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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육아에 시달리는 친정엄마들

풍월 사선암 2015. 5. 5. 21:35

외손주 키우다 폭삭 늙은 할마나도 출근하고 싶다

 

황혼육아에 시달리는 친정엄마들

   

워킹맘인 딸을 대신해 생후 20개월인 외손자를 키우는 김모씨(62)의 이야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

 

할마.”

 

이제 겨우 단어 몇 개를 말하는 생후 20개월인 현이(가명)가 나를 부를 때 하는 말이다. 돌이 갓 지났을 때 이 녀석은 엄마하며 내게 달려오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엄마가 아니야. 할머니야라고 가르쳤더니 이제는 나를 할마라고 부른다.

 

그렇다. 나는 지난해 복직한 둘째 딸을 대신해 외손자를 키우는 친정엄마이자 할마다. 지금은 손자 보는 일이 제법 익숙해졌지만 지난해 육아를 다시 시작했을 때 나는 적잖이 문화충격을 받았다. 얼음을 깨어 기저귀를 빨았던 30여 년 전에 비하면 젖병소독기, 이유식마스터기, 아기 전용 세탁기 등 문명은 몰라보게 발전했다. 인터넷에 쏟아지는 육아정보는 어찌나 많은지.

 

그런데 이상했다. 육아는 예전보다 쉽지 않았다. 내 나이 62.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얼마 전 현이를 데리고 문화센터에 갔다가 일주일간 앓아누웠다. 한 친구는 할머니를 향해 달려오는 혈기왕성한 손자를 보고 덜컥겁이 나 뒷걸음질 쳤다고 했다. 게다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게 하는 것이 전부였던 옛날의 육아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구식 할머니가 되기 싫은 나는 손자 사진을 실시간 딸에게 보내주려 스마트폰 사용법부터 배웠다.

 

애 봐준 공은 없다

 

교사인 첫째 딸이 아들을 낳았을 때, 나는 최소한의 도움만 주겠노라고 선언했다. 수억 원을 준다 해도 육아는 싫다고 거절했다. 첫째 딸은 친정엄마 맞느냐며 한 달간 연락을 끊었다. 나는 단호했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질까 산후조리도 도우미에게 맡기라고 했다.

 

이유인즉슨 황혼육아에 가담했다가 폭삭늙은 친구를 여럿 봤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은 애 봐준 공은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한 친구는 출산을 앞둔 딸이 육아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프로필에 이렇게 쓰라고 조언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런데 둘째 딸이 예정에 없던 임신을 하면서부터 나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직장에 다니는 둘째 딸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둘째 딸이 진통으로 산부인과 병실에 누워있을 때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아무리 부정하려 애를 써도 나는 친정엄마였다.

 

엄마. 그동안 엄마 주려고 모아둔 비자금이 있는데. 현이 좀 키워줄 수 없을까.”

 

그때부터 매달 100만 원과 추가 수당을 받는 조건으로 황혼육아를 시작했다. 둘째 딸은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가 사는 아파트의 옆 동으로 이사를 왔다. 매일 아침 딸과 사위는 아이를 데리고 집에 와 맡긴 뒤 퇴근길에 찾아간다. 딸이 야근일 때는 모자가 아예 우리 집에서 자는데 딸이 아들과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안방을 내줬다. 첫째 딸도 동생의 처지를 이해했기 때문에 엄마의 변심을 용인해줬다.

 

딸 가진 죄

 

요즘 나의 일과는 이렇다.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7시쯤 현이 아침을 주고 나면 7시 반 둘째 딸과 사위를 위해, 8시엔 남편을 위해 아침을 차린다. 그 후 낮 12시 반 점심, 오후 6시 반 저녁. 중간 중간 현이 간식까지 챙기려면 부엌을 벗어날 틈이 없다. 어린이집에 보내면 좀 나으려나. 하지만 내 한 몸 편하자고 말도 못하는 손자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었다. 결국 두 돌이 지날 때까지 오롯이 내 몫이 됐다.

 

물론 이 정도 고난은 충분히 예상했다. 하지만 남편의 잔소리는 뜻밖의 변수였다. 정년퇴직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남편과 나는 요즘 육아 문제로 다시 부딪치기 시작했다. “우유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아기 반찬이 좀 짠 게 아니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던 잔소리가 내 생활을 옥죄고 있다.

 

며칠 전 근로자의 날, 날마다 그렇듯이 새로운 복병이 찾아왔다. 첫째 딸이 어린이집이 쉰다며 두 아이를 출근길에 맡기고 갔다. 둘째 딸과 사위까지 야근으로 늦는단다. 이곳은 아침부터 전쟁터가 됐다. 일곱 살짜리 손자는 로봇 부품이 사라졌다며 징징대고 다섯 살짜리 손녀는 뭇국이 맛없다고 삐죽거린다. 졸린 현이는 할마를 부르짖으며 업어달라고 조른다. 이럴 땐 정신이 멍해지며 이렇게 외치고 싶다.

 

낳은 건 너희들인데, 왜 키우는 사람은 친정엄마니. 나도 차라리 출근하고 싶다.”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음에는 엄마랑 부딪쳐 아줌마를 써야지 생각도 했죠. 지금은 아니에요. 친정엄마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예요. 모든 걸 인내하고 내 아들 둘을 키워줄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요.” (설모 씨·34·회사원)

 

유치원에서 보내준 사진을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딸과 함께 놀고 있는 우리 엄마,

언제 이렇게 늙었을까. 젊은 엄마 틈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손녀랑 열심히 노는 모습에 죄

책감마저 들었어요.” (김모 씨·39·교사)

 

 

모녀간 앙금풀고육아 기간-조건-비용 확실히 정해야

 

손주병예방위한 황혼육아 5계명

 

황혼육아를 하게 된 친정엄마는 이래저래 샌드위치 신세. 뭘 해줘도 불만인 딸부터 육아 참견꾼이 된 남편, 무심한 사위, 그리고 언제 어디서 사고 칠지 모르는 천방지축 손자까지. 육아는 물론이고 집안 살림까지 도맡다 보니 황혼육아의 각종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일컫는 손주병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윤영주 부모교육연구소장의 도움으로 친정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는 황혼육아 5계명을 정리했다.

 

엄마와 딸은 해묵은 감정부터 털어내라

 

엄마는 오빠와 날 차별했지.” “항상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 딸은 엄마에게 감사와 원망의 감정을 동시에 품고 있다. 어릴 적 엄마에게서 받았던 상처를 깊숙이 갖고 있다가, 엄마가 자신의 자녀에게 비슷한 상처를 줬을 때 서운함을 느낀다. 그때부터 모녀는 걷잡을 수 없는 관계로 치닫는다. 딸은 육아를 맡기기 전 엄마와 마주 앉아 이것부터 털어내야 한다.

 

육아 기간과 조건, 수고비를 정하라

 

육아 기간과 조건, 수고비까지 세 가지 조건에 합의해야 한다. 일단 육아 기간을 확실히 정하라. ‘아기가 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1년만 봐 준다는 식이다. 육아 시간도 아침 출근 전부터 퇴근 후인 오후 8시까지’ ‘금요일 저녁 퇴근 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맡기지 않기등으로 구체적이면 좋다. 휴가기간을 명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수고비는 월급날, 월급봉투에 담아 드리자

 

번거롭다면 자동이체도 좋다. 돈 몇 푼 아끼려고 수고비를 차일피일 미루거나 흐지부지 넘어갔다가는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수고비는 형편에 맞게 정해야 한다. 무리하게 높은 액수를 드렸다가 나중에 깎으면 그게 더 서운하다.

 

명령 대신 부탁하라

 

시어머니에게 그러하듯 친정엄마에게도 항상 조심스럽게 말하라. 특히 명령하거나 원망하는 말투는 자제해야 한다. 뭐든 부탁 조로 얘기하는 게 좋다. ‘친정엄마는 다 이해해줄 거야라는 건 딸의 생각일 뿐이다.

 

할머니는 엄마가 아니다

 

친정엄마의 양육에 대한 기대치를 최소한으로 낮춰라. ‘이왕 맡아주는 거 이유식 간도 맞춰주고, 동화책도 읽어줬으면하는 생각을 버려라. 자녀가 버릇없다고 친정엄마가 예절교육까지 해주길 바란다면 과욕이다. 악역은 부모가 맡아야 한다. 아이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키워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