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명상글

단 한 번의 인생, 슬픔보다 기쁨의 볼륨 키워라

풍월 사선암 2016. 5. 14. 00:20

단 한 번의 인생, 슬픔보다 기쁨의 볼륨 키워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8:조조가 비에게

 

양이지복 가득영년(養怡之福 可得永年)-기뻐하는 마음을 키우는 게 복이려니 가히 영년을 누릴 수 있다 

[한자 풀이] 기를 양 기쁠 이 어조사 지 복 복 옳을 가 얻을 득 길 영 해 년

 

<삼국지>의 조조에게는 아들만 25명 있었다. 그러니 처첩이 한둘(15명이라는 설이 있다)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하튼 그중에 맏아들 이름은 이다. 앙은 약관의 나이에 효렴에 천거되었으며 문무의 재능을 모두 갖추었고 모두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일찌감치 조조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조조의 후계자였던 앙은 아버지와 함께 남북정벌에도 참가하는 가문의 영광을 누렸으나 정벌 때 투항했던 장수가 돌연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조조가 위험에 처하자 자신의 말을 아버지에게 양보해 조조를 탈출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앙 자신은 전장에서 청춘의 목숨을 잃게 된다.

 

앙은 조조의 첫 번째 첩 유 씨 부인의 소생이었다. 유 씨 부인은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더니 요절하고 말았다. 그래서 슬하에 자식이 없었던 조조의 원래 정실인 정 부인이 양어머니가 되어서 유 씨 부인의 세 남매를 거두었다. 어린 세 남매를 극진하게 보살폈고 친자식처럼 알뜰살뜰 길렀다. 특히 장남 앙은 효성이 깊고 점잖고 고상해서 정 부인의 기대가 무척 컸다.

 

그러나 뜻밖에도 장수를 정벌하던 중 조조가 여색을 탐하여 투항했던 장수가 다시 모반을 꾀하는 바람에 사고가 일어났다. 조조는 일패도지하여 장자 조앙을 전장에서 잃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정 부인은 자식을 잃은 사무치는 슬픔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훗날 장수가 투항하자 조조는 과거의 잘못을 탓하기는커녕 그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딸까지 시집보내었으니 정 부인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조조의 면전에 욕을 퍼붓고 돌아서서 눈물을 지었다. 조조는 이를 참을 수 없어 정 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조조는 정 부인이 그의 저택에서 호화로운 생활에 길든 사람이라 친정으로 돌아가더라도 결국에는 청빈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틀림없이 마음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 부인은 태연자약하게 옷감을 짜며 잘 지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조조는 정 부인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직접 그녀를 찾아가 다시 돌아오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 부인은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양 옷감 짜는 데만 열중했다. 조조는 아내가 나와 보지도 않자 할 수 없어 그녀가 옷감을 짜는 방에 들어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부탁했다. “당신, 고개를 돌려 나를 좀 보시오. 나와 함께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겠소?” 정 부인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조는 한참을 기다리다 하릴없이 방을 나왔다. (중략) 집으로 돌아간 조조는 정 부인과 재결합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녀를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아 그녀에게 개가해도 좋다는 뜻을 전했다. (중략) 개가하지 않고 홀로 지내던 정 부인은 몇 년 뒤 친정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량룽 지음, 이은미 옮김, <조조 읽는 CEO>에서)

 

다시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정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첩 중에 변 부인이 정실이 되었다. 변 부인과의 사이에서 조조는 비, , , 옹 네 아들을 두었다. 이 중에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지를 두고 조조는 대단히 고심했다. 대세는 둘 중에 하나로 좁혀졌다.

 

드디어 결론이 났다. 비가 후계자로 낙점되었기 때문이다. 낙점의 배경에는 동 시대의 원소와 유표가 장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태자로 세워 내부 분쟁을 일으킨 교훈이 사례가 되었다고 한다. 다른 아들들에 대한 교육에도 역시 조조는 은근(慇懃)’으로 일관하며 최선을 다했다.

 

훗날 황제가 된 조비도 조앙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조조를 따라 전쟁터에 다녀야만 했다. 말타기, 활쏘기, 검술은 조조의 아들이라면 반드시 익혀야 할 무()의 기본이었고 <손자>는 필독서였다. ()에서는 누구나 시()를 지을 줄 알아야 했다. 독서교육에서 사서는 기본이었고 더 나아가 <시경><서경> 등 고급 학문은 그들 모두의 필독서였다.

 

조조와 조비, 조식은 삼조(三曺)’라고 해서 문장이 아주 뛰어났는데 그중에서도 조식이 가장 앞섰다는 평가를 받앗다. 그다음이 조조, 가장 처진 쪽이 조비라고 할 정도로 이 삼부자의 문장은 당대에 유명했다. 특히 조식은 천재 시인이었다. 10세에 <논어><시경>을 떼고, 글을 짓는 데 능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식은 문에서만 탁월할 뿐 정치와 무에서는 조조보다 한참이나 밑이었고, 조비보다도 월등하게 밑돌았다.

 

아들들 중에 조창의 무예 실력은 아주 뛰어났다. 허저, 전위 등 명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수차례나 조조의 출정에 함께하여 무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식과는 반대로 무에서만 돋보였을 뿐 문에는 매우 약했다. 보다 못한 아버지 조조는 네가 글 읽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말타기와 칼 쓰기만 아는 것은 필부의 용맹함일 뿐이다. 자신만 보존할 줄 아는 것이 무슨 능력이라 할 수 있느냐고 꾸짖었다. 조조는 직접 경전을 몇 권 골라 조창에게 공부하도록 하고 <시경><서경>에 통달하여 만인을 이기는 문인의 풍격을 지닌 장수가 되길 바랐다. 량룽 박사는 이렇게 평가했다.

 

조조의 아들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 천부적인 재능을 갖추었다. 더욱이 조조는 아들들의 천부적인 재능을 잘 보존하여 발전할 기회를 충분히 주었다. 또 아들들이 만능 재주꾼으로 발전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모두 우수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조는 교육학과 심리학을 알고 사람의 성장을 이해하는 좋은 아버지였다.(량룽 지음, 이은미 옮김, <조조 읽는 CEO>에서)

 

모두 천부적인 재능을 갖추었다라는 말은 달리 생각하면 조조가 은근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은사근사 죽자민사(恩斯勤斯 鬻子閔斯)’라는 팔자로 아들들을 애지중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좋은 아버지 모습으로 조조를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조조가 아들들에게 준 팔자 養怡之福 可得永年

 

조조는 여러 시 작품을 남긴 바 있다. 그중 귀수수(龜雖壽)’라는 제목을 단 시작(詩作)53세 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龜雖壽(귀수수)

 

神龜雖壽 猶有竟時(신구수수 유유경시)

신령스런 거북이가 비단 장수한다 해도 죽는 때가 있다네

謄蛇乘霧 終爲土灰(등사승무 종위토회)

이무기 안개를 타며 오른다 해도 끝끝내는 흙먼지만 될 거라네

老驥伏櫪 志在千里(노기복력 지재천리)

준마는 늙어 마구간에 있다 해도 뜻은 천리를 달린다네

烈士暮年 壯心不已(열사모년 장심불이)

열사 늙었으나 사나이 마음까지 끝난 것은 아니라네

盈縮之期 不但在天(영축지기 불단재천)

차고 이지러지는 시기야 하늘에만 달린 게 아니라네

養怡之福 可得永年(양이지복 가득영년)

기뻐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면 가히 영년을 누릴 수 있다네

幸甚至哉 歌以詠志(행심지재 가이영지)

행복이 닿는 곳 어디런가 마음이 번지는 대로 노래하세

 

조조의 인생에 대한 철학적 사고와 야망이 빛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처럼 조조의 일생은 생로병사에 의연했다. 주눅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육신은 늙은 준마가 되었지만 정신은 천하통일을 향해 힘차게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조조는 자신의 마음()이 번지는 대로, 즉 생각대로 살고자 했다. 굳센 장부로서의 기개가 엿보인다. 게다가 하늘의 뜻만 요행으로 바라지 않고, 나 자신의 뜻대로 살 거라는 웅장한 포부는 행운에 기대하지 않고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멋진 남자, 조직 리더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밑줄 친 여덟 글자. 즉 팔자인 양이지복 가득영년(養怡之福 可得永年)’이란 말은 참으로 압권이다. 매사에 기뻐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다면 가히 영년을 누릴 수 있다네라는 충고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기쁨이야말로 오복(五福)’을 누릴 수 있는 바탕(後素)이 되는 게 아닐까. 오복은 무언가. ‘((康寧(강녕攸好德(유호덕考終命(고종명)’을 말한다. 오래 사는 것, 부유한 것, 건강하고 편안한 것, 덕을 좋아하는 것, 목숨을 살펴서 마치는 것이야말로 기쁨이란 바탕이 없고서는 인생이란 그림(繪事)을 그릴 수 없다.

 

오복의 반대는 육극(六極)’이라고 한다. ‘凶短折(흉단절), (), (), (), (), ()’이 그것이다. 비명횡사하고, 아프고, 걱정하고, 가난하고, 악독하고, 나약한 것으로 슬픔이 바탕을 이룬다. 좋은 바탕이 있어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처럼, 나쁜 바탕은 나쁜 그림으로 인생을 안내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헤아리고 경계로 삼아야 한다.

 

아버지 조조는 시를 통해 아들들에게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을 전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기뻐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슬퍼하는 마음을 줄이자. 대신에 기뻐하는 마음을 되찾자. “슬퍼하는 마음을 키우고자 한다면 인생은 행복의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어차피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슬퍼하는 마음의 볼륨은 줄이고 기뻐하는 마음의 볼륨을 키운다면 끝난 것이 아니고 다시 새롭게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나머지 인생을 행복 가득한 영년으로 충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벼슬살이하던 조조는 봄여름이 오면 책을 읽었고, 가을 겨울이 오면 사냥을 했다고 한다. 벼슬살이, 즉 직장을 그만두고 스스로 창업자가 되어 전쟁을 치르면서도 시를 짓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시 짓고, 책 읽기에서 기뻐하는 마음을 찾았다. 또한 술() 마시고 노래하길 기뻐했다. 연주목이 되고, 헌제를 모셔 승상이 되고, 위공으로 책봉이 되고, 위왕이 되어서도 시종일관 기뻐하는 마음을 불철주야 키우고자 노력했다. 량룽 박사는 조조와 유비의 정반대 성향을 다음과 같이 비교했다.

 

조조는 인재 등용에서 재능만을 중시했으나 유비는 변함없이 굳은 절개를 중시했다. 조조는 술을 좋아했으나 유비는 금했고, 조조는 책읽기를 즐겼으나 유비는 좋아하지 않았다. 조조는 속박받는 것을 싫어해 방탕했으나 유비는 침착하고 중후했다. 조조는 철통 같은 강권을 사용했으나 유비는 인의를 주창했고, 조조는 여색을 밝혔으나 유비는 여인을 멀리했다. 조조는 근검절약했으나 유비는 말과 좋은 옷을 선호했다.(량룽 지음, 이은미 옮김, <조조 읽는 CEO>에서)

 

선택은 나의 몫이다. 기뻐하는 마음이 나에게는 무엇인가. 조조와 유비처럼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남이 대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의 일이고 내 몫이다.

 

심상훈 고전경영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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