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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르 드골 대통령은 누구인가?

풍월 사선암 2015. 2. 23. 23:57

샤를르 드골 대통령은 누구인가?

 

프랑스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역사적 인물은 누구일까? 나폴레옹? 그러나 현대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드골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일생과 생전의 한마디 한마디는 지금도 프랑스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에서 항상 인용되곤 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드골의 일생을 연구하고, 정리해보고자 한다.

 

1940618BBC 방송을 통해 대독일 항전을 발표

 

샤를르 드골은 18901122일 프랑스 북부 릴(Lille)에서 태어났다. 드골이라는 이름은 1210년경부터 프랑스 역사에 등장하는 데 귀족집안은 아니고 주로 군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드골(de Gaulle)이라는 이름은 게르만어의 벽, 성벽 등을 의미하는 De Walle에서 유래하였으며, Walle은 켈트어의 Wal(영어의 Wall로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드골 집안은 18세기부터 파리에서 거주하였으나, 샤를르 드골이 릴에서 태어난 이유는 릴 지방의 섬유산업가 출신인 어머니가 친정에서 출산하였기 때문이다. 샤를르 드골은 고등학교 불어교수인 아버지의 31녀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드골은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1908년 육군사관학교(Saint-Cyr)221명의 합격생중 119등으로 입학하였다. 1912년 육사를 졸업하고 Arras에 있는 제33보병연대에 배치되었다. 당시 연대장이 Pétain 대령(2차대전 당시 나치 협력정권인 Vichy 정권의 수반) 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 중위였으며, 1914815Dinant의 첫 전투에서 부상하였고, 1915310Somme 전투에서도 왼손에 부상을 입었다. 당시 상관의 명령에 불복하여 적군에게 계속 공격 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로 8일간 정직되기도 하였다. 191632일 베르덩(Verdun) 근처의 Douaumont 마을을 방어하면서 33연대는 거의 궤멸을 당하였다. 드골이 지휘하는 중대도 거의 전사하고 드골을 포함한 생존자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독일 바이에른주 Ingolstadt 성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후일의 Catroux 장군, 비행사 Roland Garros( 동인을 추모하기 위해 테니스 프랑스 오픈이 개최되는 테니스 코트를 롤랑 갸로스라 명명) , 소련의 Toukhatchevski 원수 등을 만났다. 드골은 5번이나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191911111차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프랑스로 귀환하였다. 1차 대전이후 1919-1921년간에는 폴란드 군 교육을 위해 바르샤바로 파견되었으며, 이어서 육사에서 교육을 담당하다가 1922년에는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처칠 총리와 드골

 

샤를르 드골은 192147Yvonne Vendroux와 결혼하였으며, 슬하에 12녀를 두었는데 장남 Philippe은 후에 해군제독과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둘째 딸 Anne은 선천적 질병을 갖고 태어나 드골 대통령 부부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갖고 있었으며 결국 20세에 사망하였다.

 

1925Pétain 원수 부관, 1927년 제19대대장을 지내고 1929-1931년간 레바논에 파견되었다. 1931년 국방사무처에 근무하면서 군사분야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하였는데, 드골은 특히 기갑부대 강화, 공격적이고 기동력있는 군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1934년에는 직업군인제로 이행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인 등은 이러한 의견에 거의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37년 대령으로 진급한 드골은 Metz 주둔 507 전차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93993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당시에도 계속 507 연대장이었으며, 19401월에는 기계화 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문을 총리 등에게 발송하였다.

 

엘리제를 나서는 드골과 케네디 대통령

 

1940510일 독일군의 벨기에 공격이 개시되었다. 드골은 1940511일 제4 전차 사단장에 임명되어 프랑스 북부 Laon 지역으로 진격하는 독일군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제4 전차사단은 편성도 끝내지 못한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24 임시로 준장으로 진급한 드골은 독일군의 진격을 조금이나마 지연시킬 수 있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거의 유일한 프랑스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전투이었다  

 

194064일 당시 레노(Reynaud) 총리는 드골을 국방차관으로 임명하였으며, 주로 영국과 연합작전을 실현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6.9 에는 프랑스로 날아온 처칠 수상을 만나기도 하고 드골이 런던으로 날아가 이러한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계속 후퇴하여 결국 6.16 레노 총리는 사임하고, 독일과의 휴전을 주장한 뻬뗑(Petain) 원수가 집권하였다 

 

 

이를 반대한 드골은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6.18 BBC 방송을 통하여 대독일 항전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6.18 호소(appel du 18 juin)이다. 이로써 드골은 자유 프랑스의 상징이 되었다.

 

드골은 처칠 수상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자유 프랑스군을 창설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당시 프랑스 해외 식민지들이 점차 드골 장군측에 편입되고, 국내 레지스탕스들과의 연합도 이루었다.

 

194464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행되고, 드골은 614일 귀국하여 임시정부 수반에 취임하였다. 미국측은 당초 연합군 군정을 시도하였으나, 드골이 신속하게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프랑스는 승전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데나워 독일 총리와 우호협력협정(엘리제 조약) 서명

 

그러나 드골은 1946120일 사임하였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국가체제, 정당제도 등이 당시 공산당 등 좌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제헌의회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공화국을 다시 세우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고, 홀연히 무대 전면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완전히 정치를 그만 둔 것은 아니며, 1947년 프랑스 국민연합(RPF)를 창당하여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였으며, 다만 1953RPF가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파리를 떠나 Colombey-les-Deux-Eglises 사저에서 은둔하면서 전쟁 회고록(Memoires de guerre)을 집필하였다.

 

1958년 알제리 위기에 직면하여 당시 꼬띠(Coty) 대통령은 드골 장군에게 정계 복귀를 요청하였고, 드골은 195861일 제4공화국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전권을 위임받은 드골은 새로운 헌법을 기초하여 9월 국민투표를 통하여 통과시켰다. 12월 새로운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며 이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닉슨 대통령을 영접하는 모습, 당시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의 모습도 보인다.

 

1962년 알제리 독립이 완료되고, 드골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위상을 강화하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권에 있는 NATO 에서 서서히 발을 빼기 시작하였으며, 미국과 너무 밀착되어 있다고 여기는 영국의 유럽연합 가입을 반대하였다. 반면에 독일과의 화해정책은 일관되게 밀고 나가 1963122일 독일과 엘리제 조약을 체결하였다.

 

드골은 1964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였고, 1966년 프놈펜에서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19677월 퀘벡 방문시에는 자유 퀘벡 만세를 불러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드골은 또한 대서양에서 우랄까지 유럽이라는 기치하에 당시 쏘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도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시에는 신속하게 케네디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는 등 서방과의 유대 정책을 결코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69년 드골과 정상회담을 가진 당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내가 만난 모든 지도자들 중에서 드골 대통령 만큼 능력과 지성, 때로는 선견지명과 놀라운 직감을 가지고 모든 문제, 지구상 모든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는 엄청난 능력을 보유한 지도자는 그 어느 누구도 없다고 칭송하였다.

 

19694월 드골은 대통령직에서 사임하였다. 196524일 기자회견에서 어느 기자가 건강이 어떠냐고 묻자(드골의 나이 이미 75), “나쁘지 않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나도 언젠가 반드시 죽을 테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예언(?)대로 드골 장군은 197011월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