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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때 기생 황진이에 대하여...

풍월 사선암 2006. 6. 6. 11:14

갑자기 황진이에 대해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실제 이름은 무엇이고 무엇때문에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는지...그리고, 왜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그를 추모하고 그리워하고 또 기억하려 했는지...양반가의 딸로 태어나 기녀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

 

우리네 역사에서 <여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건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만 그래도 마음에 두고 싶은 세 사람. 황 진이, 신 사임당, 그리고 허 난설헌.전통적인 가치관으로 보자면 세 여인 모두 결코 '행복한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남동생인 허 균과 함께 뛰어난 글재주를 자랑했던 허 난설헌, 그러나 죽어서도 남편과 같은 묘를 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던 그녀. 서리서리 �힌 마음 속 恨의 발로였겠지요. 죽어서까지도 남편의 묘를 사이에 두고 작은댁과 나란히 묻힐망정 그 집 귀신으로서의 일생에 목숨을 걸던 그 옛날의 우리 여인들.당시로선 파격적인 발언이었을 것입니다.

 

解語話 -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妓女를 일컫습니다. 중국의 歌妓와 마찬가지로 賣樂不賣身이었겠으나,줄세우기 문화에서 한 발자욱이라도 벗어나면 그건 곧 다른 세계로의 전락을 뜻하는 전통사회에서는 그녀 역시 기존의 가치관에 의한 행복을 스스로 포기한 존재입니다. 그녀의 시조를 읽을때면 '주옥같은'이란 진부한 표현 이외엔 달리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시간이란 상대적인 것. 바라만 보아도 안타깝고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은 삼추도 일각이라. 기나긴 동짓달 밤이라도 보태어, 그리운 마음 엉겨있던 님과의 서리서리 맺힌 정을 펴는 날 구비구비 풀어내고 싶은 여인의 애틋한 감상이 녹아있습니다. 또 한떨기 해어화인 梅窓의 望夫詞와 비교하면 두 여인의 기질이 사뭇 다름이 느껴지네요.


내 가슴 흐르는 피로 님의 얼굴 그려내어

내 자는 방안에 족자 삼아 걸어두고

살뜰히 생각날제면 족자나 볼까 하노라


이 역시 '기다림'을 화두로 삼고 있으나, 혹여 님의 마음 변하기라도 할작시면 한양간단 이도령 말 들은 춘향이 모양,머리칼 쪽쪽 뜯어 님의 발치에 팽개치지나 않을지, 읽다가 슬며시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황진이의 존재가 오늘날까지도 인정받는 이유는 뛰어난 문학성을 지닌 6수의 시조와 4수의 한시 이외에도 속(俗)의 경계를 뛰어넘은 천의무봉한 도가적 분위기 때문입니다. 이는 黃娘 본인의 무위자연하던 기질에, 스캔들이라고 밖엔 말할수 없던 수 많은 인사들과의 교류에서 체득한 교양이 포개어지고, 또 가장 중요한, 스승이자 情人이었던 서화담의 氣一元論의 영향은 아닐지. 세속의 명리나 이목,모두 헛되고 또 헛된 뜬 구름같은 그림자연극 - 戱夢에 불과하단걸 알아버린 그녀의 초월성이 '죽거든 길가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말로 남은건 아닌지...


동짓달 하늘에 휘영청 뜬 달 - 그 달빛이 말해 주는건 나의 마음일까요,님의 마음일까요.이런들 어떻고 또 저런들 어떠하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 왜 달은 안 보고 손가락을 보느냐고 일갈하는 사람에게 黃娘은 쓴 웃음을 날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달을 보려는 네 눈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도 모두가 네 안에 있는걸,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하면서요.

 

황진이가 동선이를 시켜 한양에 있는 소세양에게 전하게 했다는 한시(7언율시)입니다.

한시 직역 - 알고 싶어요

 

簫蓼月夜思何事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오신지>

寢宵轉轉夢似樣 <뒤척이는 잠자리는 꿈인듯 생시인듯>

問君有時錄妾言 <님이시여 때로는 제가 드린 말도 적어보시는지>

此世緣分果信良 <이승에서 맺은 연분 믿어도 좋을지요.>

悠悠憶君疑未盡 <멀리 계신 님 생각, 끝없어도 모자란듯>

日日念我幾許量 <하루 하루 이 몸을 그리워는 하시나요.>

忙中要顧煩惑喜 <바쁜 중 돌이켜 생각함이라 괴로움일까 즐거움일까>

喧喧如雀情如常 <참새처럼 지저귀어도 제게 향하신 정은 여전하온지요.>

 

送別蘇陽谷詩..

月下庭梧盡  <밝은 달 아래 뜨락 오동잎 다 지고>

霜中野菊黃  <서리 내려도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있구나>

樓高天一尺  <누각 높아 하늘과 지척의 거리>

人醉酒千觴  <사람은 취하고 남겨진 술잔은 천이라>

流水和琴冷  <흐르는 물 차가운데 거문고는 화답하고>

梅花入笛香  <매화가지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와라>

明朝相別後  <내일 아침 그대, 나  이별 후>

情與碧波長  <정은 물결 따라 멀리멀리 가리라.>

 

이 시는 황진이가 蘇陽谷(蘇世讓)과 이별 할 때 지어준 시라는데..

그 節奏感이 음악처럼 물 흐르듯 壓卷이다.

流水와 冷은 소양곡을 말함이요. 菊花 梅花는 황진이 자신을 隱喩한 것이라......

 

조선 중종대 개성의 기생, 시조시인.

박연폭포·서경덕과 함께 송도3절(松都三絶)이라 일컫는다. 재색을 겸비한 조선조 최고의 명기이다. 어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가곡에도 뛰어나 그 음색이 청아했으며, 당대 가야금의 묘수(妙手)라 불리는 이들까지도 그녀를 선녀(仙女)라고 칭찬했다. 황진사의 서녀라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라고도 하는데, 일찍이 개성의 관기가 되었다. 15세 때 이웃의 한 서생이 황진이를 사모하다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영구가 황진이의 집 앞에 당도했을 때 말이 슬피 울며 나가지 않았다. 황진이가 속적삼으로 관을 덮어주자 말이 움직여 나갔다. 이 일이 있은 후 기생이 되었다는 야담이 전한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명기로 이름을 날렸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송공대부인(宋公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노래를 불러 모든 이의 칭송을 들었고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으며,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 30년간 벽만 바라보고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시정의 돈만 아는 사람들이 천금을 가지고 유혹해도 돌아보지 않았으나, 서경덕이 처사(處士)로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시험 하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하여 평생 서경덕을 사모했다. 거문고와 술·안주를 가지고 자주 화담정사를 방문해 담론하며 스승으로 섬겼다. 종실(宗室)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황진이는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구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하고 일렀다. 벽계수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다리로 향했다. 황진이가 이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조를 읊었다.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황진이는 웃으며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고 하며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소세양이 황진이의 소문을 듣고 "나는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황진이와 만나 30일을 살고 이별하는 날 황진이가 작별의 한시 〈송별소양곡 送別蘇陽谷〉을 지어주자 감동하여 애초의 장담을 꺾고 다시 머물렀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고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죽을 때 곡을 하지 말고 고악(鼓樂)으로 전송해달라, 산에 묻지 말고 큰 길에 묻어달라, 관도 쓰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뭇 버러지의 밥이 되게 하여 천하 여자들의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부임하는 도중 황진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면서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가 전한다.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영반월 詠半月〉·〈송별소양곡〉·〈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의 한시를 남겼다. 〈식소록 識小錄〉·〈어우야담〉·〈송도기이 松都紀異〉·〈금계필담 錦溪筆談〉·〈동국시화휘성 東國詩話彙成〉·〈중경지 中京誌〉·〈조야휘언 朝野彙言〉 등의 문헌에 황진이에 관한 일화가 실려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