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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서 최고급 주얼리로 손꼽히는 '나드리' 최영태 회장

풍월 사선암 2016. 11. 26. 09:43

'디오르' 쫓아낸 남대문표 보석상 미국 巨商되다

 

[한현우의 인간正讀] 서 최고급 주얼리로 손꼽히는 '나드리' 최영태 회장

 

남대문 구멍가게서 출발 / 수중엔 단돈 만원보증금 100만원은 빌려 / 새벽 2시에 출근해 가게 앞 청소부터 시작

30년후 최고 주얼리사로 / 브랜드 키우는 게 살길 OEM 제의 다 물리쳐

노드스트롬 백화점이 삼고초려하게 만들어 나드리 브랜드로 입점

 

"요즘 나쁜 뉴스 많지만한국 대단해, 잘못된 나라 아니다"

 

경남 고성 6남매 중 막내 / 학교 수업료 못냈다고 선생님이 쫓아내도 / 원망할 새 없었고 부모님 탓하지 않아

맥가이버 회장님 / 뉴욕에서 사무실 구할때 샘플 들고 가서 설득 / 못하는 게 없다고 맥가이버라고 불려

 

시련·역경 있어야 성장 / 요즘 젊은 사람들 나보다 훨씬 조건 좋아 / 부족함 없는 시대 없어

조건이 나쁠수록 그보다 나아질수있어

 

최영태 회장은 열 살 때 아이스케키장사로 처음 사업을 시도했다가 참패했다. 10원에 아이스케키 13개를 떼어다 11원씩 팔면 3원 남는 장사였는데, 쑥스러워 하나도 못 팔고 다 먹었다고 했다. 그때 사업이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고 말했다.


19865월 서울 남대문 대도상가 E2층 맨 구석에 서른 살 청년 최영태가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장신구 가게 '나드리'를 열었다. 1m20, 깊이 1m50좁은 공간을 커다란 기둥이 절반쯤 막아, 좁기가 이를 데 없는 가게였다. 주변은 온통 란제리 가게들이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무슨 장사를 하나, 젊은 사람이남 일 같지 않네" 하며 혀를 찼다.

 

첫날 새벽 2, 그는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해 가게 앞을 물걸레로 청소했다. 주변 상인들이 물었다. "새벽 장사 하는 사람이 웬 양복이오?" "손님들은 저에게 가장 귀한 분들이니까 좋은 인상을 주려고 합니다." "청소는 이미 청소하는 분들이 다 했는데?" "물론 그렇겠지만 제 마음과 정성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그날 최영태는 물건을 팔지 못하면 집에 돌아갈 버스비조차 없는 신세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6, 최영태는 미국에서만 8개 보석 브랜드를 3800여개 점포에서 파는 거상(巨商)이 됐다. 삭스피프스애비뉴, 노드스트롬, 블루밍데일, 로드 앤드 테일러, 메이시스 같은 유명 백화점에는 어김없이 그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나드리는 다이아몬드와 금을 제외한 주얼리 분야에서 미국 최고급 상표로 인정받는다.

 

이달 초 경남 통영에서 열린 '10회 이순신장군배 국제요트대회' 명예대회장 자격 참석차 한국에 온 최영태(60) 나드리 회장을 최근 서울 조선호텔에서 만났다. 통영수산전문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올해 이 대회를 위해 자신의 회사에서 새로 디자인한 트로피를 가져와 시상자로 나섰다. 그가 건네준 명함에는 'Young Tae MacGyver Choi'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맥가이버라니, TV 드라마 그 맥가이버입니까.

 

"맞아요. 미국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죠.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일하는 걸 보고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하면서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아아, 많은 일이 있었죠. 1997년 미국 진출 첫해 운 좋게 뉴욕 주얼리 박람회에 참가하게 됐는데 처음엔 구석 부스 하나로 시작해 3년 만에 박람회 맨 앞자리에 16개 부스를 차리게 됐습니다. 그런 걸 보고 '못하는 게 없는 사람'이란 뜻으로 붙여준 별명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 이름은 '맥가이버'

 

나드리의 제품 광고. 다이아몬드와 금을 제외한 모든 보석을 취급한다.


남대문시장에서 13년간 장신구 사업을 한 최영태는 19976월 미국 뉴욕에 법인 등록을 하고 사무실을 구하러 나섰다. 맨해튼 5번 애비뉴 385번지에 세계적인 보석회사들이 밀집한 13층짜리 빌딩이 있었다. 듣자 하니 그 빌딩에 빈 사무실도 없고 또 아무나 입주할 수도 없다고 했다. 최영태는 나드리 제품 샘플과 한국 명함을 챙겨 건물 관리인을 찾아갔다.

 

일단 부딪힌 겁니까.

 

"관리인에게 샘플 상자와 명함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13년간 주얼리 사업을 했습니다. 뉴욕에 진출하러 왔는데 이 건물에 사무실을 얻고 싶습니다. 나드리가 이 빌딩의 자랑이 되도록 할 테니 건물 주인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2시간 뒤에 오겠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2시간 동안 빙빙 돌다가 다시 갔어요. 그랬더니 관리인이 웬 키 크고 허리 구부정한 노인을 모시고 나와요. 그분이 건물주라는 것을 바로 눈치챘습니다. 뛰어가서 인사했더니 그 노인이 저를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2층부터 13층까지 어떤 회사들이 있는지 쭉 설명해주더니 옥상에 데려갔어요. 옥상 가건물을 쓰라는 겁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그곳을 쓸 수는 없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 노인이 길 건너편 20층 넘는 건물을 가리키면서 '저기는 어떠냐'고 물어요. 단번에 '그럼 저 건물에 입주하겠다'고 대답했어요."

 

그 건물이 뭔지도 모르잖습니까.

 

"뉴욕 최고의 주얼리 빌딩 주인이 추천해 준 건물이잖습니까. 무조건 들어가야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추천한 건물은 최고급 보석 브랜드 바로 아래 브랜드들이 입주해 있는 곳이었어요. 그게 5번 애비뉴 389번지입니다. 지금도 그곳에 저희 전시장이 있습니다." () 건물주는 곧이어 그해 8월에 열릴 뉴욕 주얼리 박람회에 나드리가 부스를 차릴 수 있도록 알선해줬다. 마침 그때 박람회 참가를 취소한 업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얼리 박람회가 연 3회 열리는 뉴욕 제이컵 재비츠 센터는 지난 미국 대선 개표 때 힐러리 선거본부가 차려졌던 곳이기도 하다.

 

운도 좋았지만 그만큼 제품이 좋았다는 뜻이겠지요.

 

"물론입니다. 그해 11월에는 노드스트롬 백화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시애틀의 자기네 본사에서 상담하자는 겁니다. 안 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또 안 갔습니다. 대신 '뉴욕에 올 일이 있으면 뉴욕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배짱을 부린 겁니까.

 

"노드스트롬에서 만나자는 건 우리 가치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무척 기뻤지만 눈도 깜짝 안 했습니다. 그들이 시애틀로 샌프란시스코로 오라 할 때 쫓아가면 분명히 '우리 백화점 상표를 붙여 팔자'고 제안할 겁니다. 그렇게 할 이유가 없지요. 그랬더니 2주 뒤에 그들이 뉴욕으로 왔습니다. '우리 백화점에 '나드리' 브랜드로 들어와달라'고 했습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내보내고 나드리가 들어오는 것'이라고 했어요. , 그때는 정말 숨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벅찼습니다. 남대문에서 맨손으로 시작한 나드리가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쫓아내다니." 이듬해 1월 노드스트롬에 들어선 나드리는 첫 입고 물량 300여점을 사흘 만에 팔아치우며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지름길로 가지 않겠다"는 철칙

 

브랜드를 개척해 키워나가는 것이 기업의 살길이라는 최영태의 철칙은 남대문시장 시절 비롯된 것이다. 1988년쯤 일본 5대 백화점에 납품하던 시절에도 OEM(주문자 상표 생산) 무역 기회가 있었으나 그는 거절했다. "나드리 상표로 팔리면 나드리 시장이지만, 일본 상표로 팔리면 그건 일본 시장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1989년엔 나드리에 인조 보석을 납품하던 오스트리아 회사 스와로브스키에서도 비슷한 제안을 했었다.

 

미국 진출 초기 뉴욕 주얼리 박람회에서 상담 중인 최영태회장

 

역시 거절했습니까.

 

"스와로브스키 인조 보석이 품질이 좋아 그 회사 제품을 사다가 장신구를 만들었어요. 거절하니까 '스와로브스키 상표를 붙이면 더 잘 팔릴 텐데 왜 그러느냐'고 묻더군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스와로브스키를 보고 물건을 살 것 아니냐. 나드리는 없어질 것이다. 그것이 지름길이라 해도 그 길로 가지 않겠다. 절대로 스와로브스키라는 우산을 쓰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최영태는 경남 고성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논 두 마지기 반으로 벼농사를 했고 작은 정미소를 운영했다. 그는 "고성읍내에서 6가량 떨어진 시골에 살았는데 1972년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초등학교 때 공납금을 내지 못해 수업 도중에 쫓겨나곤 했다"고 말했다.

 

수업 도중에 수업료 가져오라고 했습니까.

 

"그때 우리 반 60명 중에 절반은 공납금을 제때 못 냈습니다. 그렇게 수업 도중에 나오면 집에 가지 않고 개울가에서 고기 잡고 놀다가 학교 끝날 때쯤 집에 갔어요. 집에 가봐야 돈이 없다는 걸 잘 알았으니까요."

 

중학교까지 고성에서 다닌 최영태는 통영수산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기관사가 되어 외국으로 나가는 꿈을 택한 것이다. 어려서부터 부친 정미소에서 기계에 익숙해졌기에 항해학 대신 기관학 전공을 택했다. 졸업 후 기관사가 되어 무역선을 타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다니다가 군복무를 마친 그는 부친의 만류로 배 타는 것을 포기하고 1981년 서울의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용수철과 주얼리를 만들어 미국에 납품하는 회사였다. 최영태와 주얼리의 첫 만남이었다.

 

어떤 부서에서 일했습니까.

 

"관리부에서 28개월 일했습니다. 사장님이 저를 아껴주셨지만 저는 바이어들에게 꼼짝 못하는 회사가 싫었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봐야 사업에 반영이 안 되고 오로지 바이어 요구에 맞춰야 했어요. 사람들은 죄다 은행에 돈 구하러 가서 회사가 텅텅 비어있었지요. 그때 제조업 회사가 OEM만 해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아도 자기 시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1984년이었다. 회사를 그만둔 그는 남대문시장에서 '스마일'이라는 장신구 가게를 차렸다.

 

"'구색 장사'라고 불렀어요. 장신구들을 구색 갖춰 놓고 파는 거죠. 그러다가 주얼리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조해서 팔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86년에 '나드리'를 차리게 된 겁니다." 나드리를 시작할 때 그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함께 일하던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나 "그 일에 매달리지 않았다"고 했다. "제가 그분들을 고소하고 시시비비를 따져 매달리면 제 시간과 열정과 돈을 더 잃게 되는 겁니다. 그냥 손해 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푼도 없이 어떻게 다시 사업을 시작했습니까.

 

"보증금 100만원을 빌렸지요. 수중에 돈이 딱 1만원 있었습니다. 장신구 진열대는 시장에 굴러다니는 사과 궤짝을 뜯어 못질해서 만들고 그 위에 벨벳 천을 덮었습니다. 벨벳 천 사는 데 1만원을 썼지요."

 

그리고는 가게 앞 청소를 시작한 겁니까.

 

"그 시장에서는 다들 복잡한 통로를 발밑만 보고 정신없이 다니는데, 우리 가게 앞은 늘 반짝반짝했습니다. 그렇게 장사를 하면서 가게를 한 칸씩 두 칸씩 늘려가다 보니 어느새 상가 대부분을 제가 물걸레질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나중에 그 상가에서 가게 12칸을 썼습니다."

 

그 뒤로 최영태는 단 한 푼 남의 돈을 빌리지 않았다. 나드리는 부채가 '0'인 무차입 경영으로 이름났다.

 

단돈 1만원으로 시작한 사업

 

그는 경남 통영의 이순신장군배 국제요트대회명예대회장을 맡아 이달 초 열린 대회에서 이순신 장군 칼을 본뜬 트로피를 만들어 시상하기도 했다.


은행에서는 빌려주려고 할 텐데요.

 

"회사 규모를 키우는 게 제 목적이 아닙니다. 매출을 늘리거나 이익을 확대시키는 것도 목적이 아니에요. 다만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 저희 회사의 목표입니다. 제가 다이아몬드를 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무리하게 카르티에나 티파니 같은 회사와 경쟁하면 무조건 실패합니다(나드리는 다이아몬드를 제외한 보석을 금 아닌 금속으로 장식하는 '브리지 주얼리'만을 취급한다). 비즈니스를 한국으로 확대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 있습니다. 내가 한국에 굳이 진출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드리는 미국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무리하게 한국에 진출해서 다른 브랜드들과 생존 경쟁을 하면 시장이 함께 망합니다." 그의 회사는 미국 '브리지 주얼리' 업계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비상장 회사라서 매출액을 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나드리'는 어떻게 지은 이름입니까.

 

"가게 이름이 앞으로 브랜드가 될 거니까 고민 많이 했죠. 하루는 버스 안에서 동대문 옛 버스터미널 앞 횡단보도 건너는 사람들을 보게 됐는데 다들 표정이 밝고 웃고 있어요. 보따리 인 사람도 아이 손 잡은 사람도 모두 그래요. , 다들 서울 나들이 나왔구나. 그래서 저렇게 표정이 밝구나. 그래서 '나드리'가 된 겁니다. 하하."

 

나보다 훨씬 조건 좋은 한국 청년들

 

최영태는 최근 한국 중·고생과 대학생들을 상대로 자주 강연을 하고 있다. "내가 최영태 저 촌놈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졌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다고 했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겠군요.

 

"부족하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또 만족하지 않아야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만족하면 도태됩니다. 항상 부족하고 시련을 겪고 역경이 있어야 사람이 살아 있는 겁니다. 조건이 나쁘면 나쁠수록 그보다 나아질 수 있어요. 제가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지금은 어떤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제가 오만해지고 게을러질까 봐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잘못된 결정으로 지금까지 해온 일에 나쁜 영향을 끼칠까 봐 늘 긴장하면서 삽니다. 저는 남을 쳐다볼 새가 없었습니다. 부잣집을 부러워했지만 돌 던질 새가 없었어요. 선생님이 쫓아내도 원망할 새가 없었고 부모님을 탓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들 너무 많은 조건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이 인공위성이에요. 온 세계 정보를 손에 갖고 있으니까 남의 것이 솔깃하기만 해요. 아무것도 쥔 게 없을 때 자기 능력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과외를 시키는 게 자녀를 망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과외를 받으며 자란 사람은 직업을 선택할 때도 능력 이상을 원해요. 과외 받아서 일류대 나오고 취직을 했는데 직장생활하면서 또 과외를 받는다더군요. 일생 과외가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허전해서 서 있을 수도 없다고요."

 

이런 얘기들을 강연에서 합니까.

 

"저는 중·고생들에게 '지금 알고 있는 지식과 이치만으로도 인생 사는 데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말해요. 그러나 그 지식과 이치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채우기만 하고 자기 능력을 쓰지 않습니다. 자기 능력을 발휘할 생각은 안 하고 더 공부하고 더 자격증 따고 더 경력 쌓고그러니 평생 자기 자리가 없는 겁니다."

 

좀 더 나은 곳에서 시작하려는 거겠죠.

 

"우리 회사 입사 면접 때 저는 '몇 년 있을 겁니까' 묻습니다. 그러면 다들 '오래 있겠다'고 해요. 저는 '3년 열심히 배워서 나가세요' 합니다. 열심히 한 3년 일한 뒤 멋지게 이력서 써서 더 좋은 회사로 가면 되지요."

 

그럴 정도면 아까운 인재일 텐데요.

 

"있으라고 하면 가고, 가라고 하면 있는 겁니다. 우리 회사가 매력 있고 가능성 있으면 가라고 해도 안 갑니다. 저는 회사를 그렇게 경영합니다. 우리 회사에 맞는 인재들을 모아서 그분들에게 맞는 회사를 만들어가면 됩니다. 그래도 우리 회사에 카르티에, 티파니 출신 디자이너들이 수두룩합니다."

 

최영태는 미국 사무실에 자신의 뒷모습 사진을 걸어놓았다고 했다. "제가 산에 올라가는 걸 좋아하는데, 방향은 꼭대기에 두지만 마음은 발바닥에 둡니다. 그렇게 한발 한발 올라가면 어느새 눈앞에 뻥 뚫린 정상이 나타납니다. 그때 산 아래를 보면 가물가물하게 보입니다. , 내가 저 속에 살았구나, 그 속에서 크고 작은 일에 마음 빼앗겼구나, 여기서 보니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뒷모습을 위해 살 생각입니다."

 

헤어지기 직전 그는 묻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에 산 지 20년이 돼갑니다. 한국에 올 때마다 엄청나게 발전한 우리나라가 고맙고 제가 참여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 위치에서 치열하게 살면서 만들어낸 겁니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들려는 한국인의 열정이 너무 뜨겁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도 생기는 겁니다. 요즘 나쁜 뉴스가 많지만, 정말 대단한 나라가 돼가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낍니다. 2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긍정의 나라, 대단한 나라입니다. 절대로 잘못된 나라가 아닙니다." 차돌 같은 사람이었다. 뜨겁게 달궈지되 웬만해선 깨지지 않을 사람이었다.


조선일보 입력 : 2016.11.26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