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산책/고전음악

자장가 Eb장조 Op.49-4 / 브람스

풍월 사선암 2006. 7. 3. 13:20

 

 

미샤마이스키 첼로 연주

 

Wiegenlied(자장가) Eb장조 Op.49-4

Johannes Brahms (1833∼1897)


브람스 자장가는 1868년 왈츠를 좋아하는 그의 친척 파버 부인이 차남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 축하의 편지와 함께 이 곡을 써서 보냈다고 한다.


함부르크 출생.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고, 7세 때 O.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0세 때 음악회에 나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자, 부모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재능을 이용하여 치부(致富)할 생각이었으나 코셀은 이를 반대하고 그의 스승인 E.마르크센에게 브람스를 사사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 1850년까지는 브람스의 고난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술집 ·식당 ·사교장 등을 돌면서 피아노 연주를 하였으며 여가가 나면 피아노 개인지도,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편곡 등으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50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J.요아힘을 알게 되어 1853년 그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 이 여행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슈만부처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브람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각 방면에 소개하여 음악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854년 신경쇠약으로 인한 슈만의 자살미수와 입원, 그리고 1856년의 사망에 이르는 약 2년 동안에 브람스는 작곡에 몰두하는 한편, 어려움에 처해 있는 슈만가(家)를 도왔다.


한편 슈만의 부인이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의 우정도 깊어져 갔다. 1857∼1859년 그는 처음으로 공적인 직위를 얻어 데트몰트궁정에서 피아니스트로 근무하면서 작곡에도 몰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근무를 마친 후 1862년 가을까지는 고향인 함부르크로 옮겨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작곡 등을 하다가 1862년 9월 빈으로 이주, 1863년 징아카데미합창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그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865년 2월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추도하는 작품에 착수, 1868년에 대작 《독일레퀴엠》을 완성하고 1869년에는 슈만의 셋째 딸 유리에에 대한 그의 실연을 노래한 《알토랩소디》를, 1871년에는 프로이센의 대 프랑스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관현악부 성악곡을 많이 만들었다.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음악인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하였는데, 이때의 관현악단을 통한 실지 체험은 1876년에 완성된 《제1교향곡》에 잘 나타나 있다. 브람스의 작곡가로서의 진면목은 이때를 전후하여 발휘되기 시작했고 대가로서의 품격도 갖추게 되었다.


1878년 이후 매년 걸작을 발표하였는데, 《바이올린협주곡(D장조)》(작품 77) 《바이올린소나타》(작품 78) 등은 모두 이 무렵에 발표된 것들이다. 1879년 브로츨라프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이에 대한 사의로 그 이듬해 《대학축전서곡》(작품 80)을 작곡하였다. 이어 1890년까지 《비극적 서곡》(작품 81), 《피아노협주곡 제2번》(작품 83), 《현악 5중주곡》(작품 88) 등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1890년부터는 체력과 창의력의 쇠퇴를 자각하고 대곡의 창작을 단념, 신변 정리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1891년 3월 뛰어난 클라리넷 주자 R.뮐펠트의 연주를 접하자, 다시 영감과 창의력을 얻어 1891년 《클라리넷 3중주곡》(작품 114) 《클라리넷 5중주곡》(작품 115)과 1894년 두 곡의 클라리넷소나타 등 일련의 클라리넷을 포함한 실내악곡을 쓰게 되었다. 1896년 3월 그의 평생의 친구인 클라라가 졸도한 후 병세가 악화되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성서를 토대로 한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 121)를 작곡하였다.


5월 20일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오르간용의 종교적인 오르간곡 《11의 코랄전주곡》(작품 l12)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1897년 4월 3일 마침내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오페라 이외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음악은 독일음악의 전통을 보수적일 만큼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때로는 북독일적이며, 때로는 빈(Wien)적이지만, 인간 브람스의 피가 흐르는 매우 소박한 풍격이 그의 음악의 큰 매력이 되고 있다. 그만큼 브람스의 작품에서는 호화스런 색채감각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