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의 삶을 보라고 산은 내게 실패를 줬다
8000m 고봉을 38번 탔다는 엄홍길 대장은 그 중 22번 등반에
실패했고, 그간 10명의 동료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실패와 아픔이
자신 삶의 자양분이라 단언하며 요즘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중이다.
[산의 품으로 들어간 엄홍길]
히말라야에서 8000m가 넘는 고봉 16좌(座)를 모두 발 아래 뒀던 남자 엄홍길(56)은 요즘 17번째 고봉(高峰)을 찾아 새로운 등반을 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서울 장충동 ‘엄홍길휴먼재단’ 사무실을 찾았을 때 한쪽 벽에 붙여둔 대형 네팔 지도 곳곳에 작은 종이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동안 등반한 곳이려니 했는데, 자세히 보니 아니다. ‘1차 팡보체 휴먼스쿨’ ‘2차 타르푸’ ‘13차 고르카’…. 현재 짓고 있거나 지은 학교의 위치를 표시해둔 지도였다. 마치 정상 정복을 위해 캠프를 만들듯 이 사내는 지도 위에 하나하나 학교를 그려가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 처음 산자락을 밟던 순간 시작된 에베레스트와의 인연은 그렇게 다시 30년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학교 짓는 엄대장
―학교는 어떻게 짓게 됐나.
“1986년 에베레스트 도전에 두 번째 실패했을 때 셰르파가 1500m 넘는 절벽에서 추락해 크레바스로 빠졌다. 줄을 타고 내려오며 절벽에 있던 찢겨진 옷, 배낭, 핏자국을 다 봤다. 처음 산에서 접한 죽음,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고향이 해발 4060m 팡보체 마을. 홀어머니에 결혼 4개월이었던 그를 위해 뭔가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20여년 만에 약속을 지킨 셈이다.”
―학교만 짓는 것인가.
“난치병 아이들 한국 데려와 수술도 시키고, 해외 원정팀과 등반 도중 숨진 셰르파 자녀들도 돕는다. 현재 24명을 매달 돕고 있다.”
―네팔 셰르파를 돕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올랐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재단을 설립해 에베레스트 산자락 쿰부 지역 고산족인 ‘셰르파’들을 도왔다. 셰르파는 종족명이다. 16좌를 완등한 나는 16곳에 학교를 지으려 한다. 얼마 전엔 가장 큰 마을인 남체에 병원을 지었다. 주민뿐 아니라 외국인 트레커들과 등반가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시설이다.”
―산에는 언제부터 재미를 붙이셨나.
“어려서 자란 원도봉산 자락에서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곳’에 오르는 꿈을 키웠다. 꽤 넓은 화강암 암벽 지대가 있었는데 등반객이 많았다. 중2 때부터 산을 익혔다.”
―에베레스트는 언제 처음 도전했나.
“85년에 꾸려진 에베레스트 등반대에 처음 참여했다. 실패했다. 1988년 세 번째 도전에서 성공했다.”
―어떻게 해야 히말라야 등반대에 뽑힐 수 있나.
▲2010년 11월 두 번째 휴먼스쿨이 세워진 네팔 타르푸에서 엄홍길이 아이들을 만났다.
수많은 실패와 포기, 동료를 잃은 / 슬픔… 그것들이 내 삶의 자양분
일념으로 간절히 바라면 이뤄져… / 에베레스트 16곳에 학교 지을 것
“전국 시·도 대한산악연맹 소속 산악회에서 대원들을 추천받아 1·2·3차 혹독한 선발 과정을 거친다. 그들이 국가대표다. 순서가 대충 나오는데, 현지 도착해 해발고도가 높아지면 이게 달라진다. 산이 받아줄 때도 안 받아줄 때도 있다. 최종 캠프가 설치될 때쯤 가장 적응력 뛰어나고 체력 좋은 순서로 대장이 ‘정상 공격조’를 편성한다.”
―선발대에 포함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겠다.
“인생(人生)의 복사판이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노력’밖에 없다. 대장은 치밀한 계산력과 조직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결정적 순간에 직감까지 모든 것을 총동원해야 한다.”
―언제부터 대장이 되었나. 몇 번이나 올랐나.
“93년부터 대장으로 참여했다. 내가 경험이 가장 많은 셈이었는데, 지금까지 8000m 고봉을 38번 탔다.”
―그중 성공한 게 16번이라면 실패가 더 많은 셈인데….
“성공 스토리에 비해 실패와 포기, 동료를 잃은 슬픔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실패가 내 인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것들이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겠지.”
神들의 지대에 오르다
―몇 명의 동료를 잃었나.
“10명. 그중 4명은 셰르파다. 여성 대원도 한 명 있다.”
―죽음 앞에서 여러 생각이 들겠다.
“베이스캠프를 떠나면 수없이 생사(生死)를 넘나든다. 잡생각이나 욕심이 있으면 안 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야 하지만, 무감각(無感覺)해져선 안 된다. 희생된 동료들은 이상한 전조(前兆)를 보인다. 한 셰르파는 오전엔 네 번째 서 있었는데 오후에 혼자 앞서 나가다가 크레바스에 빠졌다. 산 오르기 전 방송 인터뷰에서 ‘여기서 죽으면 얼마나 행복하겠나, 뭐가 두렵나’ 이런 말을 한 대원도 있었다. 사후에 그걸 보고 미리 알아채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 죽음은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죽음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손등이냐, 손바닥이냐다.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8000m 이상 지대에선 그게 느껴진다. 마지막 순간 그 구분을 뛰어넘는 경험을 한다. 그래서 8000m 이상을 ‘신(神)들의 지대’라고 한다.”
―판단력이 흐려질 때도 있었나.
“16좌 마지막 산 ‘로체샤르’를 오를 때 정상 150m 남겨 놓고 눈사태가 나서 후배 둘을 잃고 세 번째 도전했을 때다. 정상 근처 설산(雪山)이 바람만 불면 무너질 정도였는데 욕심 때문에 산 아래서 그걸 보지 못하고 200m를 남겨둔 지점까지 올라왔다. 한순간 찬 바람이 불며 목소리가 들렸다. ‘너 지난번에도 우습게 보길래 후배들 두 명 데려가지 않았냐. 지금도 네 마음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번에 널 데려가겠다….’ 기(氣)가 콱 눌리더라. 내려왔다. 베이스 캠프에 방송팀까지 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경험이 쌓이지 않을까.
“산을 알수록 두려움과 공포가 쌓인다. 그 내면(內面)을 알면서 올라가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16좌 마지막 오를 때 간절하게 바랐다. 이번에 성공하면 살아남은 자로서 제가 그냥 있지 않겠다. 지금 활동은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어떤 마음가짐인가.
“심상사성(心想事成), 한 가지 일을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 생각도 안 하는데 뭐가 되겠나. 산도 오직 일념 산 하나만 생각하고 올라야 한다. 잡념이 끼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산에서는 치명적이다. 세상 일이라는 게 한 가지 일에 몰입을 해도 될까말까 아닌가.”
―가장 큰 고비는?
“세 번 실패하고, 네 번째 안나푸르나 도전하다가 앞에서 미끄러지는 셰르파의 줄에 얽혀 20~30m 절벽에 떨어지면서 오른쪽 발목이 돌아가고, 뼈가 두 군데 부러졌다. 그 상태로 설산 7600m를 2박 3일 걸려 내려왔다. 한국에서 수술받고 깼더니 다리에 쇠심 두 개 박아놓고 ‘산에 못 간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재활 훈련 해서 사고 10개월 만에 철심도 안 뽑고 안나푸르나 다섯 번째 도전에서 성공했다. 그때 포기했으면 나는 끝났을 것이다.”
―당신에게 산은 무엇인가.
“산은 깨우침을 준다. 평생 산 위만 보고 가다가 어느 순간 산 아래가 보이고, 산자락에 사는 사람이 보이고, 아이들 삶이 보이고…. 그러면서 그들의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힘든지 보게 됐다. 그걸 보라고 산은 내게 성공에 앞서 그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겪게 했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입력 : 2016.10.0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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