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서해 북방 한계선 NLL을 사수하기 위해 북한함정과 교전

풍월 사선암 2007. 10. 18. 08:18

 

서해교전의 아픈기억 ‘357정’

 

“저 박동혁이 엄만데요.”

지난 6월 22일 일요일 오후, 집에서 쉬고 있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서해교전 당시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같은 해 9월 20일 숨진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였다. 고 박 병장의 어머니 이경진(李京眞ㆍ46)씨는 “저번에 문전박대해서 미안합니다”라면서 “주간조선 기사는 잘 읽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제가 아들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부터 틈틈이 일기 형식으로 메모를 해놓은 걸 보내드릴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기자가 빠른 우편으로 부쳐달라고 하자 이씨는 월요일 아침에 보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수요일이 되어서도 어찌된 일인지 우편물은 도착하지 않았다. 수요일 밤 전화를 걸어보니 이씨는 “가족들이 보내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했다. 기자는 6월 26일 오후 경기도 안산시 부곡동 박 병장 집을 찾아갔다. 6월 4일 이후 두 번째였다. 기자는 이씨와 남편 박남준(朴南俊ㆍ49·목수)씨를 다음과 같은 취지로 설득했다.


“유가족이 직접 쓴 글을 국민들이 읽을 필요가 있다.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기자가 쓴 것과 유가족의 육필 수기는 다르다. 잘 썼느냐 못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만 담겨 있으면 된다. 그래야 국민들이 유가족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씨는 안방에 들어가더니 편지봉투에 든 다섯 장짜리 일기를 들고 왔다.


이씨는 지난해 6월 29일 아들이 서해교전에서 중상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 입원,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등 생(生)과 사(死)를 넘나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 글을 썼다고 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의 처참한 모습, 아들이 저승으로 가던 9월 20일과 아들이 제대하기로 되어 있던 날(2003년 6월 11일)의 처절한 심경, 서동만 국정원 기조실장 내정자의 발언에 대한 분노 등을 엿볼 수 있다. 주간조선은 이씨의 수기 전문(全文)을 게재한다. 일부 문장은 맞춤법에 맞게 바꾸었다.

 

▲ 벌집이 되어있는 조타실


서해교전 고 박동혁 어머님의 편지 

아들아 잘 지내고 있니. 오늘도 엄마는 너의 이름을 불러본단다. (네가) 너무나 아파했기에 쓰리고 저미어 오는 가슴 가눌 길이 없구나.


중환자실에서 너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어. 성한 데라고는 머리하고 왼손뿐이었어. 22개나 되는 링거줄에 의지하고 수많은 기계들. 3일 만에 죽었다가 심폐기능(소생) 기술로 살아났다고 하더라.


한 달 되어가면서 의식을 찾은 내 아들. 왼쪽 다리 빼고 파편 때문에 대장은 망가졌고 소장은 일곱 군데 꿰매고 배는 오픈 시켜 반창고로 붙여놨고 허리는 끊어졌고 왼쪽 척추에 큰 파편이 있고 화상으로 인해서 푹 패어 그 밑에 인공항문.


오른쪽 다리엔 신경이 다쳤는지 감각도 없고 여기저기 파편 조각들이 상처를 내고 오른쪽 어깨에 총알이 들어있다. 뱃속에는 파편 쪼가리가 100개가 더 있다고 하더라.


깨어나면서 찾아오는 고통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을까. 입을 벌리면서 통증을 호소하니까, 입술이 찢어졌다. 날마다 떨어지는 저혈압. 수없이 수혈해도 혈소판은 떨어지고 생과 사가 왔다 갔다 한다. 교전 때 입은 충격일까. 총알이 날아오고 죽은 대장님이 달려든다네. 환청에 시달리며 눈이 빨갛게 부어 잠 못들고 통증과 고통에 시달리면서 힘들어 하는 아들의 모습. 내 손을 잡고 울부짖는다. 이 힘든 통증을 어이해야할지.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는 아들. 안쓰럽고 불쌍하고 처참했다. 다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왼손으로 엉덩이쪽을 만지면서 흐느낀다.


‘엄마, 내 다리 어디로 갔어. 저리고 아프다.’잠에서 깨어났는데 ‘내 다리가 없어졌다’.이런 현실 속에서 너와 우리 가족은 피눈물을 토했다. 네가 왜 총 맞고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냐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너는) 물만 한모금 삼켜도 장출혈이 심했다. 밤이 되면 통증은 더 무섭다고 했다. 긴 밤을 꼼짝도 못하고 뜬눈으로 지새우는 아들. 뼈에 사무치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엄마가 아프고 싶었다.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너의 상처를 바라보며 사무쳐오는 슬픔을 되새길 뿐. 겨우 고개를 돌려 문쪽만 바라보는 아들. 아빠 엄마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불쌍하기도 하고. 이런 속에서 약간 호전되더니 점점 심해져 (2002년) 9월 1일 중환자실로 내려갔다.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많은 상처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못했다. 엄청난 상처를 뒤로 한 채 9월 20일 새벽, 저 멀리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그 힘든 통증 속에서도 살아준 내 아들에게 고마웠다.


대전에 너를 묻고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엄마는 왜 이리 슬프고 초라한지 서글퍼진다. 6월 29일 (국군)수도병원으로 간 우리 가족은 가을이 되어서 피멍진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아들에 대한 보고픔, 웃음을 잃어버린 가족들, 내 젊은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을 수없이 다니면서 아들이 한없이 보고 싶다. 처음엔 (전사자) 여섯 가족은 서먹서먹했지만 자주 만나다보니 요새는 친하게 지낸다. 2002년은 힘들고 고통을 주는 쓸쓸한 한 해였다. 내 응어리진 가슴에 한을 남겼다. 무슨 약으로도 치유가 안된다. 평생 흘릴 눈물을 쏟아버렸다.


새해가 밝아오지만 아들에 대한 보고픔은 더욱 간절했다. 한국 주둔 미사령관이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 최고의 대우와 예우를 한다던 정부와 기관은 전화(는커녕) 편지 한 통 없다. 국방부도. 내 젊은 아들은 어느 나라, 누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말인가. 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졌다. (과연 우발이었을까) 누가 책임을 진단 말인가.


모 신문 인터뷰에서 국정원 내정자라고 한 서동만 교수는 서해교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죽었단 말인가.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다). 국방부에도 (항의)했다.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2003년) 6월 11일 기다리던 아들의 제대날이다.


대문을 열고 ‘나 왔어’(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올 것만 같다. 문도 열어보고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린다. 안절부절못하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까).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들은 오지 않는다. 북받쳐오는 설움에 남편을 붙들고 ‘왜 동혁이는 오지 않냐?’ 고 미친 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치기공과 나와 치공소 차려 아빠 엄마 행복하게 해준다던 아들. 씩씩하고 건강하게 반듯이 자라준 아들이다. 속 한번 썩이지 않고 장학금 받아 공부한 아들이다. 6월은 힘들다. 내 아들의 흔적들을 찾아서 여기저기 다녀본다. 마음이 편치가 않는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해군이 보이면 눈이 번쩍인다. 혹시 내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동혁아, 세상에 태어나 피어보지도 못하고 너는 가버렸지만 엄마는 너를 너무 너무, 엄마의 분신(扮身)보다도 너를 사랑했다. 네가 태어나 아빠 엄마 너무 행복했다. 반듯하게 잘 자라준 아들에 대한 연민일까. 오늘도 내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해가 저문다. 총소리, 전쟁없는 하늘 나라에서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자. 이 글은 엄마가 하늘나라에 부친다. 사랑하는 내 아들에게로.


서해교전 부상자를 치료해준 수도병원 모든 분들께, 성금을 내주신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서동만 국정원 기조 실장의 ‘폭탄 발언’

이경진씨 수기에는 ‘서동만 국정원 기조실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씨는 ‘서동만 교수는 서해교전은 김정일 책임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죽었단 말인가’라고 쓰고 있다.


상지대 교수에서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에 기용된 서동만(徐東晩)씨는 교수 시절인 2002년 가을 서울 언론재단에서 열린 통일연구원 주최 북한동향 관련 세미나에 참석, 서해교전에 관련된 언급을 했다.


당시 서 교수는 “서해교전이 북한의 작전사령부 차원에서 이뤄지고 평양에서 볼 때는 우발적 전쟁일 수 있다”고 발언했다. 서 교수는 이 세미나 이전에도 여러 자리에서 “서해교전은 김정일이 관여하지 않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는 취지의 말을 해왔다. 당시 학계에서는 서 교수의 이같은 시각은, 모든 것이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는 북한의 수령체제를 간과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서 교수의 편향된 대북관(對北觀)이 공론화된 것은 서 교수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 의해 국정원 기조실장 후보로 내정되면서였다. 고영구 국정원장 후보 청문회에서 한나라당 정형근(鄭亨根) 의원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은 서해교전 관련 언급을 비롯해 서동만 내정자의 편향된 대북관이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정보기관 간부로는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월드컵 3,4위전을 앞둔 6월 29일 벌어진 서해교전에 대해,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은 북한의 김정일이 월드컵의 대대적인 성공을 시기한 나머지 재를 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씨는 청문회 내용이 실린 신문 기사를 보고 격분한 나머지 수기에 이를 언급했다고 한다.


‘많은 상처를 안은 부모 마음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청와대 민원실로 전화했다. 이런 미친 인간은 국정원 내정자로 뽑으면 안된다고 항의(했다). 국방부에도 했다.’


후기

해군 병장 박동혁(朴東赫:1981.8.25~2002. 9.20)은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목수인 아버지 박남준씨는 박동혁이 태어날 때 쿠웨이트에 건설 노동자로 파견 나가 있어 장남이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박씨는 지금도 33년째 목수일을 하고 있다.


기자가 지난 6월 초 서해교전 전사자 6인의 유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접촉했을 때 가장

완강하게 기자의 접근을 거부한 게 박동혁 병장의 유가족이었다. 심지어 6월 6일 대전 국립현충원에 찾아가서 만났을 때도 박남준씨와 이경진씨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었다. 감히 짐작하건대, 여섯 유가족 중 아들에 대한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는 부모가 박동혁 병장 부모이리라. 한쪽 다리를 잘라낸 뒤 환지통(幻肢痛), 장출혈 등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다 죽어간 군인이 박동혁 병장이었다.


박남준씨와 이경진씨는 아들이 겪는 그 처절한 고통을 80일 동안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박남준씨의 집은 안산시 부곡동의 평범한 연립주택이다. 오후 4시쯤 현관 초인종을 눌렀을 때 차남 동민(한양대 기계공학과 2학년)씨가 문을 열어줬다.


“아버지, 어머니는 요 앞에 나가셨으니 곧 들어오실 겁니다. 들어와서 기다리세요.”거실에 앉아 집안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조그만 탁자에 시선이 갔다. 거기에는 갓난아기의 기념사진이 놓여 있었다. ‘벌써 손주를 봤을 리는 없을 텐데, 저게 누구 사진이지?’ 기자가 동민씨에게 “저게 누구 사진이지요?”라고 물었다.


그는 “형 사진이에요”라고 답했는데, 기자는 처음에는 ‘형’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구라고요?” “동혁이 형 백일 때 사진이에요.”부모는 먼저 간 아들을 잊지 않기 위해 백일 사진을 놓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백일 사진 옆, 큰 액자 속에는 고등학교 졸업 때 부모와 함께 찍은 사진, 대학 재학시절 찍은 사진, 참수리호로 바꿔타기 직전 타던 천안함 함정에서 찍은 사진 등이 들어 있었다. 잠시 후 부모가 들어왔다. 이경진씨는 “저번에 문전박대해서 정말 미안했어요. 그때는 정말 (모든 것에) 화가 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박남준씨는 “주간조선과 조선일보가 서해교전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객관적으로 보도해줘 우리 유가족들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이렇게 말하곤 아들의 유품(遺品)을 전부 꺼내 보여줬다. 아들 몸에 박혀 있던 파편 조각들, 아들이 군대 생활 중 써온 대학노트 한 권, 휴대폰. 비닐봉지에 담긴 파편 조각들은 화장하고 남은 것들이라고 했다. 이씨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파편 속에 있는 화약성분이 그렇게 무서운 것인 줄 몰랐어요. 이런 파편들이 동혁이 몸에 박혀 썩게 만들고 피를 토하게 만들었더군요. 다 나은 줄 알았던 상처들이 다시 도진 게 이 파편들 때문이었어요.” 박씨는 대학노트를 넘겨 보이며 “아들이 군대 생활 중 쓰고 메모한 노트인데,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보면 꼭 먼저 갈 것을 예견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안산에 있는 성포중학교와 경안고등학교를 졸업했다. 2000년 원광보건대 치과기공과에 입학, 1학년을 마치고 해군병 456기로 입대한 청년 박동혁. 기자는 대학노트를 한 장씩 넘기면서 짧은 생애를 살다간 한 청년의 꿈과 사랑과 고민을 공책 갈피 갈피에서 느낄 수 있었다. 노트에는 이형기의 ‘낙화(落花)’와 같은 명시(名詩)들을 여러 편 옮겨 적은 것이 보였다. 그가 남긴 글들은 틈틈이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효도하겠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 장래에 대한 고민과 설계 등도 보였다. 27살에 대학을 졸업해 취직하고, 35살에는 월수(月收) 얼마가 되고, 40살에는… 하는 식의 인생 계획이었다.


기자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 대목은 사랑하는 여성과의 헤어짐을 괴로워하는 대목이었다. 대학 동기생과 사랑을 하다가 입대했는데, 그 여성이 자신이 입대한 후 변심(變心)했다는 내용이었다. 사랑하는 여성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괴로운 마음을 ‘3년을 못기다리는 여자는 평생의 반려가 될 수 없다고 한다’는 표현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대목도 있었다. 대한민국의 남자로 태어나 병역의 의무를 다하려 한 것이 박동혁 병장의 사랑을 갈라놓았고, 애인의 절교 선언으로 그는 참수리를 타면서 넘실거리는 검푸른 파도 위에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도 느꼈을 법하다.


찬찬히 마지막 편지까지 읽어내려가면서 기자는 박동혁 병장이 얼마나 건강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는지를 깨달았다. 군 복무 중 실연(失戀)의 아픔을 당했으면서도 그는 현실을 비관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의 하나로 삼으려 했다. 그는 군 제대 후 복학해 공부를 열심히 해 고생하는 부모님을 잘 모시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런 착한 아들을 그들은 그렇게 앗아갔다.


조성관 주간조선 차장대우(maple@chosun.com)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 한계선 NLL을 사수하기 위해 북한함정과 교전

 

고)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조천형중사,서후원 중사, 박동혁병장

윤영하 소령 해사 50기

'73년 11월 24일 경기도 시흥시 출생
 송도고 졸업('92년) 해사 50기로 입교,

'96년 3월 1일 해군 소위 임관
 계봉함 갑판사관, 118조기경보전대 상황장교, 제천함 작전관, 미7함대 유학
'01년 1월 2일부로 참수리 357 정장으로 부임하여

'02년 6월 29일 연평도근해 임무수행중 적함과 교전으로 현장에서 장렬히전사
 전사 후 충무무공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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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국 중사 부사관 155기

'75년 01월 31일 충남 보령 출생
 광천상고 졸업('93년)
'95년 2월 7일 해군에 입대, 동년 6월 17일 부사관 155기 임관
 포항함, 충주함, 부산함 조타사
'01년 12월 1일부로 참수리 357호정 조타장으로 부임하여
'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임무수행중 적함과 교전으로 현장에서 장렬히전사

 전사 후 화랑무공훈장 추서

조천형 중사 해상병402기 / 부사관 173기

'76년 4월 16일 대전시 출생

 대전체고 졸업('95년) / 대전대 입학('95년) , 1학년 재학 중(휴학)

'96년 해군병 제 402기로 입대 / '98년 8월 22일 해군 병기하사로 임관
 작전사 의장대 의장병, 충남함 병기사
'99년 10월 25일부로 참수리 357호정 병기사로 부임하여
'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임무수행중 적함과 교전으로 현장에서 장렬히전사
 전사 후 화랑무공훈장 추서

황도현 중사 부사관 183기

'80년 2월 27일 서울시 중랑구 상봉동에서 출생
 청량고 졸업('98년) / 숭실대 입학('98년)
'00년 3월 20일 해군부사관 183기로 입대, 동년 해군 병기하사로 임관
'02년 숭실대 명예졸업
 영주함 병기사
'01년 8월 22일부로 참수리 357호정 병기사로 부임하여
'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임무수행중 적함과 교전으로 현장에서 장렬히 전사
 전사 후 화랑무공훈장 추서

서후원 중사 부사관 189기

'80년 11월 28일 경북 의성군 옥산면 출생
 상산전자공고 졸업('99년) / 대구기능대 졸업('01년)
'01년 8월 6일 해군에 입대, 동년 11월 10일 부사관 189기 내연하사로 임관
 참수리 357 내연사
'02. 3월 13일부로 참수리 357호정 내연사로 부임하여
'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임무수행중 적함과 교전으로 현장에서 장렬히 전사
 전사 후 화랑무공훈장 추서

 박동혁 병장 해상병 456기

'81년 경기 안산시 출생
 경안고 졸업('00년) / 원광보건전문대 입학('00년), 1학년 재학 중(휴학)
'01년 2월 12일 해군 병456기로 입대
 천안함 의무병
'02. 4월 20일부로 참수리 357호정의무병 부임하여
'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임무수행중 적 함과 교전으로 중상을 당해 3개월

 여의 투병생활 끝에 전사
 전사 후 충무무공훈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