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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풍월 사선암 2007. 3. 21. 02:11

체 게바라 -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한겨레 21 (1997. 10. 9)


 

1.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1928. 6.14 아르헨티나 로사리오~1967.10 볼리비아) 

(사진/유해로나마 귀환하는 게바라를 환영하는 쿠바국민들. 영웅없는90년대에 게바라 열풍은 그가 맞서 싸웠던 제국주의 미국과 유럽에까지 번지고 있다.)


“영웅이 다시 돌아왔다.”


60년대 ‘혁명영웅’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사망 30돌을 맞아 전세계적으로 ‘게바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게바라 바람은 그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처형된 10월8일(1967년)이 가까워오면서, 혁명의 고향 쿠바를 정점으로 남미를 돌아 이미 유럽·북미 등까지 영향권으로 삼은 상태다.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제국주의’ 미국에 대항하는 ‘수많은 베트남’을 만들기 위해 전세계 전장을 뛰어다닌 게바라는 60년대 저항운동의 상징이었다. 검은 베레 모자에 아무렇게나 기른 긴 머리칼,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열정적인 눈빛, 굳게 다문 입술은 당시 유럽과 남미 대학의 기숙사 벽을 어김없이 장식했다.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

지난 59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쿠바의 2인자 자리를 박차고 아프리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 등지에서 게릴라활동을 계속하다 전장에서 숨진 게바라. 이 열정적 투사에 대해 당시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평했다. 또 미래의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도 당시 “최근 가장 충격적인 일이 무엇이냐”는 언론의 질문에 “게바라의 죽음”이라고 즉각 답했다. 그만큼 게바라는 진보진영의 가슴속에 깊은 영향력을 남겼다.


하지만 이런 그의 영향력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한때 쇠퇴하는 듯했다. 그가 주창한 게릴라전이 남미에서조차 세력을 잃어갔고, 그의 사상적 뿌리인 마르크스주의도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등으로 빛이 바래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체 게바라를 부르는 소리는 90년대 들어 오히려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웅’을 기리는 목소리는 사망 30돌인 올 들어 빠르게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체 게바라가 ‘혁명의 고향’으로 삼았던 쿠바에서는 요즘 거리마다 온통‘게바라’다. 이곳에서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를 비롯한 곳곳의 대형 포스터나 티셔츠, 심지어 맥주잔 받침이나 우표 등 모든 곳에서 쉽게 발견된다. 또 쿠바의 <중앙텔레비전>은 매일 5분간 체 게바라에 대한 연속기록영화를 돌리고 있다. 이 기록영화는 같은 날, 그러나 다른 해의 체 게바라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지난 9월25∼27일 체 게바라에 대한 국제심포지엄이 열리는 등 그의 인생을 재조명하는 각종 학술행사도 잇따르고, <체, 영원한 승리까지>라는 CD-ROM을 비롯해 그의 일기나 논문, 기타 편지글 등의 출판도 활발하다.


그러나 쿠바에서 게바라 열기를 지피는 것은 이런 외형적 행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곳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게바라에 대한 이미지가 쿠바의 게바라 열기를 이끌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듯하다.


“게바라는 나에게 성인이었어요. 이 세상에 체 게바라처럼 좋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볼리비아에서 체가 투쟁한 지역의 농민들의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와 함께 게바라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들도 아마 나와 같은 마음이겠지요. 그는 예수와 같이 가난한 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까요.”


올해 84세인 안드레스 노인은 59년 쿠바혁명 당시의 게바라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듯 지그시 눈을 감고 말한다. 게바라를 직접 대했던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게바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존재다. 특히 쿠바를 ‘해방’시킨 뒤 국립은행 총재 등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사탕수수밭에서 자발적인 노동을 했던 게바라의 모습은 그를 더욱 또렷이 남겨 놓은 것이다.


사망지 볼리비아는 세계인의 순례지  

(사진/지난 7월 쿠바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 1만1천여명 참가자들에게 게바라는 가장 인기가 높았다.)

 

"그는 누구보다 용감한 투사였지요. 그는 볼리비아에서 숨졌지만 어쩌면 콩고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에겐 실현해야 할 이상이 있었으니까요." 지난 60년 콩고에서 게바라와 같이 투쟁한 빅토르에 드레케 크루스는 ‘죽음도 불사하던’ 게바라의 모습이 그뒤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게바라를 실제 접했던 이들의 감동은 곧 그대로 젊은층에게도 전해지게 마련이다. 심지어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알베르티코(6)도 “체는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저는 체를 사랑해요”라고 밝혔다. 게바라는 볼리비아로 출발하기 며칠 전에 5명의 자식들에게 쓴 이별편지에 “아버지가 코끼리만한 큰 키스를 보낸다”고 썼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물론 이런 사랑조차 그의 ‘혁명에의 길’을 막지는 못했다.


쿠바가 게바라 바람의 핵심이기는 하지만, 이 섬나라는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게바라 열기를 막기에는 너무 작아 보인다. 이미 게바라 열기는 쿠바라는 울타리를 넘은 지 오래다. 전세계의 게바라 바람은 이미 지난 8월 쿠바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1백31개국에서 모인 1만1천여명의 각국 청년들은 게바라 셔츠를 입고, 검은 베레를 쓴 채 열성적으로 게바라 깃발을 흔들었다. 게바라가 목숨을 잃은 볼리비아에는 최근 매주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성지순례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들 ‘게바라 순례자’들은 게바라가 66년 12월 볼리비아에 도착해서 67년 10월 최후를 마칠 때까지의 ‘게바라 루트’를 그대로 뒤따른다. 이들의 순례는 볼리비아의 법적 수도인 수크레에서 시작해 버스로 7시간 거리인 이게라로 향한다. 이게라는 게바라가 처형됐던 곳이다. 또 이들은 발걸음을 처형된 게바라가 ‘전시’됐고, 그의 유해가 발견된 바예그란데로 이어진다. 외신에 따르면, 암스테르담에서 온 파울 로웰러(46)는 “우리는 대학 교정에서 게바라의 깃발을 흔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평등과 정의를 의미했다”면서 순례자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라틴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대학생대륙연맹(OCLAE)도 이 성지순례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은 순례단을 두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한 그룹은 지난 9월17일에 멕시코 모렐로스시에서 출발하여 중미나라들을 거쳐 볼리비아로 향했다. 또 한 그룹은 10월1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게바라의 고향인 아르헨티나 로사리오를 거쳐 볼리비아로 향했다. 이들은 10월8일 이 게라에서 만나 게바라 추모집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들은 지나가는 나라의 청년들을 순례대열에 합류시키는 등 남미 전역에 게바라 바람을 더욱 높일 것으로 보인다.


영웅없는 시대가 게바라를 부른다 

(사진/게바라가 투쟁했던 지역에서는 게바라를 성인으로추앙한다.)


이 밖에도 남미에서의 게바라 열기는 매우 뜨겁다.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 여러 나라가 게바라 학술대회를 열고, 니카라과에서는 그간 산디니스타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게바라 동상건립이 10월8일에 맞춰 완성된다.


게바라열기는 그의 활동영역이 아니었던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도 식지 않고 있다. 독일에서는 최근 좌파성향의 각종 잡지는 몰론 대표적 시사주간지 <슈피겔>에서도 게바라 특집을 다뤘다. 또 각 방송사에서도 게바라를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을 잇따라 방영하고 있다. 유럽의 게바라 바람은 얼마 전 스페인 마드리드시의 몬주익공원에서 열린 쿠바혁명기념식에서도 나타난다. 공원에 모인 수천명의 사람들은 카스트로와 함께 게바라의 사진을 들고 그를 기렸다.


게바라가 ‘제국주의’로 규정했던 미국에서도 게바라 바람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쿠바를 적성국으로 지목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공식적인 게바라 기념식이 열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대학 캠퍼스에 학생운동 단체들은 집합장소를 ‘체 카페’로 이름붙였다. 게바라에 대한 평가는 쿠바를 ‘독재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쿠바 망명가들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플로리다대학에서 쿠바역사 저술을 하고 있는 미겔 곤살레스는 “게바라가 쿠바 독재에 전혀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세계의 가난한 사람, 짓밟힌 사람을 위한 상징인 것만은 사실이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세계는 한 게릴라 전사에 열광하는 것일까. 최근 <체 게바라-그 혁명적 삶>이라는 전기를 편낸 미국 전기작가 존 앤더슨은 “그가 60년대의 신화가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바라 전기를 위해 지난 5년간 전세계를 누빈 그는 또 90년대 들어 게바라 바람이 대중문화 곳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다. 앤더슨은 이런 바람의 원인에 대해 “영웅없는 이 시대가 영웅의 요소를 갖춘 그를 불러오고 있다”고 진단한다.


유럽에서의 게바라 바람도 이런 60년대적 요소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평이다.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혁명운동을 했던 60년대 중반은 유럽에서도 변혁의 시기였다. 당시 나온 온갖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의 외침들은 ‘68년 학생혁명’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 속에서 이런 정신은 많이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럽의 게바라 바람은 “단지 그의 정치적인 입장에 이끌려서라기보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가장 완전하게 구현한 인간상으로서 체 게바라를 받아들였다”는 수많은 회고담 속에서 잘 드러난다.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유럽인들은 가슴속엔 “체 게바라는 살아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게바라 바람에 대한 분석은 쿠바에서도 마찬가지다. 쿠바공화국의 국가이사회 회원인 아르관도 하르드 다발로스는 “체는 아메리카의 역사에서 전례없이 행동과 사상을 통일시킨 특별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게바라 열기는 앞으로도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을까. 쿠바의 한 지도급 인사는 이에 대해 “그렇다”라고 단언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체와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60년대라는 시대상과 그 시대를 불꽃같이 살다간 게바라와 같은 인물을 다시 기대할 수 없는 이상 게바라는 앞으로도 ‘이상을 꿈꾸는 인간’의 대표로 남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현재의 게바라 열풍은 그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단지 그의 ‘이미지’에 의존하는 점이 더 크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로 게바라의 출생지인 아르헨티나에서조차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체 열풍은 단순 '저항 이미지 탓' 분석도

등 외신들은 이곳에서 많은 젊은이가 게바라 티셔츠를 입는 이유에 대해 “단지 그가 외형상 풍기는 ‘저항 이미지’가 좋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그는 60년대 팝스타 지미 핸드릭스나 요절한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중 어떤 것을 따르든 현재 게바라는 ‘매우 비이상적이고, 냉소적인’ 우리 시대에서 균형추 구실이라는 또하나의 ‘혁명’을 수행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김보근 기자 브레멘=최우성 통신원 아바나=호세 아리오사/ 자유기고가


 

2. 게바라를 두번 죽이지 말라

(사진/체 게바라를 상징하는 기념품들. 거대기업들이 게바라 상품화에 나서면서 게바라의 정신을 흐려놓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기가 확산되면서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서구자본의 움직임이 극성이다. 하지만 게바라를 마케팅포인트로 삼는 서구자본의 움직임은 게바라의 ‘혁명정신’을 오히려 희석시킨다는 점에서 뜻있는 사람들의 비판을 사고 있다.


사실 게바라를 기념하기 위한 상품은 이전부터 쿠바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왔다. 티셔츠나 추모 배지, 베레모 그리고 목각인형이나 포스터, 흑백사진집 등은 쿠바의 관광지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것들이다. 또 사망 30돌인 올 들어서는 <체 게바라-혁명적 삶>이나 <붉은 삶> 등 3종의 전기가 영어와 스페인어 등으로 출판됐다. 또 전세계에서 편지모음이나 추모집 등 그에 대한 다양한 서적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는 체 게바라 관련 영화가 제작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은 상품가치로 화할 수 있는 이런 대중적 관심을 놓칠 자본이 아니다. '게바라 열기'가 높아지면서 서구기업의 광고에 게바라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6년 스위스의 시계회사가 자사 시계에 체 게바라를 새겨넣었을 때만 해도 튀는 발상이라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러나 곧이어 영국의 한 맥주회사는 상표를 ‘체’로 정한 맥주를 출시했다. 또 오스트리아의 스키전문업체 피셔는 이미지광고에 게바라의 얼굴을 커다랗게 집어놓고선 “스키혁명을 하는 피셔”를 선전해댔다.


일부에서는 쿠바나 볼리비아 정부도 추모열기를 이용해 게바라를 상품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게바라를 처형한 볼리비아에서 현재 추진중인 ‘게바라 성지순례’도 볼리비아 정부가 뒤늦게 게바라에 대한 상품가치를 발견하고 ‘장삿속’으로 내놓은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들 자본은 전세계 사람들의 게바라에 대한 본능적인 이끌림과는 무관하게, 90년대 들어 게바라 열풍에 편승해 ‘문화상품’으로 게바라를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스위스 시계회사의 ‘체’ 시계나 영국 맥주회사의 ‘체’ 맥주에서 알 수 있듯, 이들 자본이 게바라를 “대단히 현대적이고 한창 유행중인 90년대적인 감성”으로 한껏 부풀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광고업자는 “우리는 그의 이념 따윈 필요없다. 그의 반항적인 이미지와 얼굴만이 관심의 대상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일련의 게바라 상품화에 대해 아바나의 로드리게스(교사·36)는 “ 지금까지 만들어진 체 게바라 기념상품은 그를 기리기 위한 소박한 상징 물이었다”며 “그러나 거대기업들이 상품화하면서 그의 정신까지도 팔아 먹는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미국 샌디에이고의 심리학자 레온 파헤르만은 게바라를 따르는 사람과 마이클 조던을 숭상하는 사람의 차이를 지적하며 그 위험성을 이 렇게 경고한다. 그에 따르면, 조던 숭배자는 그가 조던을 따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단지 나이키 운동화를 사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게바라 숭배자는 다르다. 게바라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가 싸웠던 어떤 것을 ‘자기화’하기 위해 힘쓴다는 게 이 심리학자의 분석이다. 그러나 최근 자본은 게바라의 삶을 “인간이 또다른 인간을 억압하는 '그 무엇'에 대해 근본적으로 저항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삶”에서 “ 단지 저항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포장해버렸다. 이에 따라 점차 게바라와 조던간의 차이성은 희석돼버리는 것이다.


‘60년대 대중문화 중 약탈되지 않은 마지막 상징’인 게바라가 이제 서서히 현대 상업주의의 약탈대상이 되고 있다.


브레멘=최우성 통신원 아바나=김상준/ 자유기고가


 

3.혁명의 불꽃은 타고 있다

(사진/게바라와 가장 많이 닮았다는 멕시코 농민반군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의 지도자 마르코스. 게바라와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군과 밀림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죽은 게바라가 산 독재자를 물리친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처형된 지 30년이 된 현재 그가 추진했던 혁명 은 아직 미완일 뿐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게바라의 죽 음이 그 자체로서 남미 등 많은 지역의 반독재투쟁의 지표로 오늘날까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게바라의 후예들’은 그가 직접 활동했던 아프리 카 콩고와 남미 볼리비아는 물론 멕시코·미얀마 등 세계 곳곳에서 다양 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


콩고혁명 노력 32년만에 결실

게바라의 후예들로는 우선 그가 <게릴라전>의 저자인 데서도 알 수 있듯 전세계 반정부무장투쟁 조직을 들 수 있다. 올 들어 <체 게바라-그 혁명적 삶>이라는 책을 펴낸 미국 전기작가 앤더슨의 게바라에 대한 관심도 이들 게릴라 무장투쟁 조직들에 대한 취재에서 시작됐다. 앤더슨은 80년대 중반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등 전세계 게릴라 조직을 찾았다. 그때 그는 지역적 차이를 넘어 똑같은 말을 들었다. “우리들은 게바라를 존경하고 게바라를 따르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시대를 넘어 지역을 넘어 존경을 받는 체 게바라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일까”라는 의문에서 게바라 연구를 시작했다고 당시를 되돌아본다.


이들 전세계 게릴라조직 중 특히 멕시코 농민반군 ‘사파티스타민족해방 군’의 지도자인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게바라와 무척 닮은꼴로 불린다. 지난 94년 1월1일 ‘억압받는’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주 원주민을 이끌고 봉기를 주도한 그는 게바라와 같이 중산층 출신의 인텔리겐차다.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 비센테(39)라는 본명을 가진 그는 프랑스 소르본대을 유학한 뒤 치아파스주 사회봉사활동을 통해 원주민 농민들의 억울한지를 체감하고 ‘혁명가’의 길에 들어섰다. 현재 그는 정부의 수배 속 치아파스주 라칸돈 정글 속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또 게바라가 지난 65년 해방군을 조직해 싸웠던 콩고(옛 자이르)에서도 올해 그의 노력이 꽃을 피웠다. 당시 게바라와 함께 싸웠던 반군지도자 로랑 카빌라(56)가 지난 5월17일 수도 칸샤사를 점령한 것이다. 이들 반 군은 수십억달러를 부정축재했던 모부투 세세 세코의 32년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오는 99년 4월까지 대통령 선거를 치를 것을 약속했다. 결국 65년 당시 게바라의 콩고혁명 노력은 32년이 지난 이제야 결실을 맺은 셈이다.


그러나 사실 90년대 들어 전세계적으로 게릴라 활동이 크게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한때 ‘내전 전시장’으로 불렸던 중남미만 해도 현재는 멕시코와 콜롬비아·페루 등 단 3곳에서만 게릴라 활동이 진행중이다. 또 남아 있는 무장투쟁조직도 콜롬비아의 경우처럼 ‘변질’된 경우도 있다. 콜롬비아의 무장투쟁조직은 이미 마약거래에 관여해 상당한 이권을 챙기 는 등 그 순수성을 비판받고 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의 한 정부관계자는 체의 낭만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혹평한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아바나의 역사학자 라사로루이스 곤살레스는 “그의 혁명이론 중에는 시대와 걸맞지 않은 점이 많다”면서도 “현 시대의 게바라 열기는 이런 상황변화 속에서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다. “당시 체의 무장투쟁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군사통치로 대다수 민중들이 정치과정서 배제된 것과 관련된다. 그러나 현재는 그의 이상을 실현할 정치적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 게바라의 후예들은 그의 ‘게릴라론’을 따르는가 여부에 따라 결정할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인간세상’을 위해 노력하는지로 결정해야 한다는 지적인 것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농민반군만 해도 정당으로의 진출 등 변화된 상황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키려 노력중이다.


이런 광의의 게바라 후예의 예로는 지난 73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67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 군사정권이 무너지는 데 ‘죽은 게바라’가 큰 힘이 됐다고 평가한다. 당시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대학가는 볼리비아 전장에서 숨진 게바라의 사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조국에서 ‘게바라의 후예’로서 무엇을 할까를 고민했다. 이런 이들의 고민은 곧 거대한 힘이 돼서 독재정권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인간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좌표, 게바라

‘죽은 게바라’의 영향력은 최근 그의 유해가 발견된 볼리비아에서도 확인된다. 게바라의 유해가 발견된 이후 볼리비아에서는 또다른 사회주의 지도자인 마르첼로 키로가의 주검을 찾는 운동이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볼리비아의 마직막 독재기간인 지난 80년 7월 살해됐다. 키로가도 유해가 발견되기 전 게바라와 마찬가지로 어디에 묻혀 있는지, 어떻게 살해됐는지 여전히 의혹에 싸여 있다. 하지만 볼리비아 민주단체들은 “30년 가까이 된 게바라의 유해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17년밖에 안 된 키로가의 주검을 못찾을 이유가 없다”면서 수색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뿐이 아니다. “부자에게 부를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다”는 게바라의 목표는 아직도 부익부 빈익빈이 편재한 인간사회에서 ‘좀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이들의 변함없는 목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민운동 으로든, 노동운동 혹은 정치행위의 행태로든 이 목표를 추진하는 이들에게 게바라는 이미‘살아 함께 하는 전우’다.


김보근 기자


 

4. 카스트로는 동지였는가

(사진/게바라 총상을 배경으로 연설하는 카스트로. 볼리비아에 갇힌 게바라 에 대한 지원을 철회해 결국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게바라의 죽음에 카스트로는 과연 무관한가.


게바라 사망 30돌을 맞아 쿠바 정부가 그에 대한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준 비하는 가운데 “게바라의 죽음에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잇따라 나와 그 진위 여부가 주목되고 있다.


게바라가 살해된 직후 카스트로 의장은 반드시 게바라와 그 부하들을 찾 아 쿠바로 데려 올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 약속을 지켰다 . 국내로 돌아온 게바라는 일정 부분 쿠바에서 ‘통합이데올로기’ 구실 을 했다. 아바나의 거리에서 쿠바인들이 외치는 “게바라와 함께”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을 추구 했던 게바라가 현재 미국의 봉쇄로 고통받고 있는 쿠바의 경제상황에 비 춰볼 때도 게바라의 상징성이 매우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멕시코 정치학자인 요르게 카스타네다는 최근 발표한 게바라 전기 <붉은 삶>에서 소비에트연방이 쿠바에 압력을 가해 볼리비아에 있는 게바 라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게 함으로써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카스타네다는 67년 소련은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 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고 당시 국제정세를 설명한다. 이미 미국과 소련 은 62년 ‘쿠바사태’로 한바탕 전운을 피운 적이 있었으나, 소련은 그뒤 데탕트쪽에 무게를 두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소련은 미국이 텃밭 으로 여기는 남미에 ‘분란을 일으키려는’ 게바라를 곱지 않게 봤다는 것이다. 소련은 게바라를 구조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결성한 카스트로에게 압력을 넣어 이 부대를 해산하게 만들었다는 게 카스타네다의 주장이다. 결국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게바라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의 지휘를 받은 볼리비아군에 의해 사살된다.


이런 주장은 러시아로부터도 나오고 있다. 지난 9월4일 <모스크바 뉴스> 도 전 KGB 관계자의 말을 빌려 ‘게바라의 죽음과 소련의 관계’에 대한 보도를 했다. 당시 남미에서 활동하던 KGB 요원인 니콜라이 레오노프는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소련이 카스트로 뿐 아니라 볼리비아공산 당에도 게바라를 지원하지 않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쿠바 정부는 이런 주장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외신들은 쿠바 정부가 게바라 를 더욱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옛 소련 붕괴 뒤부터라고 지적해 이런 의혹에 무게를 실어주 고 있다. 만일 카스타네다와 <모스크바 뉴스>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미 지금의 카스트로 는 지난 59년 게바라와 같이 혁명을 논하던 그 카스트로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의사에서 혁명가로, 게바라 격정의 39년 

(사진/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게바라는 질병치료보다. 세계의 모순 을 치료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해 안정된 의사직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이름은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단순한 이름 이상의 것이 된다. 혁명과 정에서 게바라 스스로가 붙인 ‘체’는 스페인 말로 ‘어이 친구’ 정도지만 바로 이 이름 이 ‘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한 완성된 인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 아들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등 엘리트 코 스를 밟았다. 하지만 당시 그가 두 번에 걸쳐 실시한 남미 전역 여행은 게바라를 크게 바꾸 어 놓았다. 여행을 통해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지켜본 게바라는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이 세계 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53년 과테말라로 간 그는 과테말라의 진보정권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지원한 쿠데타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미국이 진보적 정부를 반대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56년 7월 피델 카스트로 형제를 만나면서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 다. 게바라는 같은 해 11월 80여명의 ‘전사’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지만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에 발각돼 거의 전멸한다. 그러나 이때부터 전설적인 쿠바혁명의 신화가 창조됐다. 게바라, 카스트로 등 몇몇 생존자들은 마에스트라산맥에 숨어 게릴라활동을 벌이며 혁명군 을 모은다. 이들은 수만명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군인들을 상대해오다 58년 산타 클라라전 투에서 승리하면서 승기를 잡는다. 결국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59년 1월2일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그뒤 쿠바정부에서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을 역임했고, 공산권과 제3세 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지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 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그는 65년 4월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혁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 1년 뒤 게바라는 우루 과이의 비즈니스맨으로 가장해 볼리비아로 숨어들어갔다. 게바라가 볼리 비아를 택한 것은 볼리비아가 5개국과 국경을 접하는 등 혁명의 불씨가 남미 전역으로 잘 확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볼리비아 정부군을 지원하는 한편, CIA 요원을 파견해 게 바라를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줬다. 결국 게바라는 67년 10월8일 체포된 뒤 처형됐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생활은 다룬 다큐멘터리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볼리비아 일기>에 따르 면, 그는 “왜 인텔리 의사가 자신을 이런 상황까지 몰아넣었느냐”는 볼리비아 여인의 질 문에 간단히 “나의 이상을 위해”라고 답한다. 다큐멘터리는 또 관계자의 인터뷰를 통해 “게바라가 처형된 뒤 반쯤 뜬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가 추구한 이상의 실현을 죽어서나마 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6. 32년만에 유해로 귀환

 

‘돌아온 혁명 영웅 체 게바라’는 오는 10월17일 쿠바의 산타클라라 기 념관에 매장된다. 지난 7월12일 볼리비아에서 쿠바로 옮겨진 게바라의 유 해가 이날 마침내 이 쿠바혁명 전적지를 안식처로 삼는 것이다. 게바라 군대가 정부군을 크게 물리친 산타클라라 전투 뒤 39년, 콩고혁명을 위해 쿠바를 떠난 지 32년 만의 일이다. 이 날은 또 쿠바 정부가 정한 게바라 추모주간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쿠바 정부는 게바라의 유해를 우선 수도 아바나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에 11일부터 13일까지 전시할 예정이다. 그 뒤 14일에 아바나에서 3백km 동 쪽에 있는 산타클라라의 묘지로 옮긴다. 아바나에서 산타클라라까지의 행 진루트는 지난 58,59년 그가 산타클라라에서 아바나로 가던 꼭 그 길이다 . 방향만 반대일 뿐이다. 10월17일 매장행사는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영될 예정이다.


이렇게 게바라가 30년 만에 자신의 안식처를 찾은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처럼 보인다. 지난 6월28일 볼리비아 산타크루스 서쪽 240km 떨어진 바예그란데 공항 근처 공동묘지에서 발견되기 전까지 게바라 유해의 행방 은 지난 30년간 갖가지 추측만을 낳았다.


게바라의 유해를 찾기 위한 그간의 조사와 연구는 아주 어려운 조건에서 진행됐다. 우선 희생된 게릴라 대원들의 시체가 땅에 묻혔는지조차 확실 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볼리비아군이 게바라의 주검을 헬리콥터로 아마 존 밀림에 버렸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이들은 따라서 이미 게바라 의 주검은 사나운 동물의 밥이 돼 버렸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이렇게 게바라 유해 발굴이 어려움을 겪은 것은 볼리비아 군대가 시체가 묻혔을 수도 있는 지역과 장소에 대한 정보 차단했던 탓도 컸다.


그러나 쿠바와 아르헨티나인으로 구성된 조사팀은 끈질긴 추적 끝에 처형 당시 게바라를 바예그란데 근처로 옮겼다는 운전사의 증언을 확보하고 이 지역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난 6월 말 포르말린 성분이 들어 있는 그의 유골을 발견한 것이다.


발굴 당시 게바라는 두팔이 없는 상태였다. 지난 67년 볼리비아군이 게바 라의 죽음을 쿠바 당국에 확신시키기 위해 주검에서 팔을 잘라 쿠바로 보 냈기 때문이다. 조사단은 곧 관련자들의 증언과 과학적 조사를 통해 이 유골이 게바라임을 입증했다. 그리고 게바라는 마침내 머나먼 혁명의 여정을 마치고 제2의 고향인 쿠바의 산타클라라에 묻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