고, 세자 광해군은 "피를 토했다"고 '당의통략(黨議通略)'은 전한다. 어렵게 즉위한 광해군은 외교 방면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나 자신을 지지했던 소수당파 대북(大北)에만 의지해 정국을 운영하다가 거대 당파 서인과 남인이 연합으로 일으킨 인조반정을 만났다. 오늘 취임하는 새 대통령은 성공한 국왕과 실패한 국왕, 특히 실패한 선임자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5년 후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