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伴侶)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아내는 처녀 적부터 병을 앓았다. 그녀는 15년을 수발해준 남편 품에 안겨 행복하게 숨을 거뒀다. 브라우닝이 아내에게 바친 201행 장시(長詩)가 'one word more(한마디만 더)'다. 거기 'once, and only once, and for one only(한 번, 단 한 번 그리고 단 한 사람을 위해)'라는 대목이 두 번 나온다. 1951년 전란통 대구 교회에서 김종필 중위가 초등학교 교사 박영옥을 아내로 맞으며 읊은 사랑의 맹세다.
▶김종필은 6·25 직전 박정희 관사에서 국수를 먹다 처음 박영옥을 봤다. 박정희 조카딸은 수줍어하며 부엌만 맴돌았다. 6·25가 터지고 박정희 소령은 전선으로 떠나면서 박영옥에게 “무슨 일 생기면 김종필을 찾으라”고 했다. 김종필이 어느 날 전갈을 받고 가보니 박영옥이 요도 없이 홑이불만 덮은 채 고열에 신음하고 있었다. 말라리아였다. 박종규 일등중사에게 의사를 불러오게 해 약을 먹이고서야 열을 잡았다.
◀김종필(89) 전 국무총리가 22일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부인 박영옥 여사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자 장녀 예리(64)씨가 닦아주고 있다.
▶이듬해 1·4 후퇴 때 서울까지 밀린 김종필을 박영옥이 찾아왔다. 대구서 화물차 얻어 타고 왔다 했다. 김종필은 결혼을 결심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둘 다 고혼(孤魂) 되긴 싫었다. 결혼 후 김종필 대위는 동부 전선으로 갔다. 박영옥이 영하 20도 추위에 젖먹이 안고 폐허 춘천까지 왔다. “걱정이 돼서, 그 추운 데서 어찌 사나 싶어 왔다.”고 했다. 김종필은 훗날 “집사람 그 열정 때문에 평생 꼼짝 못하고 살았다.”며 웃었다.
▶김종필 전 총리 부인 박영옥 여사가 그제 세상을 떴다. 뇌졸중으로 몸 불편한 남편이 날마다 밤늦게 병상을 지킨 지 다섯 달 만이다. 남편은 아내가 가끔씩 사람을 못 알아볼 때마다 "데이트 신청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면 아내가 알아보고 웃곤 했다 한다. 남편은 결혼 금반지로 목걸이를 만들어 숨진 아내 목에 걸어줬다. 빈소에서 흐느꼈다. “이렇다 할 보답도 못했는데 나를 남겨놓고 세상을 뜨다니.”
▶박 여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여필종부(女必從夫)를 되새기며 남편의 길을 따른다.”고 했다. 남편을 평가해달라 하자 “하늘같이 여기기 때문에 점수 매긴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김 전 총리는 고향에 부부 묘를 마련하고 묘비명도 써뒀다. ‘내조의 덕을 베풀어준 영세(永世) 반려(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부부가 병실에 마주앉은 사진을 보니 닮았다. 64년을 함께하는 사이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영원한 짝, 반려라는 말이 새롭다. 새삼 부부란 무엇인가 생각했다.
-오태진 조선일보 논설위원-
JP의 마지막 키스
3김 중에서 DJ(김대중)는 2009년 작고했다. YS(김영삼)는 병세가 무척 깊다. JP만이 건재하다. 비록 휠체어를 타지만 그는 여전히 정확한 기억과 묵직한 언어로 버티고 있다. 그런 그가 오늘 86세 부인을 땅에 묻는다. 지난 4일간 한국인은 역사적인 상가(喪家)를 목격했다.
상가 풍경은 한편의 현대사 기록영화였다. 1961년 5·16 쿠데타를 이끈 육사 8기 주역들, ‘JP 대통령’을 꿈꾸다 정보부에 끌려간 JP그룹, 80년 JP를 가두었던 5공 신군부, 95년 JP를 쫓아낸 YS 부하들, JP를 조카사위로 맞은 박정희 가문, 그리고 취임 후 세속의 상가에 두 번째로 나타난 ‘고독의 여왕’ 박근혜···. 이런 조문객을 엮은 역사의 나이테는 50년을 넘었다.
역사의 현장에서 내가 제일 먼저 마주친 건 그러나 권력도, 정치도 아니었다. 인간 JP였다. 64년을 해로(偕老)한 부인을 보내며 89세 남편은 하염없이 흐느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위 한병기씨는 전했다. “마지막 시간, 부인의 병실엔 몇 사람만 있었습니다. JP는 제 손을 잡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JP는 한국전쟁 1년 전 육사 8기로 소위가 됐다. 동기생 1200여 명 가운데 400여 명이 전사했다. JP는 평소 자신을 생잔자(生殘者)라고 표현했다. 동기들은 전투에서 죽었는데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JP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부인의 주검 앞에선 또 다른 충격을 받는 모양이다.
JP는 몇몇 조문객에게 말했다. “몸이란 게 그렇게 빨리 식을 줄 몰랐어. 숨이 멎은 지 10분 만에 뺨을 만졌는데 벌써 무척 차더라고. 1시간 후에는 내가 키스를 했어. 그런데 입술이 얼음장 같았어.” 내가 물었다. “마지막 키스를 하신 거군요. 그렇다면 첫 키스는 언제 했습니까.” JP는 주저 없이 말했다. “아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했지. 결혼하기 전까지 무수히 했지. 속도도 위반했는걸. 내가 미국 보병학교에 갔을 때 이 사람이 편지를 보내는데 꼭 끝에다 빨간 키스 마크(kiss mark)를 찍어요. 나더러 그 위에 키스하라는 거지.”
염(殮)의 시간이 다가왔다. 시신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것이다. 딸은 아버지에게 “옷을 입힌 후에 보시라”고 했다. 그런데 JP는 “아니다. 네 어머니 씻기는 걸 내가 다 보겠다.”고 했다. “벗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부인을 보면서 JP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JP 상가에서 조문객을 사로잡은 건 64년 부부의 애틋한 감정이다. 평생 2인자 세도를 누렸지만 JP에겐 여성 스캔들이 없었다. 좋은 반려(伴侶)가 얼마나 축복받은 포만(飽滿)인지 그는 보여주었다.
잠시 다녀가는 인사들을 빼면 상가의 주객은 자민련 인사들이었다. 90년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은 3당 합당을 단행했다. JP는 약속대로 YS를 밀었고 YS는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집권 2년 만에 YS 세력은 JP를 쫓아냈다. “박정희 유신독재의 잔당”이라는 거였다. JP그룹은 고향 땅 충청도로 갔고 시련 끝에 자민련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95년 지방선거에서 충청을 휩쓸었다. 강원 도지사도 차지했다. 이듬해엔 국회의원을 50명이나 냈다. 상가의 자민련 인사들은 전설 같은 무용담에 빠져들었다.
◀1968년 10월 미국으로 떠나는 JP 부부와 아들 진씨.
사실 자민련 드라마는 JP에게도 신화다. 60~70년대 JP는 1인자 권력에 제대로 맞서질 못했다. 그가 고개를 들라치면 박정희는 내리눌렀다. “다음은 임자 차례인데 왜 서두르냐”는 것이었다. 극심한 탄압을 받아도 JP는 당하고만 있었다. “그러니 평생 2인자”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랬던 JP가 YS를 상대로는 제대로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DJ와 손잡은 후 JP는 쇠락으로 들어갔다. 50석이 2000년엔 17석, 2004년엔 4석으로 쪼그라들었다. JP는 결국 정계를 떠나야 했다.
“국민은 호랑이”라는 건 스스로 체험한 것이다. 대의(大義)를 쥐고 목숨을 걸면 호랑이는 화답한다. 그러나 대의를 비켜서 권력의 온실로 가면 호랑이는 입을 벌린다. JP는 5·16과 자민련으로 살았고 DJP로 죽었다. 뒤늦게 DJP를 깼지만 자신은 죽어갔다. 사즉생 생즉사(死<5373>生 生卽死)였다.
◀1999년 6월 28일 예지 부제크 폴란드 총리 환영만찬 중에 박영옥 여사가 김종필 국무총리의 뺨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며 웃고 있다. 박 여사는 굴곡진 정치인생을 살아온 김 전 총리의 곁을 64년 간 지켜온 충실한 내조자였다.
많은 이가 부인을 먼저 보내고 조문객을 맞는다. 그렇게 많은 상배(喪配) 중에서 JP 상가는 참으로 독특했다. 그가 허업(虛業)이라 부른 지나간 권력, 늙은 정객들의 화려한 영웅담, 반려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89세의 노(老) 정객, 그리고 ‘국가가 반려’라는 63세 싱글 여성 대통령···. 늙은 배우 JP가 보여주는 마지막 영화인가.
이제 영화는 끝나고 관객은 자리를 뜨고 있다. 검은 옷의 박근혜도 청와대로 돌아갔다. 4촌 언니가 땅에 묻히는 날, 그는 취임 2주년을 맞았다. 사촌형부의 말이 맞았나. 그동안 호랑이에게 여러 번 물렸다. 그런데 상처를 어루만져줄 이가 없다. 오늘따라 우리 대통령이 왜 이렇게 쓸쓸하게 보이는 것일까.
-2015-02-25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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