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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훈이 '역전의 명수'가 되기까지

풍월 사선암 2008. 1. 5. 13:04

[Why] 박영훈이 '역전의 명수'가 되기까지

한국기원 연구생 10살때 자퇴 5년간 전국 돌며 야인 생활

계산 능하고 기보 독파가 취미 큰 승부 전날도 잠 '쿨쿨' 태평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어느새 그의 이름 앞에는 '역전의 명수'란 새로운 별명이 자리 잡았다. 만으로 23세, 우리 나이로는 올해 24세를 맞는 프로기사 박영훈<사진> 九단 이야기다. 지난달 17일 끝난 제12기 GS칼텍스배 결승 5번기서 그는 이세돌 九단을 맞아 초반 2연패로 몰리더니 이후 거짓말 같은 3연승으로 타이틀을 빼앗았다.


그 시점이 또한 절묘했다. 이세돌이 마치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조한승 윤준상 이영구 등 강력한 도전자들을 따돌리며 막 국수까지 손에 넣은 참이었다. 2연패 한 박영훈이 그 '희생자 그룹'으로부터 빠져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3, 4국을 따라붙고서 마지막 5국서 흑 불계승을 거두었고, 이 소식은 바다 건너 일본과 중국에서까지 큰 화제가 됐다. 그만큼 믿기 어려운 대사건이었다.


박영훈의 역전 체질(?)은 그 한 달 전에도 발휘됐었다. 11월 하순 유성에서 벌어진 제12회 삼성화재배 구리(古力)와의 준결승 3번기서 첫 판을 진 뒤 2, 3국서 불리했던 바둑을 연속 뒤집고 2 대 1로 역전승한 것. 

 

2007년 말 한 달 사이 중국과 한국의 1인자들을 상대로 잇달아 뒤집기 쇼를 펼친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해 보인다. 하나는 '신산(神算)'이란 호칭의 이창호를 오히려 능가한다는 뛰어난 종반전 능력. 어린 시절 식당에 가면 메뉴판을 놓고 음식을 고르는 대신 "아빠, 이거 모두 다 먹으면 얼마네"라고 했을 정도로 숫자와 계산에 밝았다.


박영훈의 또 다른 특징은 큰 승부를 앞두고도 흔들리지 않는 태평스러운 성격이다. 이와 관련해선 일화가 많다. 국제대회에 나가 전화벨 소리까지 못 들을 정도로 잠에 곯아떨어졌고, 일대 소동 끝에 관계자가 마스터키로 호텔문을 따고 들어가 깨워 간신히 대국이 이뤄졌다는 식이다. 중요한 대국을 앞두곤 긴장감으로 한숨도 못 자는 사람이 태반인 곳이 프로기사의 세계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영훈을 '게으른 천재'쯤으로 보는 것도 잘못이다. 다른 기사들은 기보(棋譜)를 놓아보는 것이 '공부'지만 그에겐 '취미'다. 그의 입단 전 스승이었던 최규병 九단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워낙 기보집을 빨리 독파해 영훈이에겐 남들의 절반 정도의 날짜를 주곤 했는데 그마저 며칠씩이나 단축하곤 했다. 테스트를 해보면 완벽히 파악을 하고 있어 놀라곤 했다." 230여 명의 국내 프로들 중 공부량이나 성실성 면에서 박영훈은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곤 한다.


그러나 그의 뒷심의 진정한 원천은 어린 시절 겪었던 고난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입단 고시'를 향한 최선의 코스라는 한국기원 연구생을 열 살 때 자퇴, 5년 가까이 전국을 돌며 야인 생활을 했다. '온실 탈피'가 목적이었으나 어린 박영훈은 '아저씨'들이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 새벽까지 이어지는 대회에 참가하며 혹독한 고난을 겪었다. '소년 방랑기객'이란 호칭도 그때 얻었다. 입단이 계속 지연되더니 1999년 말 '8전 9기'를 거쳐 프로가 됐다. 초반 2승 2패로 또 한 번 좌절 위기에 몰렸다가 내리 7연승으로 통과했으니 역시 '역전 체질'은 타고난 것인지 모른다.


입단 2년 만에 천원전에서 우승해 정상에 섰을 때 '어린 왕자'란 새 별명이 붙여졌다. 소띠 동갑내기 라이벌인 최철한, 원성진 등 '송아지 트리오' 중에서도 가장 속도가 빨랐다. 2004년 제17회 후지쓰배 대회를 석권하면서 세계 최단기간 우승, 최단기간 九단(이상 4년 7개월), 최연소 九단(19세 3개월)의 각종 기록을 세우자 이번엔 '어린 황제'란 격상된(?) 호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박영훈의 부친 박광호(55)씨는 바둑계에서 대표적 '바짓바람'으로 분류된다. 79년 TBC 아나운서로 출발한 방송인인 그는 20년 가까운 아들의 바둑 인생 구석구석에 영향을 안 미친 곳이 없었다. 갓 바둑을 배운 다섯 살 꼬마 영훈은 그날 부과된 묘수풀이를 풀어야만 잠자리에 들기로 아빠와 약속을 했고 이를 몇 년 동안이나 지켜냈다. "처음엔 바둑보다도 성취감을 심어주려는 시도였는데 오히려 영훈이가 빠져들었다. 새벽 1, 2시가 돼 졸린 눈 비비며 울면서도 매달리는 걸 보며 나도 더 독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사자가 절벽으로 새끼를 밀어 넣는 기분이었다…."


박씨는 아들이 10여 급에 불과하던 초보 시절부터 최근의 각종 타이틀전에 이르기까지 대국한 기보(棋譜) 1000여 장을 가보처럼 보관하고 있다. 코흘리개 아들의 풋바둑을 매번 빠짐없이 기록, 보존한 경우는 다른 어떤 프로기사 집에서도 찾기 어렵다. 2004년 후지쓰배서 박영훈이 생애 첫 세계 제패를 이뤘을 땐 아들의 결승 상대인 요다(依田紀基)의 기보를 40여 장 복사, 짐에 넣어주었던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영훈은 현재 국내 랭킹 3위에 올라있다. 1위가 이세돌, 2위는 이창호다. 3기 연패(連覇) 중인 기성전과 지난해 두 번째 등정에 성공한 후지쓰배를 포함해 박영훈이 현재 보유 중인 타이틀 수는 3개. 이창호와는 같은 지분(持分)이고 6관왕인 이세돌과 비교하면 지배 영토 수가 딱 절반이다. 박영훈의 다음 목표가 '이세돌 진압'임은 누가 봐도 분명해진다.


"세돌이 형이요? 어휴…. 징그럽지요 뭐. 워낙 수 읽기가 세서 웬만하면 만나고 싶지 않아요." 프로기사들의 엄살을 감안하더라도, 요즘 바둑계에서 이세돌이 누구에게나 '기피인물'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박영훈은 그 이세돌을 상대로 신년 벽두(1월 21일)부터 삼성화재배 패권을 놓고 결승 3번기를 펼친다. '소년 방랑기객'에서 '어린 왕자' '신 신산(新 神算)을 거쳐 '역전의 명수'에 이른 박영훈. 올해는 그 이름 위에 또 어떤 별명을 덧씌우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