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vs 이병철 4] 3세시대 맞는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어디로?
시베리아 끌려갈 뻔 했던 정주영- 도쿄 구상 이병철 ‘멀리보라’교훈
사람의 삶에 변화가 무쌍하다는 의미로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현대그룹의 아산 정주영, 삼성그룹의 호암 이병철 역시 사업을 하면서 숱한 우여곡절을 넘겨야 했다.
정주영은 일본 패망 즈음에 자칫 시베리아로 끌려갈 뻔 한 적이 있었다.
마포에서 자동차수리공장을 시작했다가 화재로 알거지가 됐던 정주영은 신설동에서 다시 자동차수리공장을 세워 운영한 끝에 빌린 돈을 모두 갚게 됐다. 그러나 일제가 1943년 기업정비령을 내리면서 그의 공장은 친일기업으로 강제 합병당했다.
◀1980년대 한 행사장에서 악수하는 아산과 호암
정주영은 이후 트럭 30대로 홀동금광의 광석을 평남 진남포 제련소로 운반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3년여 동안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일을 했지만, 다른 지인에게 운송권을 넘기려는 소장의 타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1945년 5월 모든 사업권을 넘겨주고 가족과 함께 광산을 떠났다.
그로부터 3개월 후 일본은 전쟁에서 패망했고, 홀동광산에 있던 일본인, 그들과 함께 일하던 조선인 간부들은 모두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정주영은 훗날 “홀동광산 일로 사람의 삶이 ‘새옹지마’라는 것을 절감했다. 3개월만 더 지체했더라면 시베리아의 유령이 될 뻔했다”고 술회했다. 정주영은 이후 국내 현장과 해외 현장에서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사즉생(死卽生)의 자세로 목숨을 걸고 뛰어들면 어떤 사업이든 성공시킬 수 있다’는 교훈을 체득했던 것이다.
정주영식 직관경영이냐, 이병철식 시나리오경영이냐
정주영은 무슨 사업이든지 그다지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았다.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시작하고, 일단 착수한 사업은 죽기살기로 밀어붙여 성공시키는 스타일이었다. 건설업 진출이 그랬다.
그는 광산사업을 접고 서울에 돌아온 후 중구 초동의 적산 대지를 불하받아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다. 어느날 자동차 수리 대금을 받으러 관청에 갔다가 건설업자들이 공사비를 받아가는 것을 보았다. 정주영이 100원이라면, 건설업자들은 몇천원을 받아갔던 것이다.
똑같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해서 하는 일인데 자동차 수리와 건설업의 대가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그는 당장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안에 ‘현대토건사’ 간판을 하나 더 달았다.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지만, 그는 공사판 노동 경험을 밑천으로 삼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설사 ‘현대건설’의 출발이었다.
호암 이병철은 충분한 시장조사와 숱한 시나리오를 거쳐 ‘지금이 적기다’라는 확고한 판단이 들 때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
호암은 새로운 사업이 기반에 올라설 즈음 다음 사업 구상에 돌입하곤 했다. 호암이 염두에 두었던 ‘차기 사업’들은 당장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 아니라 10년, 20년, 30년 후에도 삼성그룹의 시너지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나라 경제에 꼭 필요한 영역이었다.
이같은 철학을 가진 호암에게 일본 도쿄는 ‘세계의 창’이자 신사업 구상의 메카였다. 미국,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업들이 일본시장에서 통용되던 것을 느낀 호암은 빈번히 도쿄를 찾았다. 특히 해마다 정초가 되면 도쿄를 찾아 세계의 변화를 읽고, 정보를 얻고, 새로운 사업도 구상했다. 보험업, 전자, 반도체, 항공산업 진출 등 수많은 사업 아이디어들이 도쿄에서 나왔다. 세간에서는 이를 ‘도쿄 구상’이라고 불렀다.
호암의 최대 결단은 반도체사업 진출이었다. 그는 수년간 일본의 전문가들과 토론한 끝에 결심을 하게 됐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일본의 산업구조가 개편되면서 반도체와 신소재 산업이 가장 유력한 분야가 될 것으로 확신한 이병철은 사운을 건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반도체공장을 시찰하는 호암과 이건희 회장(뒤)
어렵게 반도체 사업에 진출키로 용단을 내리긴 했지만 갈 길은 첩첩산중이었다. 우선 삼성에게 기술을 제공할 일본, 미국, 유럽의 기업은 하나도 없었다.
부심을 거듭하던 이병철과 삼성에게 떠오른 아이디어는 우연케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었다. 삼성 경영진은 미국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한국인을 샅샅이 뒤지며 애국심에 호소해 한명씩 전문가군의 퍼즐을 맞춰나갔던 것이다.
1983년 9월 경기도 기흥의 10만평 규모 VLSL 양산공장 건설은 ‘반도체 삼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세계의 글로벌 기업들에게 삼성은 제3국의 낯선 브랜드에 불과했고, 삼성이 훗날 세계 최대 반도체 생산기업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삼성과 현대에 내려오는 ‘이병철 DNA’ 그리고 ‘정주영 DNA’
정주영과 이병철, 이병철과 정주영은 한국의 산업사에서 영원한 두 거성(巨星)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 산업에서 건설, 자동차, 중공업 등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의 기초를 닦은 현대 정주영과 전자, 반도체, 모직, 금융 등 경박단소(輕薄短小) 산업의 토대를 구축한 삼성 이병철의 위업과 기업정신은 앞으로도 대한민국 산업의 실질적, 정신적 뿌리가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정주영의 경영 정신은 다섯가지로 요약된다. (1) 하면 된다. 실패할 경우 거울 삼아 재도전하라 (2) 머리로만 된다, 안된다 하지말고 일단 달려들어 실행하라 (3)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라 (4) 새벽부터 부지런히 일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 (5) 머리를 써라. 연구하고 또 연구하면 어떤 위기도 해결책이 나온다 등이다.
이같은 그의 정신은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그룹,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 등 범현대 일가의 DNA로 내려오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아산 추모 행사장을 둘러보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경우 여기에 (1) 품질경영에 사운을 걸라 (2) 연구개발(R&D)에 아끼지 말라 (3) 결단을 내렸으면 빠르게 진행하라(스피드 경영) (4) 우리만의 것을 창조하라. 모방 만으로는 안된다 (5) 항상 시너지를 생각하라 등 철학을 더해 ‘글로벌 현대차’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뒤를 이어 활발하게 보폭을 넓히고 있는 정의선 부회장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구두로, 또 행동으로 조부와 부친의 가르침을 이어받아왔다.
이병철의 경영정신은 혜안(慧眼)이 강조되는게 특징이다. 그의 정신은 장인정신과 경청의 리더십으로 요약된다.
(1)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끊임없이 도전하라.
(2)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일하라.
(3) 기업은 사람이다. 인재가 기업의 미래를 좌우한다.
(4) 치밀한 메모광이 돼라. 나무와 숲을 동시에 살펴라.
(5) 어떤 일이든 다양하게 의견을 경청하라. 독단은 부실의 씨앗이다.
이병철은 특히 고난은 항상 오기 마련이지만 고난을 새로운 도약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호암 이병철의 경영정신은 이건희 회장으로 이어졌다.
이건희 회장은 호암의 정신에 더해 (1) 철저하게 벤치마킹한 후 창조하라 (2) 신상필상(信賞必賞)으로 이끌라. 열심히 일하다가 실수한 것은 과감히 포용하라 (3) 지행용훈평(知行用訓評). 리더는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이를 행동으로 솔선수범해야 조직원들을 제대로 활용하고 가르치고, 평가할 수 있다 (4)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라. 불량 제품은 차라리 불태워라 (5) 혁신을 위해선 마누라 빼고 다 바꿔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경영철학을 더했다.
이건희 회장, 정몽구 회장은 선친들로부터 물려받은 삼성, 현대에 각자의 장점을 활용해 ‘글로벌 삼성그룹’, ‘글로벌 현대차그룹’으로 도약시켰다.
3세 시대 여는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삼성그룹을 이끌게 된 이재용 부회장, 그리고 삼성 CEO들은 호암과 이건희 회장의 경영 이념과 철학을 철저하게 체득해 경영에 활용해오고 있다.
숱한 실패를 거듭하며 사업을 일으켰던 호암 이병철, 아산 정주영 회장. 그리고 선친들과 함께 사업을 일궜던 2세 이건희, 정몽구 회장까지는 쾌속질주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사업을 일으켜 성공시켜본 경험도 없고,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경영수업만 받아온 이재용 부회장, 정의선 부회장에 대해서는 불안한 시선이 적지 않다.
정몽구 회장이 인천제철부터 거친 바닥을 거치며 사업을 배웠고, 세명의 아들 중 가장 시야가 넓고 리더의 기질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 이건희 회장이 삼성을 이끌게 됐지만, 이재용-정의선 부회장은 공교롭게도 외아들이기에 이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또한 대한민국호를 이끄는 숙명을 안고 있다.
한 해외 유력 매체의 서울특파원은 “물려받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장점도 알려지지 않은 이재용-정의선 부회장이 한국경제에서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는 두 그룹을 이어받는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미국, 유럽처럼 전문경영인들이 그룹을 맡고 이들은 뒤에서 이사회를 맡는 것이 기업이나 한국경제를 위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기업의 특성상 전문경영인 체제는 과감한 투자 회피, 단기간 실적 중심 경영 등 더 많은 단점을 갖고 있다는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재용-정의선 부회장의 경우 오랜기간 경영수업을 받아왔고, 개인의 독단적 판단 보다는 중역들과 의견을 모으고 실행하는 시스템을 충분히 습득했기 때문에 일각의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하다고 삼성그룹, 현대차그룹 관계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왼쪽)과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회장
특히 오랫동안 이들의 경영수업 과정과 경영 내용을 옆에서 지켜본 전.현직 임원들은 “3세시대를 불안하게 보는 눈길들은 이해가 가지만, 충분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고 말한다.
“두 3세의 품성이 차분히 사업을 전개해나가는 스타일이어서 우려할 필요는 없다”거나 “디지털시대에 맞는 새로운 발전적 경영스타일을 선보이게 될 것” 이라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2011년 스티브 잡스 사후 ‘애플의 미래는 암담하다’는 평가를 딛고 팀 쿡이 오늘날 애플을 명실상부하게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재도약시키고 있듯이, 삼성그룹-현대차그룹의 두 3세 CEO들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는 진단이다.
물론 자동차산업의 본산(本山)인 영국의 자동차회사들이 공장 문을 닫고, 영원할 것으로만 여겨졌던 노키아제국이 순식간에 뒤안길로 사라지는 등 세계 산업계는 한치의 방심도 허용치 않는 약육강식의 시장이기에 어떤 위대한 경영자도, 어떤 기업도 그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다만 호암 이병철-이건희 회장, 아산 정주영-정몽구 회장이 치열한 현장을 통해 체득한 경영철학과 계명들을 숙지해 활용한다면 어떠한 난관도 타개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3세 시대를 맞고 있는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성장 정체기에 접어든 대한민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뉴데일리경제 박정규 대표 기자 2015.02.17 0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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