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지식인 에밀 졸라
“(드레퓌스 사건의)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은 한 해에도 100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에밀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에는 5세기가 걸린다.”
1840년 4월2일은 미국의 문호 마크 트웨인이 극찬한 에밀 졸라가 태어난 날입니다. 졸라는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간첩 누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자 하루 반을 꼬박 새워 반박 칼럼을 써서 《오로르》지에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발표했지요. 프랑스 사회가 들고 일어나서 졸라는 프랑스 언론에 글을 게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법원은 졸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고, 정부는 레종 되뇌르 훈장도 박탈합니다.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돌아왔지만 ‘의문사’를 당합니다. 나중에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자 유대인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에밀 졸라의 모든 책들을 불태워버린 일화도 유명하죠?
졸라는 에두아르 마네가 ‘올랭피아’라는 그림을 그렸다가 비평가들로부터 “신화의 여인이 아니라 동시대의 여인을 표현한 저질작품”이라며 집중포화를 받았을 때에도 홀로 나서서 사실성의 가치에 대해서 변호했습니다. 위 그림은 마네가 감사의 표시로 그려준 졸라의 초상화입니다. 뒤에 ‘올랭피아’ 그림이 보이죠?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들이 프랑스의 ‘똘레랑스(관용)’을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졸라 같은 지식인들의 고독한 용기가 없었다면 똘레랑스가 불가능했을 겁니다.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집단 린치를 가하는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선동꾼들에게 환호하고) 용감한 지식인에게 비난을 퍼붓고는 그가 옳은 것으로 드러나도 반성하거나 뒤늦은 박수를 보내지 않습니다. 옳은 일을 하면 소송에 시달리고 비난, 저주, 협박 속에 갇히기 십상입니다. 그래도 지식인은 고독할지언정 바른 길을 가야한다고 믿습니다. 저도 계속 그 길을 가겠습니다. 졸라의 말마따나 행동은 그 자체로 큰 보상을 주니까요. Activity carries a big reward in itself.
에밀 졸라의 명언 10개
○내가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 묻는다면 예술가로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소리치며 살기 위해서라고.
If you ask me what I came to do in this world, I, an artist, I will answer you: "I am here to live out loud."
○진실에 입을 다물고 그것을 땅 아래 묻으면 진실은 거기서 자라날 것이다.
If you shut up truth, and bury it underground, it will but grow.
○진실은 행진하고 있으며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
The truth is on the march and nothing will stop it.
○재능이 없는 예술가는 아무 가치가 없지만, 작품이 없다면 재능도 가치가 없다.
The artist is nothing without the gift, but the gift is nothing without work.
○사람들은 오만해지기 마련이다. 확실히,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모든 것을 안다고 상상하면서.
One must be arrogant, indeed, to imagine that one can take everything in one's hand and know everything!
○사람은 인생의 전반기에 행복을 꿈꾸고 나머지 반은 후회와 두려움으로 보내지 않나요?
Did not one spend the first half of one's days in dreams of happiness and the second half in regrets and terrors?
○아이디어 역시 하나의 행동이다. Idea is an action, too.
○행동하고 창조하고 환경과 싸우라. 이기든 지든 그것이 건강한 사람의 삶이다.
To act, to create, to fight with the circumstances, win or be defeated - that's the life of a healthy person.
○화는 늘 나쁜 조언자가 된다. Anger is always a bad advisor.
○최소의 진보조차도 몇 년의 고통스러운 작업을 요구한다.
Even the smallest progress requires years of painful work.
드레퓌스 사건
진실의 승리와 더불어 영원한 이름
평범한 육군대위 드레퓌스
1894년 9월 어느 날,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 요원이 프랑스 주재 독일대사관 우편함에서 편지 한 장을 훔쳐냈다. 독일대사관 무관 슈바르츠코펜 앞으로 가는 봉투 안에는 프랑스 육군 기밀문서의 내용을 자세히 적은 '명세서'가 들어 있었고 보낸 사람은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잖아도 프랑스 군대에 대한 정보를 독일에 팔아먹는 스파이를 찾아내느라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참모본부는 이 명세서를 만든 사람이 참모본부 안에서 일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 가까이 있는 인물이라고 단정하고 조사를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인'이 붙잡혔다. 참모본부에서 일하고 있던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였다. 정보국의 수사관들은 '명세서'의 글씨가 드레퓌스의 것과 같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스파이로 점찍었다. 드레퓌스는 끝끝내 자기가 결백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군사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아야 했다.
인류에게 '자유, 평등, 우애'의 정신을 가져다주었다는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를 내전에 버금가는 정치 혼란과 분열에 빠뜨린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드레퓌스는 아주 평범한 육군장교에 지나지 않았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유태인이면서 프랑스를 조국으로 섬겼다는 사실뿐이다. 그는 독일 국경 가까운 알사스 지방의 한 도시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열 한 살이던 1870년 독일이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알사스 지방을 빼앗아 버렸다. 드레퓌스는 이것을 보고 정치가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으며 약한 세력이 정의를 짓밟는 때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군인으로서 조국 프랑스에 봉사하기로 결심했다. 가족들도 기꺼이 격려해 주었다.
드레퓌스는 진지하고 성실했지만 말이 적고 융통성이 모자라는 편이어서 친구들 사이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게다가 학교에서나 군대에서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하고 차별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과 군대에 대한 충성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군인으로서 착실하게 생활해 나갔다. 서른 한 살에 대위가 된 드레퓌스는 같은 유태인인 루시 아다마르와 결혼했다. 가냘프고 온순한 루시는 남편을 편안하게 하는 어진 아내였다. 둘은 아들딸을 하나씩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평온한 가정이 어느 날 갑자기 절망의 골짜기에 떨어지고 말았다. 진짜 문제는 드레퓌스의 글씨가 아니라 그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앞서 유태인을 차별하는 법률을 폐지한 나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천 년이 넘게 유태인을 박해한 유럽 사회의 뿌리깊은 악습이 하루아침에 사라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군대와 같은 보수 집단에는 그런 유태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글씨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세운 참모본부의 상관들도 모두 그런 사람들이었다.
드레퓌스는 재판정에 섰다. 물론 프랑스 군부는 이 군사재판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자 평소에도 내놓고 반유태주의를 선전하던 몇몇 신문사가 들고나섰다. 육군 참모본부의 한 장교가 반역죄를 저질러 체포당한 사건을 공개하라고 떠들어댄 것이다. 이 신문들은 드레퓌스가 저질렀다는 간첩 행위에 대한 온갖 뜬소문을 날마다 대문짝 만하게 실어 내보냈다. 이렇게 해서 드레퓌스는 재판을 다 받기도 전에 벌써 반역죄인이 되고 말았다. 1894년 12월 군사법원은 비밀재판을 열어 드레퓌스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만약 드레퓌스가 죄가 없다면 군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게 된다고 생각한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여러 가지 문서를 거짓으로 꾸며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장을 드레퓌스가 그 증거들에 대해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재판을 끝내 버렸다. 반유태주의에 젖은 신문들은 드레퓌스가 "프랑스를 파멸시키고 프랑스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유태인 국제조직의 스파이"라고 하면서 반드시 사형시켜야 한다고 까지 했다.
그러나 양식 있는 일부 언론인과 변호사들은 확실한 증거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참모본부는 "반역자 드레퓌스는 종신형을 받았으며, 확실한 증거가 있지만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공개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너무 중요한 군사 기밀이기 때문에 만약 공개하면 독일과 전쟁을 벌일 각오를 해야 한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드레퓌스는 유죄를 선고받았을 분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급장을 뜯기고 군대에서 쫓겨나는 모욕까지 당해야 했다. 그런 다음 아무도 모르게 아프리카 기아나의 적도 부근 바닷가의 외딴 섬으로 끌려갔다.
드레퓌스는 어른 키 두 배나 되는 담이 두 겹으로 둘러싼 조그만 돌 감옥에 갇혔다. 스물 네 시간 감시를 받았고 밤에는 두 발에 겹으로 된 쇠사슬을 차야 했다. 적도의 무더위에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도 드레퓌스는 다섯 해 가까운 세월을 견뎌 냈다. 그것은 아마도 아내 루시가 편지에 써 보내 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사랑 덕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아내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이 무서운 불행이 덮치기까지 우리가 누렸던 그 완전하고 깨끗한 기쁨을 맛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 행복했던 생활을 되찾으려면 이 무서운 수수께끼를 푸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겠지요. 나는 믿어요. 내 믿음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답니다.
드레퓌스도 끝까지 주저앉지 않았다.
어떤 악마가 정직한 우리 가족에게 이런 불행과 치욕을 안겨 주었을까? 그러나 나는 체념하지 않소. 진실을 반드시 드러나는 법이오. 이것이 바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오. 나는 온 세상을 향해 내 결백을 외치고 싶소. 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내 피의 마지막 한 방울이 남을 때까지, 나는 날마다 쉬지 않고 외칠 것이오. 나는 죄가 없다고!
시간이 하루하루 지나면서 세상 사람들은 드레퓌스라는 이름을 잊어버렸다. 나중에는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 아내 루시와 형 마티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루시는 남편이 갇혀 있는 '악마섬'에서 살게 해달라고 당국에 청원서를 냈다. 그러나 그마저 차갑게 거절당하였다. 악마섬의 형무소에서 병들어 죽는 것이 드레퓌스가 짐 진 운명인 듯 보였다. 그런데 재판이 끝난 지 열 다섯 달이 지난 1896년 3월 드레퓌스의 앞날에 한 줄기 빛이 찾아 들었다.
진짜 스파이 에스테라지 소령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는 조르쥬 피카르 중령은 또 다른 스파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서류를 읽어보았다. 그는 뜻밖에도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하나는 드레퓌스 대위가 반역죄를 범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제의 '명세서' 글씨가 보병 대대장 에스테라지 소령의 글씨와 똑같다는 사실이었다.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와 군사전술 동창생으로 높은 책임의식과 올곧은 양심을 지닌 능력 있는 장교였다. 그는 이 놀라운 사실을 곧바로 상관에게 알리고 에스테라지를 체포해서 재판을 다시 열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그 일이 도무지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한사코 드레퓌스 사건을 그래도 묻어 버리려고 했다. 피카르 중령은 칭찬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옥을 먹었다.
"도대체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 유태인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나?"
"그 사람은 죄가 없으니까요."
"이봐!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래 자네는 다시 재판을 열자는 말인가?"
"장군님, 그 사람은 무죄입니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진실이라고 하면 내게는 그게 진실이야. 자네만 입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장군님 말씀을 듣자니까 구역질이 납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이 비밀을 죽을 때까지 감추지는 않을 겁니다."
피카르 중령은 자신도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어떤 변호사에게 이 사실을 전해 주었다. 그 변호사는 다시 어떤 국회의원에게 진실을 알렸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유태인과 한통속이라고 사람들이 헐뜯을까 겁이 나서 이것을 발표하지 못했다. 그래서 드레퓌스의 운명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피카르 중령의 건의를 장군들이 받아들였다면 드레퓌스라는 이름은 오늘날 역사책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반역자가 체포당하고 누명을 쓴 장교가 명예를 되찾는 것으로 사건이 끝나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모본부의 장군들이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진실을 짓밟고서라도 군부의 위신을 지켜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탓에 사건은 곧 눈사태처럼 커지고 말았다.
동생의 목숨을 구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던 마티외는 마침내 어떤 신문에 속임수 기사를 하나 실어 내보내는 데 성공했다. "반역자 드레퓌스의 죄를 증명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직도 드레퓌스가 죄를 짓지 않았을 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그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 루시는 남편이 군사법원에 제출된 증거 서류를 보지도 못한 채 유죄선고를 받았으니 재판을 다시 받게 해달라고 의회에 청원서를 냈다. 이렇게 해서 다시금 드레퓌스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가운데 드레퓌스와 유태인을 욕하고 헐뜯는 데 앞장섰던 신문 "르마탱"이 특종을 터뜨렸다. "드레퓌스의 범죄를 입증하기 위해" 어디선가 명세서 사본을 구해 큼직하게 실은 것이다. 사태는 정말로 심각해졌다. 독인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그 신문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프랑스 정보원이 우편함에서 훔쳐가 버렸기 때문에 그는 사실 그 명세서를 본 적이 없었다. 슈바르츠코펜은 에스테라지의 글씨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기와 거래하는 스파이의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자기의 글씨가 신문에 나자 에스테라지 소령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겉보기에는 제법 훌륭하게 장교 노릇을 했지만 실제로는 간첩짓을 하거나 돈 많은 과부를 꼬드겨 만든 돈으로 사치스럽고 방탕하게 사는 비열한 사람이었다. 에스테라지는 자기의 죄를 감추려고 쉴새 없이 새로운 음모를 꾸미고 다녔다. 참모본부의 장교들은 진상을 뻔히 알면서도 그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그러나 명세서의 글씨가 드레퓌스의 것과 다르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퍼져 나갔다. 어느 날 에스테라지를 잘 아는 증권 브로커가 마티외를 찾아와 에스테라지 소령의 글씨가 명세서와 똑같다는 사실을 귀뜸 해 주었다. 마티외는 곧바로 에스테라지를 고발했다. 그러나 당국은 겉치레로만 조사를 할 뿐 그를 구속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신문을 통한 불꽃 튀는 싸움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신문들이 참모본부를 싸고돌았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하라는 것은 군부, 나아가 프랑스를 파멸시키려는 유태인 국제조직이 꾸민 음모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군의 위신과 사기를 꺾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군대와 관청에서 일하는 유태인을 모조리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이러한 편파왜곡보도의 흙탕물 속에서도 "피가로"라는 신문이 맨 처음으로 에스테라지가 진짜 범인이라고 주자하고 나섰다. 하지만 유태인 추방을 선동하는 신문들의 아우성에 맞서기에는 그 목소리는 너무나 가냘 펐다.
에스테라지는 하루 종일 신문사에 죽치고 앉아, 있지도 않은 유태인 국제조직에 대한 정보를 날조하여 흘려보냈다. 프랑스 의회는 군에 대한 국민의 믿음을 어지럽히는 악질 선동꾼들을 뿌리뽑고자 결의했다. 군사법원은 재판을 열어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엉뚱하게도 변호사에게 "군사기밀을 누설했다"고 하여 피카르 중령을 체포해 버렸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온 세계의 내노라 하는 신문들은 이 사실을 다투어 보도했다. 유럽 여러 나라의 신문들은 하나같이 "이제 프랑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 뒤집힌 판결을 비난했다. 어떤 신문은 "사기꾼들이 사기를 예찬했고 협잡꾼들이 협잡 기념비를 세웠다"고 탄식했다. 뒷날 수상으로서 프랑스 국민을 이끌고 제1차 세계대전의 불바다를 헤쳐나간 '호랑이' 클레망소는 이 신문들을 읽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정치가로서는 드물게 드레퓌스를 옹호했던 사람이다. 민주주의와 지성의 나라임을 자랑삼던 프랑스가 문명세계의 비웃음을 사는 처지로 굴러 떨어진 셈이었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프랑스 국민은 두 패로 갈라섰다. 재심 요구파와 재심 반대파가 그것이다. 민주주의와 프랑스대혁명의 이념에 반대한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드레퓌스를 감옥으로 보낸 군부, 유태인 박해에 앞장선 과격한 카톨릭 사제와 신도들, 보수적인 정치가들, 군대의 힘을 키우는 것을 가장 높은 국가 목표라고 믿는 군국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한 수많은 신문들이 재심 반대를 외치며 모여들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유태인 국제조직의 음모에 맞서 국가안보를 지키려면 군부의 위신을 높여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양심 곧은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진보적인 정치가들, 그리고 몇 안 되는 신문들만이 재심 요구파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이 사건을 "유산계급의 집안싸움" 이라며 팔짱을 끼고 있었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이 뒤늦게 여기에 합류했다. 미국과 유럽의 지식인들도 이들에게 지지 성원을 보냈다. 그러나 재심 요구파의 수와 힘은 여전히 너무나 초라했다. 드레퓌스의 앞날은 변함없이 깜깜한 먹구름 속이었다.
그런데 1898년 1월 13일, 절망을 희망으로 뒤바꿔 놓은 큰 폭풍이 몰아쳤다. 클레망소가 운영하던 신문 "로로르"에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는 글을 발표한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하루 밤 하루 낮, 그리고 또 하루 밤을 꼬박 새우며 썼다. 졸라는 에스테라지가 진범인 이유를 하나하나 밝힌 다음,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만들어 참모본부의 잘못을 감추려 한 장군들과 엉터리 증언을 한 글씨 감정전문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한 첫 번째 군사재판과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한 두 번째 군사재판을 무섭게 꾸짖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궁극적 승리에 대해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진하고 있으며 아무도 그 길을 맛을 수 없음을!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자나라 더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내가 한 행동은 진실과 정의의 폭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인 조치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루었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진 인류에 대한 뜨거운 정열뿐입니다. 나의 불타는 항의는 바로 내 영혼의 외침입니다. 그 때문에 법정에 끌려간다 해도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를 심문하여 주십시오!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글이 이처럼 막강한 힘을 떨친 일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보잘것없는 신문이던 "로로르"는 이날 무려 30만 부가 팔렸다. 세계 곳곳에서 편지와 전보가 3만 통이나 날아와 졸라에게 힘을 보태 주었다.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뉴욕 헤럴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졸라에게 깊은 존경과 가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다르크나 에밀 졸라 같은 인물이 나오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프랑스는 문명세계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날수록 재심 반대파는 제정신을 잃었다. 그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 "군대 만세"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유태인을 죽이고 그들이 경영하는 상점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았다. 재심 반대파가 깡패와 가난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앞장세운 이 폭동은 그야말로 정신병자들의 집단발작이라고 할 만했다.
흥분한 군중은 졸라의 집에 몰려가 돌을 던졌다. 그러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지식인들이 참다 못한 나머지 일제히 나서서 졸라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만들고 서명을 했다. 두 패로 갈라선 프랑스 사람들은 아예 생활을 내팽개쳐 버렸다. 책을 읽지 않았으며 그 좋아하던 극장에도 가지 않았다. 신문을 읽고 말다툼과 주먹다짐을 벌이는 것이 생활이 되었다. 목숨을 결투를 하는 사람들까지 곳곳에서 생겨났다. 이러한 열병이 사회를 휩쓰는 가운데 법원은 군사법원을 중상모략 했다는 이유로 에밀 졸라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반유태주의자들의 공격 목표가 된 졸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영국으로 망명했다. 재심 반대파는 전국에서 유태인 상점의 물건을 사지 않는 운동을 조직했고 재심 요구파에 참여한 교수들을 대학에서 쫓아냈다. 드레퓌스를 편든 정치가들은 대부분 선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총칼을 들지 않았을 뿐이지 전쟁이나 다름이 없는 이 싸움에서 재심 요구파의 힘은 여전히 보 잘 것이 없었다.
그런데 1898년 8월 39일, 아무도 내다보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 싸움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어 놓았다. 참모본부에 근무하는 앙리 중령이 면도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그는 피카르 중령을 감옥에 집어넣으려고 에스테라지와 짜고 여러 가지 문서를 날조한 인물이었는데 진상이 탄로 날까 두려워 그만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군국주의자와 반대유태주의자의 영웅' 에스테라지는 잽싸게 영국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는 영국의 어떤 출판사에서 많은 돈을 받고 자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는데, 자기는 상부의 명령을 따라 독일의 기밀을 캐내기 위해 독일 무관에게 접근했다는 내용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독일 쪽에서는 자기네를 위해 일하는 스파이로 알았지만 사실을 프랑스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이중첩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참모본부의 장군들은 할 말이 없었다. 파리의 신문들은 이제 너나없이 참모본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재심 반대파의 집단발작도 잦아들었다. 누가 보아도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은 마침내 드레퓌스에게 무지징역을 선고한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라고 판결하면서 재판을 다시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드레퓌스 앞에서 아직도 험한 가시밭길이 가로놓여 있었다.
진실이 거짓을 누르다
악마섬에서 세상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하고 다섯 해를 산 드레퓌스는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도대체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고나 있을지 조차도 의심스러웠다. 사실 말이 '드레퓌스 사건'이지 그가 할 일이라고는 영문도 모른 채 잡혀가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것밖에는 없었다. 물론 악마섬 감옥에서 절망하여 자살하거나 병들어 죽어 버렸다면 이 사건은 그대로 묻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니만 그마저도 아내 루시가 보내 준 믿음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드레퓌스는 대서양을 건너 브레타뉴에 있는 군 형무소로 돌아왔다. 에밀 졸라도 망명 생활을 끝내고 돌아왔고 피카르 중령도 풀려났다.
다시 군사재판이 열렸다. 드레퓌스는 자기에게 죄가 없다는 것 말고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라보리 변호사는 법원으로 가는 길에 총을 맞아 병원으로 실려 갔다. 재판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재판관 일곱 가운데 둘만이 드레퓌스 편에 섰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이라면 드레퓌스가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하여" 종신형 대신 십 년형을 내린 것뿐이었다.
에밀 졸라는 다시 펜을 들었다.
이것이 정상참작이란 말인가? 이것은 피고인을 위한 정상참작이 아니라 재판관들을 위한 정상참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정상참작을 한 것이다. 이런 결정은 그들이 규율과 양심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말았음을 고백한 데 지나지 않았다. ... 정의를 실현하려는 외침은 ... 머지않아 온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 프랑스는 어디에 있는가?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훌륭하고 정의로운 병사 말고는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고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말 그랬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프랑스 대사관 앞에는 이 재판에 항의하는 군중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듬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던 세계박람회에 참여하지 말자고 결의하고 자기네 정부에 압력을 넣었다. 세계에서 손꼽는 신문들이 한결같이 "드레퓌스가 아니라 프랑스가 범죄자"라는 사설을 실었다.
클레망소와 장 조레를 비롯한 프랑스의 양식 있는 정치가들은 정부를 공격해댔다. 견딜 수 없게 된 대통령은 1899년 9월 19일 드레퓌스에서 특별사면을 내렸다. 자유를 되찾은 드레퓌스는 그리던 아내 곁으로 돌아왔다.
졸라는 변호사 라보리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나는 싸움이 벌써 끝났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이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정직한 사람과 도둑놈에게 똑같이 특별사면을 준 것입니다. 사면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기의 죄를 인정해야 앞뒤가 맞다. 그런데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면서도 사면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 동안 진실과 정의를 위해 싸운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얼토당토않은 죄로 재판을 받아야 할 피카르 중령은 누구보다도 크게 낭패를 보았다. 하지만 벌써 다섯 해씩이나 고생한 드레퓌스로서는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남겠노라고 버틸 수 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그만 잊어버리고 싶었다. 모두들 여러 해 계속된 싸움에 넌덜머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드레퓌스는 자기가 겪은 일은 쓴 "악마섬 일기"를 펴내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에밀졸라도 "진실"이라는 소설을 썼다. 그밖에도 이 사건에 대한 책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떤 책도 실제 일어났던 사건 자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없었다.
에밀 졸라는 빼어난 글과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류의 양심'이라는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의가 이기는 것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1902년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한밤에 석탄난로 가스가 빠지지 않아 잠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살인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장편소설을 쓴 적이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장례식에서 졸라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폭력과 억압으로 사회정의와 공화국의 이념과 자유로운 정신을 목조르기 위해 손잡은 세력의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냈다. 그의 외침은 프랑스를 잠 깨웠다. 운명과 용기가 그를 높은 곳으로 밀어 올려 한 순간 인류의 양심이 되게 한 것이다.
드레퓌스는 1904년 3월 재심을 청구했다. 1906년 7월 12일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비로소 막을 내렸다. 발표하면 독일과 전쟁을 해야 할만큼 중요하다고 하던 참모본부의 '중대한 기밀문서' 따위는 아무 데도 없었다. 진실을 감추고 국민을 속이려고 만든 가짜 증거 문서들만 역사의 뒤안길에 쓰레기로 남았다.
드레퓌스는 무죄선고를 받은 지 열흘만에 군대로 돌아왔다.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는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드레퓌스는 형 마티외와 아들 피엘을 양편에 세우고 지붕 없는 차에 올랐다. 그들은 연병장을 나서자 스스로 모인 20만 군중이 모자를 벗어들고 따뜻한 축하를 보냈다. 창백한 드레퓌스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외쳤다. "프랑스 만세! 진실 만세!" 군중들이 맞받았다.
"드레퓌스 만세! 정의 만세!"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투에 두 번 참가하여 중령을 진급했다. 그리고 1935년 7월 11일 병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뒷이야기에 따르면 독일 무관 슈바르츠코펜은 드레퓌스가 죄 없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지만 자기의 조국에 충성하기 위해서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17년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프랑스말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들어 봐라, 프랑스 사람들아. 드레퓌스는 죄가 없다. 모두가 거짓말이고 모략이다. 그 사람에게는 티끌 만한 잘못도 없다.
20세기를 연 드레퓌스 사건
지금까지 드레퓌스 사건을 짧게 뭉뚱그려 살펴보았다. 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간 드레퓌스 가족의 삶은 오늘날에도 큰 감동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더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꽃피우기 위해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드레퓌스 개인의 생명이나 자기네의 이익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사회진보를 위해 싸웠다.
올곧은 양심과 참다운 용기를 보여 준 피카르 중령, 행동하는 지성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몸으로 가르쳐 준 에밀 졸라, 현명하면서 정열적이었던 정치가 클레망소, 진실의 편에 힘을 보탠 수없이 많은 이름 없는 시민들, 프랑스 민주주의가 무너질 위험에 빠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응원을 보낸 다른 나라의 양식 있는 시민들, 이들 모두가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다. 그들은 유태인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부채질하여 진실과 정의를 짓밟으려 하 거짓말쟁이 권력자들의 음모를 꺾어 버리고 프랑스혁명의 정신과 민주주의를 지켜 냈다. 그들은 이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을 열어 젖혔다.
무엇보다도 프랑스 국민들은 내전에 버금가는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으면서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아프게 깨달았다. 드레퓌스 사건이 사회문제로 번진 것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가 결백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았고 증거가 뚜렷하지 않은데도 유죄를 선고했다는 데 있었다. 만약 절차가 공정했다면, 그리고 증거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면 드레퓌스는 첫 번째 재판에서 풀려났을 것이다. 죄를 지었다는 의심이 간다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잡아두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고, 게다가 뚜렷한 증거도 없이 감옥에 보내는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는 것이 이 사건의 첫 번째 교훈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와 국방부 장군들은 군부, 다시 말해 군대를 지휘하는 고급장교 집단의 위신과 이익을 지키는 것이 곧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군대는 합법적으로 폭력을 쓸 수 있는 특별한 집단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에도 군대를 능가할 만큼 큰 폭력을 가진 집단은 없다. 이 때문에 군부가 자기 이익을 국가 이익이라고 착각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큰 문제가 일어난다. 오늘날 민주주의 나라에서라면 어디에서나 군대는 국민이 선출한 국가원수의 말을 잘 따라야 하고 또 잘 따른다. 이른바 문민 우위 전통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이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은 지식인들이 이끄는 여론이 얼마나 큰 힘을 낼 수 있는가를 증명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서양 속담처럼 졸라의 글은 재심 반대파가 일으킨 폭동을 이겨 냈다. 졸라는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참다운 지식인으로서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불합리한 사회제도에 맞서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적극 뛰어드는 것이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자랑스런 전통으로 뿌리내렸다.
드레퓌스 사건은 문화 선진국이며 대혁명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유럽과 북아메리카 여러 나라의 시민들도 이 거대한 드라마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관심 있게 지켜 보았다. 따라서 모든 일이 끝난 뒤 프랑스 국민들이 얻은 이러한 교훈은 문명세계 전체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어떤 학자들은 드레퓌스 사건이 20세기를 열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관과 철학이 충돌한 데서 빚어진 사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나는 19세기 막바지까지 끈질기게 살아 남을 낡을 세계관이요, 다른 하나는 20세기에 문명사회를 이끈 철학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사건에서 드레퓌스가 한 일은 별로 없다. 에스테라지도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당시 프랑스 육군에 유태인 피를 이어받은 장교와 다른 나라에 정보를 팔아먹은 스파이들은 그 두 사람 말고도 숱하게 많았다. 따라서 꼭 드레퓌스와 에스테라지가 그런 역할을 맡았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삼든 간에 이 두 세계관을 지닌 사회집단 사이의 대결은 피할 수가 없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재심 반대파를 만든 사람들은 오늘날 사람들이 널리 받아들이는 민주주의 이념에 반대했다. 공화정치 자체를 미워한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의 피붙이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자기가 국가안보라고 믿는 것을 위해서라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고 무시해야 한다고 확신한 군국주의자 또는 국가주의자들, 있지도 않은 유태인 국제조직을 들먹이면서 유태인을 박해한 인종 차별주의자와 과격한 기독교도들, 사회 혼란은 무조건 경제 번영을 해친다고 생각한 대기업 소유자들이 모두 재심 반대파에 가담했다.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열자고 한 이들은 누구인가? 대혁명의 정신을 따르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해야만 국가안보도 가치가 있고 또 실제로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 공화주의자들, 인종차별과 인권유린에 반대한 양심 바른 지식인들, 공정한 재판 절차 없이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본 법률가들, 차별과 불평등은 어떤 것이든 거부하면서 자본가들과 맞섰던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원들이 바로 재심 요구파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겠지만 20세기는 인류가 민주주의를 더 넓게 그리고 더 철저하게 실현하여 온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재심 요구파를 이룬 바로 그런 사람들이 낡은 세계관과 철학을 가진 세력을 역사의 무대에서 밀어냄으로써 발전하였다. 이렇게 보면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를 싸움터로 삼아 이 두 세력이 벌인 피할 수 없는 한판 싸움이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선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 유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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