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정원/생활글

나의 기쁨 - 박경수

풍월 사선암 2015. 1. 14. 13:11

나의 기쁨 - 박경수

 

나는 새벽 세 시에서 네 시, 그 사이면 대개 잠에서 깨게 됩니다. 이때부터 아침까지가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시간입니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이 시간이요, 무엇을 생각하는 것도 이 시간입니다. 즐거운 시간입니다.

 

잠에서 깨에 전등을 켜면, 우선 어린것들과 내자가 죽 잠들어 있 것을 보게 됩니다. 어 린 것 들은 물론 내자까지도 모두 얼굴 모습들이 비슷비슷합니다. 즐거운 구경입니다. 가구들과, 어린것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와, 벽에 걸려 있는 내자의 옷들이 보입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이 가정을 이루고 있는 부품들로 어느 것 하나 소중하고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일어나 나의 일을 착수하기 전에, 잘못 놓여 진 어린것들의 옷을 바로 놓고, 소매나 가랑이가 뒤집혀져 아침에 일어나 입기에 불편할 것들을 바로 해 놓고, 차 던진 이불을 바로 올려 덮어주고, 그리고 차례로 얼굴을 들여다봅니다. 올해 국민학교 4학년짜리 맏이, 공부도 별로 잘하지 못하고, 제 동무들과 어쩌다 싸우면 단 한 번도 이겨 보는 일이 없이 늘 매만 맞고 들어온다고 제 엄마에게 성화를 바치는 놈입니다. 그래도 나는 그놈이 귀엽고, 그놈의 장래에도 얼마만큼은 자신을 가집니다.

 

내 옛날 소학교 때에 공부를 잘하지 못했었고, 역시 동무 애들한테는 늘 얻어맞고 울기를 잘해 '매미'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엔간히 어머니를 속상하게 해 드렸던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비슷한 처지의 일종의 상련지정(相憐之情)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그 놈이 귀엽습니다.

 

다음은 둘째, 이놈은 올해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한 여섯 살 난 딸입니다. 놈은 생김 새 부터가 얄밉도록 깍쟁이로 생겼으며 재주도 있다고 맏이에게서 한을 못 푼 제 엄마한테도 많은 귀염을 받는 놈이지만, 나는 또 다른 이유로 이놈에게 유별한 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좀 창피한 얘기지만, 5년 전 잠시 직장을 놓치고 생도(生道)가 막혀 내자와 아무 때고 서로 돈 벌면 만나자는, 그런 구름 같은 허황한 약속을 하고 각기 어린것 하나씩을 맡아 가지고 피차 정처도 없이 살 길을 찾아 헤맨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내자의 등에 업혀 간 놈이 바로 이 놈이고, 더구나 그 후 내자는 광주리장수, 보따리장수 등으로 전전하느라고 엄마와 함께 참으로 고생도 많이 한 놈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셋째, 셋째이자 막내로 올해 세 살 난 역시 딸입니다. 이놈은 또 막내이기 때문에 귀엽습니다. 나는 가만히 볼비빔을 해 주고 일으켜 오줌을 누입니다. 나의 이 행동은 누가 보아도 즐거운 광경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잠든 어린놈이 못 견디게 귀여워 한 번 안아 주는 기쁨, 내자의 일을 조금 덜어 주고 더 자게 하는 기쁨이 나를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내자입니다. 아직도 나의 기척을 모르고 피곤하게 잠들어 있는 얼굴, 하나도 예쁠 것도 없는 수수한 얼굴입니다. 그러나 조금의 불안이나 그 밖의 어떠한 다른 그늘도 없는 맑은 얼굴입니다. 평화와 사랑이 담뿍 담긴 얼굴입니다. 나는 내자의 그 얼굴에서 세 어린것들, 그리고 나의 영상을 한데 보게 됩니다. 그 얼굴은 온 방안의, 온 집안의 공간을 다사롭게 그리고 풍요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 가정에 오롯이 자기를 던지고 거름이 되어 희생함으로 하나의 새로운 전체를 구축해 올리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일하는 방으로 건너가려는데, 마침내 내자가 눈을 떴습니다.

“벌써 깨셨어요? 저 방 난로가 잘 타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나보다 앞서 자기가 먼저 건너가 일단 모든 것을 보아 준 다음에야 나를 건너가게 합니다. 냉수를 떠나 놓고 계란, 우유, 사과 같은 것을 가져다 놓아 줍니다. 교회의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침에 내자는 내가 직장에 가지고 갈 도시락을 만듭니다. 그 찬이 어린것들의 아침 찬보다 좋아 보이니까, 둘째 놈, 셋째 놈은 그것을 먹겠다고 졸라 댑니다. 내자는 질색이지만 나는 그들에게 그것을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나의 도시락 찬그릇에는 대신 김치나 깍두기를 담습니다. 내자는 그만 울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집은 내자까지 포함해서 아이가 넷이 됩니다. 어느 쪽이 더하고 덜하지 않고 모두 똑같이 사랑스럽습니다. 내가 출근할 때면 내자로부터 맨 끝에 놈까지 넷이 쪼란히 마루에 나와 섭니다. 현관에서 신을 신는 나를 지켜보다가,

“다녀오세요.”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버지, 안녕.”

이렇게 일제히 인사를 합니다.

버스 안이 아무리 붐벼도, 누가 잘못해서 신을 밟아도 차장이 다소 불친절해도, 나는 이미 화낼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박경수 소설가. 충남 서천 출생(1930~ )

자동차 정비공, 운전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중학교 교사가 됨. 쉽고 평이한 문장으로 자신의 세계를 소박하게 표현함으로써 더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글을 남김. 작품집에는 <동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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