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육영수여사 서거때 박순천여사의 조사 !

풍월 사선암 2006. 7. 27. 01:21

 

 

박순천 여사의 조사


무슨 말을 먼저 하오리까.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하오리까. 3천만에 흐느끼는 오연과 비통한 가슴과 가슴에 구비쳐 흐르는 이 슬픔이 경(?)로 어떻게 전해드리오리까. 영부인께서 가시다니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닌 생시란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비정의 세상이라 한들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결코 생시 아닌 꿈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닌 현실이라니 이 엄청난 사실 앞에 가슴이 메어 무슨 말을 하오리까. 그러기에 평소 당신을 그리던 남녀들이 수십만이나 떼지어 몰려와서 당신의 영전에 고개 숙여 말을 잊고 있지 않습니까.


영부인이시여. 당신을 잃고 슬픔과 외로움에 울부짖는 이 남녀의 호곡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이까. 얼굴과 얼굴에 하염없이 흐르는 슬픈 눈물의 폭포수가 보이지 않으시나이까. 학과 같이 청아하여 학의 천수를 누리라고 믿고 바랐던 여사께서 비명에 가시다니 이게 왠말입니까. 목련과 같이 청초하여 선녀와 같이 고이 승천하실 줄 알았던 여사께서 그 무지막지한 폭도의 흉탄에 가시다니 이게 왠말입니까.


이미 고희를 넘어 천수를 다한 내가 아직도 구만리 같은 앞날의 약속되어있던 여사의 영전에 서서 이 장단의 조사를 드려야 하다니 이게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내 먼저 불귀의 여로에 여사께서 꽂아주시는 분향의 향내를 맡으며 이 세상을 떠난다면 더 이상 영광과 보람이 없으리라 여겼는데, 이제 거꾸로 내가 여사의 영전에 향을 꽂고 가눌 길 없는 슬픔 속에 잠겨야 하다니 천도역행이 있다손 이에서 더하오리까.


옛말에 이르기를 신이 사랑하는 자는 일찍 죽고 잘 익은 과일은 빨리 떨어지기 쉽다고 하였습니다마는 여사께서는 분명 너무나 많은 신의 은총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났었고 너무나 잘 익은 과일과 같이 완숙한 인간이었었기에 이다지도 일찍이 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입니까.


일찍이 충북 옥천땅에서 태어난 여사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과 자색을 겸비한 재원으로서 한집안의 총애를 독차지했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총망을 받으며 자라났었다 합니다. 그리고 유복한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건만 어린나이에도 조금도 자만심을 가지는 일이 없이 겸손하고 온유한 서민생활을 통해 현모양처로써의 부덕을 쌓았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간직한 전형적인 한국여성으로서의 고운 마음씨와 어린시절에 닦았던 부덕은 마침내 이 나라 국가지도자의 영부인의 자리에 앉게 되면서부터 온 국민의 가슴속 깊이 덕과 정을 심어 결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구안의 여인상으로서의 영상을 아로새겨 놓았습니다.


흔히들 남을 말하기를 좋아하는 세상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직 칭송과 찬미의 소리만이 자자할 뿐 티끌만큼도 흠을 잡히는 일이 없었던 여사이었기에 흉탄에 맞아 쓰러지신 그 순간부터 수천 수만의 인파가 병원문전을 메웠고 3천만의 마음이 온통 영부인의 곁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비보가 전해지자 길 가던 신사는 걸음을 멈추었고 밥 짓던 주부는 슬픔에 잠기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였다 합니다. 청와대의 마련된 빈소를 메우는 인파가 연일 줄지어 늘어선 광경 속에서 나는 새삼 여사의 거룩한 인품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대통령 영부인이라는 사회적인 지위에서가 아니라 인간 육영수 여사에 대한 추모의 표현이었습니다. 여사께서는 진정 이 나라 온국민의 가슴에 따뜻한 모정을 심어주셨고 이상적인 여인상을 심어주셨습니다.


항상 맑은 미소와 따뜻한 표정을 잃지 않았던 청아한 모습은 대한의 여인 가슴에 말 못할 희열과 감격을 안겨주셨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티를 내지 않고 겸손하며 근박한 여사의 모습에서 소박하고 꾸밈새 없는 시골아낙네를 대하는 따뜻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리밥에 찬은 없지만은 종종 오셔서 식사라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씀하시던 그 낭랑한 여사의 웃음 띤 목소리가 지금도 쟁쟁히 내 귓전에 울리는 듯 하며 평소에 즐겨 입으셨던 해맑은 흰옷차림으로 덥석 손을 잡던 그 청초한 모습이 눈에 선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사께서는 그와 같은 인품의 소유자였었기에 결코 자신을 내새우려 하지 않으셨고 숨어서 남이 못하는 어려운 일들을 많이 하셨습니다.


천형의 죄인처럼 이 세상에서 버림받아 별로 돌보는 이 없이 살아가는 외로운 나병환자들을 손수 보살피셨고 수재민이나 화재민 등 졸지에 불행을 당한 국민들을 친형제의 불행처럼 애처로워하며 양지회의 회원들과 더불어 몸소 옷가지를 꾸미시고 현지에 나가 돌보시며 위로하셨던 그 일하며 자애로운 모정을 베풀어 어린이 회관이나 도서관을 마련하여 어린 싹이 고이 자랄 수 있도록 백방으로 마음 쓰셨던 일등 여사께서 살아생전에 이룩하셨던 일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내외손님을 영접하고 공식의전석상에 배석하며 부인의 우방순방에 동행하랴


참으로 어렵고도 고된 공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도 조금도 유루가 없어 국내는 물론 해외에 널리 참다운 한국의 여인상을 심어주셨던 당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당신의 영상은 대통령 영부인으로서의 육영수 여사이기에 앞서 한가정의 성숙하고 성실한 주부와 아내로서 또한 자애롭고 섬세한 어머니로서 그리고 조금도 남김없이 정을 나누고 애한을 함께 할 수 있는 정다운 이웃집의 한 부인으로서 우리와 마음을 통할 수 있는 친근한 한 인간으로서의 육영수 여사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온 국민의 애통해 하는 마음에는 하나도 가식이 없으며 모두가 친부모형제를 사별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폐부에서 솟구쳐 오르는 장단의 비애 속에 잠겨있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가시고 당신을 애도하는 3천만의 말없는 통곡소리만이 삼천리 강산에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여사께서 가심으로 우리의 가슴은 온통 텅 빈 허공감으로 메워 차서있습니다.


아 임이시여. 이 허전하고 허탈한 심정을 어디다 호소하며 어디에 의지하오리까. 평소 어렵고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지주가 되어주셨던 당신께서 가셨으니 이제 이들은 어디에 의지하며 누구로부터 따뜻한 위로를 받으란 말입니까. 어린 가슴에 슬픔과 괴로움이 쌓일 때에는 곧잘 청와대 사모님께 하소연 하였던 이 땅의 불쌍한 소년소녀들이 이제 그 착하고 인자하셨던 청와대 사모님께서 안계시니 이제 이들은 누구에게 그 고사리 같은 손을 놀려 하소연의 편지를 쓰란 말입니까.


여사께서 공사간의 내조의 공을 세우셨기에 막중한 대통령의 직책도 오히려 홀가분 하셨을 우리 대통령을 이제 누가 있어 능히 그처럼 자랑하고 빈틈없이 보필하며 돌보아드린단 말입니까. 아직도 미성년인 세 자녀의 뒷바라지와 교육에 그렇게도 마음을 쓰셨던 어머니를 여의였으니 이제 이들 세 자녀는 누구의 시중으로 구김새 없이 성장하란 말입니까.


육영수 여사 이 엄청난 한을 남기시고 어이 눈을 감으셨단 말입니까. 그렇게도 끔찍이 사랑하고 위하시던 부군과 어린 자녀들을 뒤에 두고 또한 그다지도 마음으로부터 빌고 바라던 나라와 겨레의 안녕과 발전에 대한 애절한 염원을 안은 채 어이 이다지도 홀연히 떠나셨단 말입니까. 당신께서는 가시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오직 부군인 대통령과 나라를 위해 조금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대통령께 집중되던 흉탄을 대신 받음으로써 부군을 구하셨고 대통령을 구하심으로써의 이 나라 국운의 비운을 막으셨습니다. 이는 가히 살신성인과 헌신부국의 귀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사의 그 고귀한 희생은 이 나라 온 겨례의 가슴에 뜨거운 민족의 얼과 솟구치는 반공정신을 북돋아 이해와 견해를 초월한 진정한 국민 총화의 열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여사께서는 가셨지만 여사의 그 지고한 순정과 고결한 인품 그리고 평소 온 국민의 가슴에 심어주셨던 따뜻한 정과 높은 뜻은 길이 우리가슴과 가슴에 살아남을 뿐 아니라 보다 영롱하게 결합되어 꽃피어 나갈 것입니다. 이것은 곧 여사의 서거가 결코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바로 새로운 재생의 출발이며 부활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사를 마지막 보내드리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여사께 우리 가슴에 함께 영생하시기를 빌고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사께서 생존해 계셨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당신께서 그렇게 위하시고 사랑하시던 여사의 부군이신 우리 대통령과 어린 세 자녀들에 대한 온 국민의 변함없는 애정과 예후를 다짐합니다.


그러므로 임이시여 조금도 유한 없이 고이 눈을 감으소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불러도 대답 없는 이 이름인줄 알면서도 그래도 목메어 불러보고 싶은 이 이름이기에 다시 한번 불러봅시다.


오 육영수 여사 삼천만의 가슴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사랑과 깊은 애도의 정을 모아 이에 삼가 여사의 명복을 비옵니다. 부디 고이 잠드소서.


1974년 8월 19일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

국민장 장의위원 박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