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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만행사건'

풍월 사선암 2017. 12. 7. 09:48

19768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절단작업 관리·감독을 하던 미군 장교 2명이 북한군이 휘두른 도끼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도끼만행사건이라 불리는 잔혹한 살해행위가 벌어진 것이다. 사건은 대략 다음과 같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촬영한 영상물 캡처

 

UN군 측인 미군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의 제5관측소에서 제3초소와 비무장지대를 관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군 3개 초소에 둘러싸인 제3초소 부근에, 12m에 이르는 미루나무 가지가 무성해 이를 제대로 관측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이유로 UN군은 나뭇가지를 치기로 결정하고 한국인 노무자 5명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동시에 미군 장교 2명과 사병 4, 한국군 장교 1명과 사병 4명 등 11명에게 이들의 작업을 감독·경비 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오전 10시경. 이들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 측 제3초소 부근의 미루나무 가지를 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작업을 하던 우리 측 군에게, 북한군 박철 대좌를 포함한 장교 2명과 사병 10여 명이 다가와 나뭇가지를 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군 장교는 관측소의 시야 확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인근 초소에 있던 경비 병력을 요청하여 20여 명의 사병들이 트럭으로 도착했다. 그리곤 곧 북한군 박 대좌의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북한군은 가지고 온 곡괭이와 한국인 노무자가 나무 밑에 둔 도끼 등을 빼앗아 휘두르며, 우리 측 군에게 기습공격을 가했다. 특히, UN군 측 지휘관과 장병들에게 집중 공격을 가해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미군 대위와 소대장 마크 바레트(Mark Barrett) 미군 중위가 이마에 중상을 입고 피살되었으며, 이밖에 미군 사병 4, 한국군 장교와 사병 4명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들은 이와 함께 UN군 트럭 3대와 초소를 부순 뒤 도주하였는데, 이때 걸린 시간이 단 4분여에 불과하다. 미군 기동타격대가 출동했을 때는 북한군들이 이미 군사분계선을 넘어 철수한 뒤였다.

 

이에 대한 북한 측의 설명은 다소 다르다. 이날 미군은 북한 측에 사전 통보도 없이, 미군 장교 2명을 포함한 10여 명의 사병을 동원하여 미루나무를 찍기 시작했다. 순찰 중이던 조선인민군 병사(4)들이 이를 보고 제지하자, 미군 장교 1명이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그들에게 집어던졌다. 이때 조선인민군 병사 1명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그대로 되받아 던짐으로써 그 자리에서 미군 장교 1명이 즉사하고, 그 후 벌어진 격투과정에서 미군 장교 1명이 또 즉사하고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사건 직후 주한미군 사령관 리차드 스틸웰은 데프콘 3’를 발동하고, 미군 방송을 통한 임시발표에서 휴가 중이거나 부대를 떠나있는 전 장병에게 즉시 부대복귀를 명령했다.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 3’가 발령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인민군과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에 전시태세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사건 보고를 받고 군사적 응징을 즉각 검토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분노했다. 미국 행정부는긴급 참모회의를 열어 문제가 된 미루나무를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미국 전설에 등장하는 거구의 나무꾼 폴 번연에서 따온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을 수행하기로 했다.

 

폴 번연 작전 수행 시 UN군은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를 발령했는데, 사실상의전쟁 계획을 전개한 것이다. 미국 본토에서는 핵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가 한반도에 배치되었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했다.

 

미국은 교전상황에 대비해 구체적인 전쟁계획인 일명 우발계획까지 수립했다. 미루나무 절단 작업 시 교전상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 포병과 미군 포병이 북한지역 개성의 인민군 막사와 개성 위쪽의 시변까지 포격하여 초토화하고, 인민군 포병부대를 궤멸시킨다는 것이었다. 또한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남진할 경우 이에 대한 전술핵의 사용도 고려됐다. 핵전쟁까지 상정한 실질적인 전쟁계획이다.

 

1976821일 아침 7. 한국군 특공대원들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해 미루나무를 베어내는 미군 공병대원들을 엄호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종헌 소령을 특공대장으로 임명하여 북한의 초소 4곳을 파괴하도록 지시했다. 한국군은 M16 소총, 수류탄, 크레모아 등으로 무장한 카투사로 위장시킨 특전사 요원을 공동경비구역 내에서의 폴 번연 작전에 투입하였고,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던 북한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 미루나무 제거도 별다른 충돌 없이 40여분 만에 종료됐다.

 

즉시 북한은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의 '유감성명'이 전달됐다. 처음에 미국은 북한의 유감성명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거부했으나 24시간 뒤 이를 받아 들였다. 북한은 1년 반 동안이나 준전시상태를 풀지 않았고, 남한 내에서도 북한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등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로 판문점 내의 공동경비구역에서도 경계가 설정됐다. 경계 밖 상대편 지역에 존재하던 초소가 철거되고, 콘크리트 단으로 경계를 표시하게 됐다.


19924월 평양방송은 김정일의 군사적 지도력을 선전하는 프로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군내에 영도체계를 확립해온 김정일이 적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곤 하였다고 선전하면서, 1976년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거론했다. 미루나무 사건을 김정일이 직접 지휘했음을 밝힌 것이다.


또 하나.. 재밌다고 보기에는 서글픈 현상이 있다. ‘도끼만행사건이 북한군을 자극하기 위해 미국과 박 전 대통령이 사전에 계획한 일부러 던진 미끼라는 시각이다. 그 근거로 당시 미군은 200야드 후방에서 이 사건을 촬영했는데, 어떻게 알고 사전에 카메라를 설치해 찍었냐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길 기대하거나 예측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오히려 북한의 계획적인 도발이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라는 얘기는 일면 수긍이 간다. 김정일이 자신의 영웅화 작업일환으로 포장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본 미루나무

작전후 미루나무의 모습

도끼만행사건이 벌어졌던 미루나무자리는 콘크리트로 마감되어 비석이 세워져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도끼만행사건으로 숨진 미군장교의 유해가 본국으로 송환되고 있다.

이사건으로 사망한 보니파스소령(33살)과 바레트대위(25세)



평화란 이렇게 지키는 것이다.

 

40년전 818, 판문점에서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 공동경비구역 내에서 시계 확보를 위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들에게 북괴가 시비를 걸어와 미군장교 두 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철모와 군화를 준비시켰고, 다음날 3군 사관학교 졸업식에서 그 유명한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란 명연설을 하게 된다.

 

미군도 자국의 장교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을 그냥 넘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 그 미루나무를 공개리에 절단하는 폴버니언(미국 동화속 나무꾼 이름)작전 이었다.


세계 최강 미국의 전략 자산이 총동원된 응징작전이 고작 나무 한그루 자르는 거라니, 박대통령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에 박대통령은 당시 스틸웰 미 사령관에게 미루나무 절단작전의 경비는 우리 군이 담당하겠다고 제안했다. 스틸웰은 비무장을 전제로 박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박대통령은 국방장관을 통해 50만원의 격려금을 제1공수여단 박희도준장에게 하사하고 별도의 보복 작전을 준비시킨다.

 

엄선된 64명의 특전사 장병들이 분해된 M16과 수류탄을 숨기고, 카투사 복장으로 미군의 미루나무절단 작업의 경호 임무에 투입되었다.

 

나무 절단이 끝날 무렵, 우리 특전사 장병들은 전광석화처럼 총을 조립한 후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초소로 돌진하여 적 초소 4개를 초토화시키고 유유히 복귀하였다. 북한군은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을 제지하던 미군 장교를 총으로 위협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미군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박희도장군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박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박 대통령은 일촉즉발의 상황에 부하들을 비무장으로 보낼 수 없어서 그랬노라고 큰 소리쳤다.

 

며칠 후, 김일성은 6.25 휴전 이후 처음으로 미군 측에 유감과 재발방지의 반성문을 제출했다.

 

평화란 이렇게 지키는 건데, 저 쪽의 미친개는 40년 전보다 훨씬 더 미쳤고 위험한데, 그 미친개를 몽둥이가 아닌 먹이로 달래야 한다는 미친 것들이, 더 미쳐 날뛰는 이 미친 현실이 답답하다.

 

출처 http://www.daehansinbo.com/bbs/board.php?bo_table=46&wr_id=8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