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그립다 – 박목월 시인 아들 박동규 교수

풍월 사선암 2016. 2. 4. 11:00

설날을 기다리며

 

박동규 /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낡은 생각 같지만, 인간의 생명이 지닌 의미는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다. 이 살아 있음은 다름 아닌 인간만이 가진 따뜻한 사랑과 영원한 핏줄의 연대다. 이 연대는 가족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꽃을 피워 나갈 때 비로소 인간다움을 가지게 된다.

 

설날 차표를 예매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해마다 이 방송이 나오면 설날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마치 자석에 끌리듯 고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제는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고향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겠지만, 그래도 고향을 찾는 것은 부모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설날이 가까워지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머니와 삼촌이 계시던 경주 북쪽 건천이라는 곳을 갔다. 새벽에 서울에서 기차를 타면 한밤중이 되어서야 고향 마을에 내릴 수가 있었다. 지루한 기차 안에서 창문을 열면 석탄가루가 날아 들어와서 눈이 붉어질 때도 있었고, 어느 해에는 열차의 좌석이 없어서 의자 위에 매달린 선반에 올라가 누워서 간 적도 있었다. 나는 가끔 짜증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삼촌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였다. 그해도 서울에 살던 우리 가족은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갔다. 할머니는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는데도 고향 역 신호등 아래 서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다가가자 나를 품에 껴안고 아이고 내 새끼야하고 우셨다. 할머니의 눈물이 내 볼을 적실 때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물이 났다. 내 새끼라는 말이 가슴에 얼음 칼처럼 섬뜩하게 꽂혔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온 혈연의 끈이 갑자기 내 가슴을 죄어오는 듯한 느낌이었고, 그 느낌은 알 수 없는 눈물이 되었다. 


어찌 보면 부모가 자식을 키워오는 동안 내 새끼라는 극히 동물적인 용어 하나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인다. 하근찬의 오래된 소설 수난 이대를 보면 부자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일제 시절 산골에 살던 농부가 징용에 끌려가 팔 한쪽을 잃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 손으로 호미를 들고 농사를 지으며 아들이 장성하여 이 집을 일으켜 세워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았다. 그런데 6·25가 터지고 아들은 군문에 입대하여 전선으로 가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휴전이 됐다는 소문이 돈 얼마 후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다. 제대해서 며칟날 고향 역에 내린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장에 가서, 돌아오는 아들을 주려고 간고등어 한 접을 사서 새끼줄에 매달고 역으로 갔다. 드디어 기차가 도착하고 아들이 다가왔다. 아들은 다리 한쪽을 잃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이 비극의 부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였다. 마침내 아버지와 아들은 동네 앞 큰 개천의 외나무다리에 닿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다리 한쪽이 없음을 생각하고 쪼그려 앉아서 아들에게 너는 다리 한쪽이 없고 나는 한 팔이 없으니 너는 이 고등어를 들고 등에 업혀라. 나는 다리가 둘이니 너를 업고 건널게라고 했다. 아들을 업고 다리 위에 서서 농부는 아들에게 그래 내가 너의 다리가 되고 네가 내 팔이 되면 우리 살아갈 수 있지 않니하고 말했다.

 

대학 때 읽은 이 소설에서, 농부가 다리 위에서 한 이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말 속에는 내 새끼를 뛰어넘는 깊은 감명이 있다. 이 감명은 서로를 생명의 공동 동반자로 여기는 아버지의 생각이다. 단순히 핏줄이 같다는 것에 머무는 게 부자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삶의 보완적 관계를 통해 변함없는 동질의 삶을 함께해 가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실에서 공부만 하며 내일이 보이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도 밤늦게 연구실에서 나와 집으로 갔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버지가 대문 앞에 서 계셨다. 내가 다가가자 뭔가를 내 손에 쥐여주면서 이걸로 점심이라도 제대로 사 먹어. 열심히 하는데 잘 되겠지하시며 어깨를 감싸 안아주셨다. 동생들 앞에서 다섯 형제의 맏아들인 나한테만 용돈을 주실 수 없어서 대문 앞에서 기다리신 것이었다. 미안하고 송구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내 아버지라는 가슴 가득한 행복감이 나를 떨게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머니는 내가 사십 대 초반 열병에 걸려 십여 일을 생사의 갈림에서 투병할 때 새벽부터 한밤까지 내 손을 잡고 마치 함께 앓듯이 눈물로 기도하셨다. 나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어머니의 잔잔한 기도 소리를 들으며 가슴속에서 절로 울려오는 사랑을 알 수 있었다.

 

신문마다 실린 부모와 자식 간의 패륜적 기사에 겁이 난다. 가정의 기틀이 올바로 잡혀야 온전한 삶을 이뤄갈 수 있다. 부모는 바로 이 온전함의 중심이며 인간다움의 표상이 돼야 한다. 막연한 새끼개념만으로 한 가정을 이뤄 갈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설날 고향으로 가는 차표를 사서 즐거운 것은 부모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데 그치는 게 아니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애틋한 마음에서 피어난 사랑의 향기가 인간다운 아름다운 삶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추운 강가에 피어난 갈대들이 서로 어울려 몸을 비비고 엉켜 하나가 돼 사는 것은 그들이 하나의 터전에 사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서로 위안하고 의지하며 살아야 갈대가 되는 것임을 갈대는 아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그립다 박목월 시인 아들 박동규 교수


 

박목월 시인 아들 박동규 교수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그립다

 

박동규 교수는 평생 박목월 시인의 아들로 살아왔다. 그의 바람과 다르게 박목월 시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세월이 40여 년이지만 아버지가 그리운 것은 여전하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은 하루하루 날을 더할수록 눈처럼 쌓이는데, 결코 녹지는 않는다. 박동규 교수의 아버지 이야기와 아버지로서 그의 삶을 들었다. 

글 박지영 사진 홍경택(스튜디오100) 

눈처럼 쌓여 가는 그리움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태어난 박동규 교수는 평생 시인 박목월의 아들로 살고 있다. 아버지가 발행한 시 전문지 <심상>의 발행인을 맡아 지난 30여 년간 한 달도 빠짐없이 성실하게 발행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박 교수는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아버지와 함께 살아온 길을 돌아보고자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 제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돋아났습니다.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지면서 아버지의 우산 안에 살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뼛속 깊이 깨달았지요. 아버지의 존재란 비오는 날의 우산과 같습니다. 그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셨는가를 찬찬히 생각해보았고, 그 생각을 정리해 글로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라는 책입니다.”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한 후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를 맡고 있는 그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심상>을 발행하고, 강의를 하고, 집필을 한다. 요즘 일과를 마치고 매일 저녁 3시간씩 하는 일은 그동안 대학에서 강의했던 노트를 정리해 책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전히 일상을 빼곡한 스케줄로 채우는 박 교수에게 물었다. “아직도 아버지가 그리운가요?” 그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은 눈처럼 쌓여 가는데, 이 눈이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녹을 줄 모른다고 대답했다. 여전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과 또 한 아들의 아버지가 된 박 교수가 탁자 위에 꺼내놓은 이야기는 진하고 깊다.

 

배고픈 건 아버지만 안다

 

박 교수의 아버지 박목월 시인은 섬세하고 자상한 성품이었다. 천성적으로 착하던 목월 시인은 자식 마음에 조그만 그늘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평소 엄격하게 박 교수를 대하며 꾸중하곤 했지만 그런 밤이면 어김없이 방에 찾아와 다 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가곤 했다. 박 교수는 피곤한 기색은 모든 사람이 알아차려도 배고픈 건 아버지만 안다고 말한다. 한 번은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못한 그의 주린 배를 아버지만 알아차린 일도 있었다.

 

내 나이 스물다섯인가, 여섯인가 정확한 때는 기억나지 않은데, 서울대학교에서 시간 강사를 할 때였어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빼곡하게 강의가 있던 날이었죠. 헐레벌떡 일어나 아침도 못 챙겨먹고 간 날이었는데, 점심시간마저 한 학생의 질문에 답하는 바람에 전부 날려버렸어요. 강의가 끝나고는 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밤 10시가 될 때까지 하루 종일 쫄쫄 굶었어요. 그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두 정거장가량 걷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는 어지럽더군요. 하필 그날따라 버스는 초만원이었어요. 그때 누가 내 등 뒤에 붙어서 허리를 만졌어요. 돌아보니 아버지 목월 시인이었습니다. 무척 놀랐는데 그때 아버지가 그러더군요. ‘아들과 이렇게 만원버스에 만난 것은 기적이라고요. 그렇게 붙어가다가 아버지가 자꾸 내 배꼽을 만져요. 집에 도착하려면 좀 남았는데 내리자고 하시더군요. 내 배를 자꾸만 만져보고는 굶은 것을 알고 중간에 내리자고 한 것이죠. 집까지 가려면 오래 걸리니까 얼른 배 채워주려고 그러셨겠죠. 남영동에 내려 빌딩 사이 나무의자가 놓여 있는 허름한 잔치국수집에 들어가서 국수 한 사발씩 먹었어요. 국수를 먹으면서 아버지가 그래요. 더 좋은 거,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는데 지갑에 돈이 없더라고. 아버지란 존재는 그런 것 같습니다. 피곤한 건 모든 사람이 다 알아봐도 배고픈 건 아버지만 알 수 있어요. 아버지는 겉만 보지 않고 깊은 속까지 보니까요.”

 

다 해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박 교수의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일화도 있다. 6.25 전쟁 당시 피난지 대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학교에 다녀와 동네 친구들을 찾으니 아무도 없더란다. 모두 수성천변에서 열리는 서커스 구경을 간 것이었다. 박 교수도 서커스 구경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집으로 뛰어 들어가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졸랐는데, 한 시간 넘게 아무 말도 없이 책만 보고 계셨어요. 곁에서 조르기를 두 시간쯤 했을까요,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쥐며 오늘 돈이 한 푼도 없다. 나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서커스장 입구에서 나팔 부는 악사를 구경하고 오자시며 일어서는데 아버지 눈가에 달린 눈물방울을 보았습니다. 철없는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수성천변으로 가 멀찌감치서 서커스장을 보는데, 아이들이 개구멍을 만들어 서커스장으로 들어가는 게 아닙니까. 아버지는 이놈아, 너도 빨리 들어가라시며 내 등을 밀었어요. 나는 얼른 뛰어가 두 시간쯤 신나게 서커스를 보고 나왔어요. 해는 이미 어둑해지고 하얀 자갈들이 까맣게 보이는데 그때까지 아버지는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계셨어요. 아버지에게 달려가 이유를 물으니 그러시더군요. ‘이놈아, 개구멍으로 들어갔다가 잡혀서 얻어맞지나 않나 걱정되어서 앉아 있었다하셨어요. 아직도 그날이 생생합니다. 돈이 없어 서커스 천막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 개구멍으로 들여보낸 아들이 맞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안타까웠던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가 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키우는 일은 불효의 발견

 

박 교수 역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둔 아버지다. 그는 자식을 키우는 일은 부모에게 못했던 것을 발견하는 일이라고 한다.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가 되어 보니 아버지에게 잘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식일 때는 몰라요. 부모가 되어서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됩니다. 원래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일이 되고 자신이 그 역할을 맡게 되어야 압니다. 내 자식이 귀한데, 아버지 자식인 나는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아버지가 되어 보니 아버지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평범한 일상은 가족이 모여 사는 모습과 생활로 채워진다. 어찌 보면 의미 없어 보이는 일상 속에 생명을 엮는 혈연의 끈이 묶여 있다. 박 교수는 그의 아들이 어렸을 때 기억을 이야기한다.

 

어느 비오는 날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마중 나온 아들을 찾았어요. 많은 사람 틈에서 두리번거리는데 아들은 우산을 받쳐 들고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은 보지 않고 철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떡만 보고 있었어요. 얼른 아들에게 가서 아버지를 찾아야지, 호떡을 보고 있으면 어떡하니?’라고 말했죠. 그러자 아들이 맑은 눈으로 아버지, 잘못했어요라고 하지 뭡니까. 얼른 아들 손에 호떡 두 개를 사 쥐어주고 함께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박 교수의 아들도 장가를 가 두 딸의 어엿한 아버지가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가정을 꾸리고 있는데, 그 아들이 요즘 박 교수에게 자주 하는 말이 아버지, 건강하세요라는 것이다.

 

이번 여름에 아들 보러 미국에 다녀왔어요. 아들이 틈만 나면 아버지, 건강하세요라고 말해요. 그래서 이놈아, 왜 자꾸 같은 말을 하느냐고 했죠. 아들이 그럽디다. 아버지가 건강해서 오래 오래 사셔야 자기 성공하는 것도 다 지켜볼 것 아니냐고요. 아버지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과 성공해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고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은 것이 아들 녀석의 마음이겠지요. 녀석이 마음은 안 그런데 말하는 재주가 없어요. 그래도 하면 알아듣는 게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인 것 같습니다.”

 

박 교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몸이 아플 때,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삶의 문제 앞에서 작아지는 순간순간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물어봤을 텐데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하고 그리운 이름을 힘껏 불러본다. 문학평론가이자 문학박사인 박 교수. 그가 걸어온 인생길은 아버지가 인도한 견고하고 튼튼한 길이 아닐까.



문학평론가이며 문학박사인 박동규 교수는 1939년 경북 경주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에서 석·박사를 이수하고,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추천되었다.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한 후,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월간 시 전문지 심상의 편집고문을 맡고 있다. 저서로 별을 밟고 오는 영혼, 당신이 고독할 때,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삶의 길을 묻는 당신에게,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등이 있다. 이중 아버지는 변하지 않는다는 아들과 함께 책을 쓰고 싶어 했던 아버지, 그리고 평생을 시인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아들. 부자라는 인연으로 묶인 박목월 시인과 박동규 교수의 가족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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