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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희생

풍월 사선암 2017. 8. 19. 16:10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과 희생

 

**이 글은 ()한미우호협회가 발행하는 <영원한 친구들> 107호에 실린글입니다. 필자 전인영(全寅永) 박사는 서울대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konas)





 

미국은 사망 36,940, 부상 92,134, 실종 3,737명 그리고 포로 4,339명 등

 

137,250(국방부발행:'한미동맹과 주한미군' 참조)이 희생된 엄청난 한국전 참전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값진 희생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전쟁 발발 66주년이 되는 오늘에도, -미동맹 중요성과 필요성은 근본적 변화가 있을 수 없다.

 

한국전쟁은 단순한 남북 간의 내전이 아니라, 한반도 주변 국가 등 20여 국가가 참전한 국제 전쟁이었다. 북한은 이웃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공의 동의와 군사적 지원 하에 전쟁을 준비하여 시작했고,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정찰 명령과 작전명령에 따라 행동했으며, 소련이 제공한 탱크와 자주포 및 야크기로 남한을 기습 공격했다. 소련 군사 고문단이 작성한 3단계 작전명령에 의하면, 북한군은 1단계로 개전 2일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5일 안에 후퇴하는 한국군 퇴로를 차단·섬멸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어서, 북한의 작전계획은 미군이 도착하기 전인 1개월 내로 남한 전역을 점령하는 3단계 작전을 모두 완료하도록 짜여 있었다. 미국이 신속한 참전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저지하지 않았다면, 북한은 1950년 여름에 초기 목표를 쉽게 달성했을 것이다. 인천상륙 후, 10월 초 한·미 양국 군대가 38선을 넘어 진격하자 위기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이 참전함으로써, 한국전쟁은 더욱 복잡한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한국을 방어선 안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던 1950112일 자 '애치슨 선언'을 번복했다. 그 선언과 정반대로, 미국은 신속히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고 공군에 이어 지상군을 한국전선에 투입했다. 625일 새벽 북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 남침을 감행하자, 트루먼과 애치슨 등 워싱턴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은 스탈린의 무력사용을 통한 세력 확장 시도를 초기부터 단호히 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았던 한국이 돌연히 중요한 나라로 변모했다. 626일 동경의 맥아더 장군은 한국군을 돕기 위한 탄약 및 장비 제공, 한국 상황 파악을 위한 조사팀 파견, 38선 이남에서의 해·공군 지원 제공, 대만 보호를 위한 7함대 파견 등의 지시를 받았다. 맥아더 장군은 남한으로 수송할 탄약 적재를 이미 명했고, 2,000명의 미국 민간인 후송 보호를 위해 해·공군의 비상근무를 지시했다. 7함대 도착은 시간을 요했으므로, 그는 남한 상황과 한국군 형편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단을 구성했다.

 

맥아더는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58세의 처치 준장을 실사 팀 단장으로 임명했다. 처치 장군이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동안, 백악관에는 한국군 붕괴와 서울을 포기했을 것이라는 나쁜 소식이 전해졌다. 한편,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을 원하지 않으나, 한국군을 돕기 위해 모든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처치 일행은 적 수중에 떨어졌을지 모르는 김포공항 대신, 27일 오후 7시 수원비행장에 착륙했다. 합참으로부터 주한 미군 지휘권을 부여받자, 맥아더 사령관은 처치 일행이 '전진 지휘부'요원이 되었음을 알렸다.

 

실사 차 내한한 처치 장군은 한국 상황이 극도로 혼란스럽고 서울이 이미 포기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심한 타격을 입은 한국군을 수습하여 방어전을 전개하는 격상된 사령관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처치 장군은 한강 남쪽에서의 강력한 방어전 전개가 최상이나, 병력과 무기면에서 열세인 한국군의 한계를 깨달았다. 28일 아침 처치 장군은 한국군 실상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하면서, "한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전쟁 전의 38선 이남 지역을 회복하려면, 미군 투입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처치는 동경 사령부로부터 고위급 인사의 29일 아침 수원 도착이라는 회신을 접하자, 바로 맥아더 장군임을 알고 극도로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629일 오전 적기 출현 위험을 무릅쓰고 수원 비행장에 참모들과 함께 내렸다. 몸소 한강까지 차로 가서 전황을 살핀 맥아더 장군 역시 지상군의 투입 없이는 사태 수습이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귀로에 공군 참모 스트래트마이어 장군에게 38선 넘어 북한 비행장들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스트래트마이어 장군은 기내에서 "즉시 북한의 비행장들을 공격하라. 맥아더 사령관이 승인했다."고 타전했다. 개전 사흘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여 기세가 등등했던 북한은 미군 폭격기들의 출현과 맹폭으로 크게 경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북한의 속전속결주의에 강력한 제동이 걸렸음을 의미한다.

 

맥아더의 북폭명령은 워싱턴과의 협의를 필요로 하는 민감한 사항이었지만. 카리스마를 지닌 70세의 맥아더 장군은 이러한 절차를 생략한 채 자의적으로 그러한 폭격을 지시했던 것이다. 당시 아이젠하우어 장군은 맥아더 장군 대신에 보다 젊은 장성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라고 권유한 바 있다. 만일 트루먼 대통령이 상륙작전의 명수인 맥아더 장군 대신 다른 젊은 사령관을 임명했더라면, 합참이 마지막 순간까지 설득하고 만류했던 인천상륙작전은 감행되지 않았을 것이며, 38선을 넘는 북한군 추격전과 중공군과의 '새로운 전쟁'도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군이 반격 능력을 상실했으며 한국의 존립 자체가 위태롭다면서 미 지상군의 투입을 건의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은 그에게 지상 전투부대 투입은 대통령 재가를 요하지만, 대통령이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피력했다. 맥아더는 71일 일본 주둔 24사단 21연대 1대대인 스미스 전투부대를 수송기 편으로 부산에 급파했다.

 

34세의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540(포병 108명 포함) 특수부대는 기차로 대전까지 가고, 거기서 트럭으로 오산 북방 죽미령에 도착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스미스 대대는 75일 이곳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4사단 병력 4,000여명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역부족으로 패했다. 24사단은 천안과 조치원에서 연속 패했으며 끝까지 버텨 보려했던 금강 방어선마저 붕괴되자, 대전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720일 미 24사단은 대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사단장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딘 소장은 워커 중장으로부터 1기병사단과 25사단 배치를 위해 2일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최전방인 대전에서 지연작전을 수행하다 패했으며, 3년 동안 포로생활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24사단이 연속 패하면서 확보한 15일은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한국파병을 '짧고 쉬운 경찰업무' 정도로 여겼던 미국은 북한군의 전투능력을 재평가하게 되었고, 인민군을 너무 가볍게 본 과오를 인정했다. 한국에 투입된 미 24사단뿐만 아니라, 25사단과 기갑사단 등도 평시 무드에 젖어 전투훈련 및 준비가 불충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맥아더는 6292개 사단이면 경찰업무 수행이 충분하다고 보았으나, 774개 사단을 요청했고, 79일에는 아직도 부족하니 다시 4개 사단을 추가하여 8개 사단을 보내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합참 참모들을 곤혹스럽고 화나게 만들기도 했다. 맥아더의 추가 병력 요청은 한국전선의 급박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처음 6주간 미군 피해는 6,000명에 이르렀다.

 

낙동강 전선 상황이 급박했던 726일 워커가 8군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요청하자, 다음 날 대구로 날라 온 맥아더는 미8군의 후퇴 중지와 사수를 강조하면서 "한국 '덩커크'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틀 후 워커는 25사단 킨 사단장 및 사단 참모들 앞에서, "더 이상의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다. 우리 뒤에는 물러설 곳이 없다. '덩커크''바탕' 철수는 없을 것이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대살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고 비장하게 낙동강 전선 사수를 명령했다. 낙동강 방어선은 북한군의 거듭된 공격으로 위험에 처한 일도 있고, 심지어 방어선이 뚫린 적도 있었다. 북한군의 공세와 유엔 측의 방어전은 인천상륙 직후인 916일 유엔군이 총반격에 나설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전쟁'(19501953) 만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전쟁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을 '6·25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한은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주장하면서, '조국해방전쟁'으로 또는 '민족해방전쟁'으로 부른다. 미국은 한국전쟁 또는 한국분쟁으로 부른다. 미국의 저자들은 한국전쟁을 '제한전쟁', '잊혀진 전쟁', '패배한 전쟁', '이러한 전쟁' 등 나름의 정의를 내리거나 특성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하나를 선택하라면, '한국전쟁'이 역시 제일 적합하고 무난한 것 같다. 3년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은 분명히 국제전이었으며, 피해가 극심했던 전쟁이었다.

 

미국의 신속한 참전 결정은 김일성의 무력사용을 통한 한반도 적화통일 야망을 무산시켰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한반도 점령 시도는 미국의 신속한 군사력 투입과 희생에 저지되고 말았다. 당시 미국이 한국전 참전을 주저하거나 소극적 입장을 견지했었다면, 오늘과 같이 발전된 한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한국전 참전 결정과 맥아더 사령관의 강력한 군사적 리더십 덕에, 다행히도 한국은 절망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