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 것, 인정머리 없는 것… 너도 자식한테 똑같이 당해봐라"
[아무튼, 주말]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세상에 태어나 제일 잘한 일은 딸을 낳은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분을 압니다. 그러나 그분의 딸은 언젠가 그러더군요. 우리 엄마에게 나는 자식이 아닌 모양이라고. 아마 그 어머니는 딸을 자식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여기셨겠지요. 너는 곧 나이기에, 대접하지 않았고, 돌보지 않으셨겠죠. 슬픈 모녀의 그림입니다. 홍여사
사흘 전, 남동생에게서 뜬금없는 메시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누나 고마워. 덕분에 급한 불은 끄겠어. 10월까지는 꼭 돌려줄게."
돈 얘긴 것 같긴 한데 대체 무슨 돈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더군요. 그러나 영문을 몰라 벙벙해 있었던 건 길어야 10초쯤. 저는 곧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 이름을 팔며 동생에게 돈을 융통해줬을 사람은 이 세상에 엄마밖에 없으니까요.
"엄마. 혹시 정환이 돈 해줬어?"
제 입에서 튀어나간 첫마디는 자신도 움찔할 만큼 날카로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운을 떼면 엄마에게서 나올 대답은 뻔합니다. "그래, 해 줬다. 왜?" 하시겠죠.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이번엔 엄마의 태도가 전과 다르더군요. 잠시 머뭇거리더니 설명을 합니다. "녀석이 그래도 너한테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었나 보는구나. 그래. 너한테 빌렸다고 하고 돈 줬어. 걔가 내 돈은 떼먹어도 네 돈이라면 꼭 갚을 거 아니니."
"엄마. 우리끼리 누누이 한 얘기가 있잖아. 당장 돈을 안 갚을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걔 길을 잘못 들일까 봐 그래. 아버지 돌아가시고 정환이가 이미 엄마 노후 자금 반 토막 냈으면 이제 더 이상은 나한테 얘기하지 말라고 했어야지."
"어떡하니. 코로난가 뭔가 때문에 가게 문 닫게 생겼대. 그뿐인 줄 아니? 이혼당할 판이야."
"이혼이라니?"
"네 올케가 못 살겠단다. 그렇게 말렸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장사 시작해서 이 난리라고."
아! 그제야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왔습니다. 아들이 졸랐으면, 엄마도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며느리가 전화해서 이혼 운운하니, 노인네가 패닉 상태에 빠진 겁니다. 하나뿐인 아들 인생에 이혼 도장 찍히고, 금쪽같은 손자의 앞날에 먹구름이 드리운다 싶었겠지요. 그래서 비상금 전부 털어 아들에게 송금했을 겁니다. 네 누나한테 꾸었다는 얄팍한 거짓말을 담보 삼아 말입니다.
돈이란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동생네 생활이 안 된다는데도 불쌍한 마음이 안 듭니다. 꼬물꼬물한 조카 얼굴은 안 떠오르고, 오직 올케의 얼굴만 실제보다 더 얄밉게 떠오릅니다. 차라리 시어머니에게 생활비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할 것이지, 사네 못 사네 겁은 왜 주나요? 제 남편이 혼자 잘살자고 장사 시작한 것도 아니고 코로나가 찾아올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아, 이래서 또한 시집 식구는 다 똑같다 소리가 나오겠지요. 평소엔 올케를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하던 시누이였는데 막상 일이 터지니 당장 우리 엄마, 내 동생 역성을 들게 됩니다. 올케도 오죽 답답하면 그랬을까요? 내 여동생이었다면 잘했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시국에 시어머니가 그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요.
그러나 저는, 올케의 언니가 아니고, 우리 엄마의 딸입니다. 남동생 내외가 무얼 먹고 어찌 살든, 그것보다는 우리 엄마의 말년을 지켜 드리는 게 중요합니다. 엄마의 무른 성격을 알고, 아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알기에 저는 겁이 납니다. 게다가 남동생이란 녀석의 허황함과 돈이라는 물건의 위력을 모르지 않기에 저는 착한 누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엄마. 이왕 준 건 어쩔 수 없어. 꼭 돌려받기나 해. 그리고 앞으론 이혼 아니라 이혼 곱빼기를 한다고 해도 흔들리지 마. 그 정도로 이혼할 부부면 이참에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절대 걔들 이혼 안 해."
"너무 그러지 마라. 나랏밥 먹고 사는 배부른 너는 걔들 입장 몰라. 너 바른말 잘 한다만, 그 입장 돼봐. 배운 건 없고 밑천은 짧고. 비빌 언덕이라곤 엄마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계속 비빌 언덕이 돼 줄 거야? 엄마가 무슨 능력으로?"
"네가 지금 어미를 가르치니? 너는 잘난 자식만 둬서 모르는 모양인데 못난 자식도 자식이다. 아니, 못난 놈이 진짜 내 자식이야. 그래 어쩔래? 내가 내 아들한테 돈 줬다. 네 돈도 아니잖아?"
그 뒤로는 무슨 말이 오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네 돈 아니잖아라는 말이 가슴에 콱 박히고는,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밖에. 엄마 이러다 아들한테 다 털리면 그때부턴 내 짐이라고 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엄마도 이성을 잃었겠죠. 내가 길바닥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어도 네 신세는 안 진다고 하더군요. 너는 동생이 밥을 굶는다고 해도 눈도 깜짝 안 할 년이라고. 네 성격이 그러니 평생 정을 못 받는 거라고….
그 말에 저는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소리도 안 나고, 눈물도 안 나는 이상하게 뜨겁기만 한 울음을 속으로만 울었습니다. 제가 평생 맡아온 이 잘나고 매정한 역할이 너무 싫어서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저도 아무 걱정 없이, 엄마의 젖을 받아먹듯 사랑을 받아먹고만 싶었습니다. 철없는 내 동생처럼요.
그날 이후 사흘이 흘렀습니다. 지금 제 손에는 조금 전 엄마에게서 날아온 메시지가 들려 있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어 버리고 다시는 말 한마디 없는 딸을 엄마는 욕하고 계시겠죠. 독한 것, 인정머리 없는 것, 자식한테 저도 똑같이 당해봐야 알 거라고…. 엄마가 퍼붓는 익숙한 말 폭탄을 또 한 번 듣기 위해 저는 메시지를 열었습니다. 아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요? 엄마는 제 이름을 다정히 부르고 있습니다. 희정아, 희정아라고….
희정아 엄마가 미안하다. 내 생각 제일 많이 하는 게 너라는 걸 나도 다 안다. 자꾸 네 어깨만 무겁게 하는 것 같아 늘 미안하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담아두지 말아라. 내가 늙어서 분별이 잘 안 된다. 앞으론 네 말대로 할게. 나도 정환이가 무섭다. 안쓰럽고 무섭다.
아. 눈물이 납니다. 사흘간 몸속에 차 있던 눈물이 이제야 납니다. 우리 엄마가 언제 이렇게 늙고 약해졌나요? 아들한테 평생 휘둘리더니 이젠 딸의 눈치까지 보시네요. 세상 만만하던 딸의 눈치까지 말입니다. 가난하고 혼자인 엄마의 마지막 발 뻗을 자리는 어디일까요?
차라리 엄마에게 한바탕 욕을 듣고 싶은 기분입니다. 독한 것, 매정한 것이라고…. 차라리 그게 낫겠습니다. 차라리.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조선일보 입력 2020.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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