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역사,인물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별세, “품위있는 행동으로 야망 다스리다 떠났다"

풍월 사선암 2018. 12. 2. 07:34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 별세, “품위있는 행동으로 야망 다스리다 떠났다"

 

▲94세를 일기로 지난달 30(현지시간) 세상을 떠난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2002년 핀란드 헬싱키의 한 미디어 인터뷰에서 농담을 건네는 모습.

 

냉전 종식을 주도하고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군대를 무너뜨리고도 재선에 실패했던 미국 전임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HW) 부시가 지난달 30(현지시간)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가족 대변인이 전했다. 향년 94.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은 냉전 종식, 독일 통일, 소련 붕괴라는 세계사적 격변기에 미국을 이끈 대통령이다. 부시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붕괴 이후 세계적 혼란기를 무난하게 극복하고 미국을 수퍼파워로 자리잡게 했다는 평가와 미국 패권주의의 상징이란 비판이 함께 제기된다.

 

부시가 미국의 제41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1989~1993년은 세계사적 격변기였다. 198912월 벨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10월 동서독 통일이 이뤄졌다. 1991년말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동유럽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부시는 냉전 해체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1989년 지중해의 몰타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과 비공식 정상회담을 갖고 냉전종식과 미·러간 새로운 협력에 합의했다. 부시는 구체제의 붕괴에 따른 혼란의 확산을 막는 데도 노력했다. 그는 소련 해체 후 구소련연방 국가들의 극단적 민족주의 흐름을 제어하는 등 동유럽 질서를 유지했고, 러시아의 부드러운 권력 이양도 도왔다. 때문에 부시의 업적 평가와 관련해서는 외교와 대외관계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룬다.

 

해군 전투기 조종사 시절 조지 HW 부시의 모습.

 

실제 부시는 외교안보 경력을 두루 쌓은 베테랑 외교관이었다. 그는 해군 조종사로 2차대전에 참전했으며 정치에 입문해 상하원 의원을 지낸 후 유엔 주재 대사와 초대 중국 주재 연락사무소장을 지내며 외교 현장을 누볐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에는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냈고, 로널드 레이건 정권 8년간 부통령을 지내며 국정운영도 경험했다. 미국 최초의 CIA 국장 출신 대통령이기도 하다.

 

부시의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존 스누누는 더 자이언트 맨이란 평전에서 그에 대해 세계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정치적 변화를 이끌었고, 미국이 세계 무대에서 외로운 수퍼파워가 될 수 있도록 부드럽게 인도했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품위 있는 행동으로 자신의 야망을 다스린 사람이라고 평했다. 1988년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부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처럼 민주당 후보 마이클 듀카키스를 상대로 네거티브 선거전을 펼쳤다. 그러나 부시는 선거에서 이긴 뒤 자신의 관심사는 진흙탕 싸움이 아닌, 국정 운영이었음을 증명했다. 실용적이면서도 온건한 외교 정책을 앞세워 1989년 소련 해체를 이끌었고, 냉전 시대를 끝낸 주역이 됐다. 경제 문제에 발목이 잡혀 재선에 실패했으나 퇴임 후 인간적인 면모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아픈 아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전장에서 다친 퇴역 군인들에겐 용기를 북돋웠다. 자신의 재선을 막은 빌 클린턴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로 지내며 이념보다 강한 우정을 드러냈다.

 

유엔주재 대사 시절의 조지 HW 부시


부시는 1924612일 매사추세츠주에서 프레스코트·도로시 워커 부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투자은행가였던 아버지는 코네티컷주에서 10년 동안 공화당 상원의원을 지냈다. 부시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당시 최연소 해군조종사였다. 일본 오키나와 상공에서 일본군 대공포에 격추당했지만 극적으로 구조됐다. 전투기에 동승한 부하 2명이 전사한 뒤에 쓴 기록에서 그는 나는 구명보트에 앉아 훌쩍거렸다. 부하들이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부모 심경을 헤아리면 가슴이 메인다며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전역한 뒤 예일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부로 건너가 유전시추장비 판매회사를 설립해 40세에 백만장자가 됐다.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정계에 뛰어든 부시는 1966년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2년 뒤 상원의원에 출마했지만 낙마했다. 미군의 베트남 철수를 추진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1971년 유엔주재 대사로 활동했다. 이후 1973~1974년 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장, 1974~1975년 베이징주재 미국 연락사무소 초대 소장, 1976~1977년 중앙정보국(CIA) 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980년 공화당 대선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후 로널드 레이건의 러닝메이트가 됐다. 공화당 내에서 온건주의자평을 들었지만 1988년 대선 당시 듀카키스를 자유주의자로 몰아가며 인신공격을 퍼부어 뚜렷한 이념이 없다” “돈과 권력을 쥔 자들의 편등의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부시 재임 기간 소련이 해체되며 냉전이 종식됐고, 부시의 지지율은 90%까지 뛰어올랐다. 19911225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사임하기 2시간 전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도 부시였다.

 

조지 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걸프전에 참전한 자국 군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한편 미국의 일방주의와 패권주의를 상징한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걸프전이 대표적이다. 19908월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점령하자 그는 19911사막의 폭풍작전이란 이름의 공격을 시작했고, 한달 만에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걸프전은 이후 아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전과 연결돼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198912월 파나마 마누엘 노리에가 대통령이 마약 퇴치를 위해 파견된 미군을 살해하자 파마나를 침공해 노리에가를 재판에 붙여 30년 형을 받게 한 것도 일방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 부시의 걸프전은 아들 부시의 이라크전과 구분돼야 한다는 평가도 있다. 아들 부시와 달리 아버지 부시는 걸프전을 이끌면서도 이라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중동의 세력 균형을 흔들려하지 않았다. 이라크의 우방국은 물론 적대국인 시리아에까지 외교전을 펼치며 현실주의 노선을 지켰다. 실제 부시는 당시 공화당 매파들의 바그다드로 진격해서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즉 이라크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심겠다며 유엔의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강행한 아들 부시의 이라크전에 비해 걸프전은 명분과 절차 면에서 충분히 정당했다는 것이다.

 

부시의 인간적인 면모는 언론을 통해 자주 소개됐다. 로널드 레이건 정부 부통령 시절 폴란드 크라쿠프의 어린이 병동을 방문했을 때 백혈병에 걸린 아이를 보고 눈물을 쏟기도 했다. 당시 부시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 넘치고 있다며 카메라로 얼굴을 돌리지도 못했다. 1953년 세살배기 딸이 병으로 숨진 기억이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1958년 어머니에 보낸 편지에서 부시는 늘 품에 안겨 자던 딸이 생각납니다. 살며시 내게 다가와 그 부드러운 볼을 내 뺨에 대고 꿈나라로 빠져들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퇴임 이후에는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도서관·장학 사업, 백혈병 아동 돕기에도 나섰다. 2013년 백혈병에 걸린 2살 아기 패트릭을 응원하기 위해 부시가 머리카락을 자른 사연은 유명하다. 부시는 지난해 11월 백혈병을 이겨낸 패트릭과 다시 만난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기도 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201749일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을 문병해 그가 즐겨 수집하는 양말을 선물했다(왼쪽 사진). 클린턴 전 대통령은 9(현지시간)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부시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한 뒤 트위터에 사진을 올리며 자녀들과 손주, 옛 시절과 요즘 사는 얘기, 양말 얘기를 나눴다고 썼다.

 

부시는 1992년 대선 경쟁상대였던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있는 모습이 언론에 자주 포착됐다. 아들 부시보다 클린턴을 아들처럼 여긴다는 우스개소리도 나온다. 2005년 카트리나 허리케인 피해자를 돕는 TV프로그램에도 부시와 클린턴은 함께 출연했다.

 

혈관성 파킨슨증후군 때문에 2012년부터 휠체어 생활을 한 부시는 90세가 넘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1490세 생일엔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했고 이후에도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소식을 올리며 대중과 소통했다.

 

워싱턴|박영환·이윤정 기자 경향신문 입력 : 2018.12.01 15: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