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양식/시사,칼럼

잠시 살고 영원히 죽는 ‘잘못된 길’ 

풍월 사선암 2016. 12. 6. 00:14

잠시 살고 영원히 죽는 잘못된 길

 

몇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있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오래 속일 수는 없다.”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반열에 오른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경구(警句). 29일 발표된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담화는 이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여야 합의가 이뤄지면 물러나겠다며 망연자실한 지지층을 다시 모으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정 수습 책임을 정치권에 떠넘기는 더블 타깃으로 탄핵 정국을 흔드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신의 한 수’, 야당에선 탄핵 모면용 꼼수라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국민은 금방 헷갈림에서 벗어날 것이다. 링컨의 말처럼 진실은 정치 기술로 덮어지지 않고 반드시 스스로를 드러낸다. 박 대통령은 국민 마음에서 이미 하야한 대통령이다. 지난 대선에서 그를 선택한 유권자의 90%도 등을 돌렸다. 대선 득표율은 51.6%였지만, 현재 국정 지지율은 45%, 5년 임기 보장 여론은 2%대로 떨어졌다. 국민은, 그런 대통령을 뽑은 것을 참회하고, ‘무당을 추종한 대통령탓에 밑바닥까지 추락한 국격에 참담해 한다. 그래서 국민은 대통령이 무너뜨린 국격을, 세계가 경이감을 표시한 대규모 평화 촛불 집회로 조금이나마 복원하려 한다. 국민은 헌법과 법률을 수호하겠다던 선서를 무참히 짓밟은 그에게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를 훼손한 범법자조차도 법과 원칙에 따라 처벌될 때까지 인내를 갖고 기다리는 제도임을 일깨워 주려 한다.

 

이런 위대한 국민 앞에서 박 대통령에게 남은 길은, 진심 어린 사과와 조건 없는 퇴진을 통해 국정 공백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회마저 스스로 허물고 있다. 이번 담화는 거짓 사과와 정치적 술수의 결합이다. ‘백 번의 사과라도 드리는 게 도리’ ‘큰 실망과 분노를 다 풀어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 내린다는 등의 표현을 구사하면서도 주변 관리 잘못으로 모든 책임을 미뤘다.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난 그의 범죄 혐의는 대통령의 행태라고 보기에 민망한 수준이었지만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았고’ ‘국가를 위한 공적 사업으로 믿고 추진했고등의 변명을 늘어놓았다.

 

퇴진 요구에 대해 삼척동자도 저의를 알 수 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했지만 자신의 진퇴 문제를 사실상 불가능한 국회 결정에 떠넘겼다. 불행히도 한심한 정치권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 친박 인사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3차 담화문 발표 전날 박 대통령에게 퇴진을 건의하더니 담화문이 발표되기가 무섭게 여야 협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박 대통령 탄핵에 대해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던 비박 의원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고, 야당은 비박의 동참 없이 탄핵안 가결이 힘들다는 현실에 당황하는 분위기다.

 

이런 여의도를 지켜보며 박 대통령은 회심의 미소를 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침몰하는 배와 운명을 함께하는마지막 명예를 지킬 기회마저 잃어버렸다. 그의 잔꾀에 탄핵 발의가 연기될 수도, 탄핵안이 부결될 수도 있다. 그 틈새에 대통령직을 좀 더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여당은 대선에 나서기도 전에 붕괴되고, 다음 정권을 담당할 세력은 전직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역사적 단죄에 나설 것이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명예에도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몰락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와 차남 비리 등의 를 범했지만, 하나회 해체와 금융실명제 실시 등의 개혁정책으로 사후에 을 인정받았다.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다는 문구와 함께 묘비에 새겨진 다짐처럼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길을 선택한 셈이다. 박 대통령은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선택하는 듯하다.

 

이제 새누리당은 물론 정치권 전체가 오로지 국민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 박근혜정부의 장례 행렬에서 손익 계산에 골몰하는 정치인은 다음 장례 행렬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박근혜정부의 참담한 과오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면 국민의 촛불은 여의도에서 타오르게 될 것이다.

 

20161130() 문화일보 박민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